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83
82화. 옆집 할아버지(6)
***
1974년.
독일 뒤셀도르프.
파독 광부로 이곳에 온 지 1년.
한영수는 늘 향수병에 시달렸다.
종일 수백 미터 아래 지하 탄광에 기어들어 가 돌가루를 먹어가며 일하고 올라온다. 검은 가래를 뱉어내며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과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그래도 600마르크라는 거액의 월급을 송금할 때면 지난 한 달간의 고생도 향수병도 깨끗하게 잊을 수 있었다.
자신의 고생으로 적어도 고국에 남은 가족은 편안히 지낼 수 있었으니까.
“600마르크요? 월급이 650 마르크라면서 그걸 다 보내면 영수 씨는 어떻게 살아요?”
독일에서 우연히 만난 파독 간호사 김미자는 걱정이 묻어나는 얼굴로 영수에게 말했다.
같은 한국 사람이며, 자신도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기에 누구보다도 한영수의 심정을 잘 이해했다.
“잠은 기숙사에서 자고, 끼니때마다 꼬박꼬박 밥 나오잖아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가끔 고향 음식이 그립긴 하지만, 버텨야죠. 놀러 온 것도 아니고, 저만 바라보는 부모님에 동생들까지 건사하려면 지금 이렇게 외식하는 것도 사치입니다.”
한영수의 외식은 한 달에 딱 한 번. 월급날 미자를 만나 먹는 슈니첼이 전부였다.
돈가스 비슷하게 생긴 음식인데, 딱히 한영수의 입에 맞는 건 아니지만, 저렴해서 데이트 때마다 꼭 먹는 음식이다.
“그러다 몸 상해요. 여기서 주는 식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저 튼튼합니다. 근데, 미자 씨는 더 맛있는 거 시키라니까. 왜 슈니첼을 드세요.”
“저도 이게 맛있어요.”
김미자가 작은 슈니첼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참, 다음엔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제가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미, 미자 씨 집에요?”
“왜요? 싫으세요?”
“아, 아뇨. 싫기는요. 좋습니다. 꼭 초대해주십시오.”
“날씨도 좋은데 좀 걸을까요?”
“네, 좋습니다.”
가게를 나선 한영수와 미자.
두 사람은 어색하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강가를 거닐었다.
따스한 햇볕과 선선한 바람. 그리고 적당한 온도. 걷기 딱 좋은 날씨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던 미자가 길가에 핀 꽃을 보며 쭈그려 앉았다.
“영수 씨. 이게 무슨 꽃인지 알아요?”
“하하. 글쎄요. 제가 꽃 이름은 잘 몰라서.”
“물망초예요.”
“물망초. 아~ 이름 예쁘네요.”
“그쵸? 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에요. 근데, 이 꽃은 슬픈 전설이 있어요.”
미자는 옹기종기 피어있는 물망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망초 전설을 이야기했다.
“옛날에 한 연인이 살았대요. 강가를 걷던 어느 날 남자가 강 너머 섬에 피운 아름다운 꽃을 발견했어요.”
사랑하는 연인에게 꽃을 선물하겠다는 마음으로 강을 헤엄쳐 건넌 남자는 꽃을 꺾어 돌아오는 길에 급류에 휘말렸고, 마지막 힘을 다해 연인에게 꽃을 던지며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강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슬프죠?”
“아, 네··· 뭐. 엄청 슬픈 이야기네요.”
사실 그때의 한영수는 물망초 전설이 별로 슬프지 않았다.
그저 김미자의 호감을 얻고자 한 하얀 거짓말일 뿐.
…한 달 후.
미자는 약속대로 한영수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잔뜩 멋을 낸 영수는 한 벌뿐인 양복을 빳빳하게 다려입고, 그녀의 집에 방문했다.
“미자 씨. 여기···. 빈손으로 오기 좀 그래서.”
물망초 화분을 내밀며 영수가 쑥스럽게 말했다.
“예쁘네요.”
“그렇죠? 이게 가만히 보니까 생긴 게 꼭 미자 씨처럼 예쁘고, 소담스럽지 뭡니까.”
느닷없는 칭찬에 미자는 홧홧해진 뺨을 손등으로 만지며 부끄럽게 미소 지었다.
“들어오세요.”
“넵!”
미자는 한창 음식을 준비 중이었다.
바깥 음식보다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다.
“와~ 미자 씨. 이게 다 뭡니까?”
팬 위에서 자글자글 익어가는 떡갈비와 김치 그리고 하얀 쌀밥. 단출하지만, 식탁 가득 푸짐하게 차려진 한식에 감탄하며 물었다.
“고향 음식 그립다면서요.”
“이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쌀밥에 김치입니까. 하하. 오늘 미자 씨 덕분에 포식하게 생겼습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아삭-
비록 젓갈이 듬뿍 들어간 제대로 된 김치는 아니지만, 제법 비슷한 맛이 났다.
매일 기름진 음식만 먹으니 한식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손 씻고 앉아서 드세요.”
“김치는 이렇게 먹어야 제맛이죠. 우리 미자 씨, 음식 솜씨가 아주 끝내줍니다. 하하하.”
한영수의 칭찬에 배시시 웃어 보이는 미자.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재료가 부족해서 있는 대로 만들었어요.”
“있는 대로가 이 정도면 제대로 갖춰 놓고 만들면 기절초풍하겠습니다.”
“암튼 말은···.”
사소한 것에도 칭찬해주며 살갑게 대해주는 한영수가 좋았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만난 말과 마음이 통하는 남자.
영수와 미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한참을 웃었다.
먹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해가 졌고, 어느덧 헤어져야 할 시간.
“맛있게 드셨어요?”
“아주 포식했습니다. 배 보십시요. 빵빵하잖아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영수가 자기 배를 두드렸다.
“특히 떡갈비가 아주 맛있던데요?”
“떡갈비? 그거 떡갈비 아닌데.”
“네?! 그럼요?”
“햄버그스테이크예요.”
“생긴 게 꼭 떡갈비던데.”
“비슷하긴 하죠. 참, 이거 가져다 드세요.”
미자는 한영수를 위해 넉넉히 만들어 둔 햄버그스테이크를 포장했다.
“기름 두르고, 구워 드시기만 하면 되니까 가져가셔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반찬 부실할 때 드세요.”
“고맙습니다. 미자 씨. 제가 미자 씨 덕분에 호강을 다 합니다. 하하.”
“끼니 거르시지 말고요. 건강이 최고예요.”
그릇을 받아드는 한영수의 손이 미자의 손과 닿았다.
그 순간, 이 여자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자 씨. 우리 결혼합시다.”
“네?! 결혼이요?”
“한국 가면 바로 식 올립시다.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힌다고는 말 못 해도 행복하게는 해주겠습니다.”
눈을 꼭 감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프러포즈했다.
차이면 어쩌지 걱정하며 실눈을 뜬 순간, 부끄럽게 웃는 미자의 얼굴이 보였다.
“좋아요···.”
그 후로도 2년간.
미자는 영수에게 반찬을 해 나르며 사랑을 이어갔다.
주말이면 미자의 집에서 슈니첼도 먹고, 함박스테이크도 먹으며 3년간의 힘든 파독 광부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한영수와 김미자는 그길로 한국으로 되돌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
“딱 그때 먹던 맛이야. 뻑뻑하니, 목메는 맛.”
한영수의 청춘을 느끼게 해주는 맛이다.
그리고 이제는 곁에 없는 아내, 미자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맛.
“슈니첼 안 좋아하시는 거였어요?”
“아니. 좋아해. 엄청.”
뻑뻑해서 목메는 맛을 좋아하다니.
한영수 노인의 속사정을 모르는 해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중에 또 얻어먹을 수 있겠나?”
“드시고 싶을 때 말씀하세요. 언제든 해드릴게요.”
“고맙네.”
…얼마 후, 한영수는 수술대에 올랐다.
결과가 좋지 못했다.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퍼진 암세포를 떼어내는 건 불가능했고, 한영수는 길어야 2개월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퇴원해야겠어.”
해준이 체력 회복에 좋은 마법 요리를 냉장고에 채워 넣고 있을 때, 파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영수가 말했다.
“퇴원이요?”
“여기 누워서 죽음을 맞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병원에서 해줄 것도 없을 텐데.”
병원에서도 한영수의 퇴원을 말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영수는 평소처럼 마당을 쓸고, 한편에 무리를 지어 핀 물망초꽃밭에 물을 줬다.
그의 건강이 염려된 해준은 수시로 집에 드나들며 이것저것 음식을 해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자네. 물망초 꽃말이 뭔지 아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나를 잊지 마세요. 우리 집사람이 좋아하던 꽃이지.”
한영수는 차해준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럼 할머니는···.”
“죽었어. 5년 전에. 슈니첼을 보면 먼저 간 집사람이 생각나.”
“사모님이요?”
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돈 없어서 레스토랑에서 가장 싼 슈니첼을 시켜도 군말 없이 웃으며 먹어줬거든.”
한영수가 희미하게 웃으며 물망초를 쓰다듬었다.
죽은 아내가 생각났다.
임종이 오기 전 미자는 물망초를 심었다. 혼자 남을 한영수가 외롭지 않도록. 또,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며.
그 후로 한영수는 매해 물망초를 피웠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자네. 혹시 햄버그스테이크도 만들 줄 아나? 한국에 돌아와서도 집사람이 자주 해줬었거든. 갑자기 그게 먹고 싶구만.”
한영수가 아련한 눈으로 말했다.
“내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아내는 고기를 다졌지. 탁탁탁탁 도마를 두드리던 그 소리가 그립구만. 어때 햄버그스테이크 좀 만들어주겠나?”
햄버그스테이크. 일본식 발음으로 굳어져 보통 함박스테이크로 알려진 음식. 최근 해준이 신메뉴로 올리려고 연구 중인 메뉴다.
레시피가 완성되면 흑소에서 나오는 최고급 등심 부위로 구운 스테이크와 함께 메뉴에 올릴 예정이지만, 현재로서는 맛이 1% 부족했다.
원재료가 좋은 덕에 맛이 훌륭했지만, 원하는 식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만들어야 했다.
“만들어드릴게요.”
“부탁함세.”
***
해준은 농장에서도 가장 질 좋은 수확물만을 특별히 엄선해 가져왔다.
이번에는 반드시 원하는 맛을 끌어내겠다고.
‘음···.’
해준은 재료들을 앞에 두고 레시피 노트를 확인했다.
지금까지 완성한 햄버그스테이크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기계로 간 소 채끝과 돼지 등심을 7:3 비율로 섞어 빵가루, 달걀, 다진 양파와 마늘 소스 등을 섞어 열심히 치댄다. 5분 이상 치대 찰기가 생긴 반죽을 가운데가 움푹하게 모양을 잡아 구워주면 되는 간단한 레시피.
‘그런데 희한하게 맛이 부족하단 말이야. 식감도 너무 뻑뻑하고.’
해준은 씹는 순간 소와 돼지고기의 육즙이 팡팡 터지는 그런 햄버그스테이크를 만들고 싶었다.
빵가루 비율을 조절해보기도 하고, 촉촉하게 굽는 방법을 며칠째 연구해봤지만 만족스러울 만한 결과는 보이지 않았다.
‘음···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때.
-내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아내는 고기를 다졌지. 탁탁탁탁 도마를 두드리던 그 소리가 그립구만.
한영수가 지나치듯 했던 말이 기억났다.
탁탁탁탁- 도마를 두드리던 소리는 고기를 칼로 다질 때 나는 소리다.
‘기계 대신 칼로 직접 다져볼까?’
지금까지 해준은 늘 고기는 기계로 다져왔다.
어쩌면 그게 해답이 될지도 몰랐다.
탁탁탁-
탁탁탁탁-
소 채끝과 돼지 등심 덩어리를 잘게 다졌다.
적당히 다진 고기를 나머지 재료와 섞어 치대고, 둥글납작한 특유의 모양을 만들었다.
뜨겁게 달군 불판에 식용유를 한 바퀴 두르고, 반죽을 올렸다.
치이이익-
“맛있게 익어라.”
고기가 익는 동안 소스를 만들었다.
버섯과 양파를 들들 볶다가 케첩, 설탕, 우스터 소스, 버터를 넣고 졸였다.
노르스름하게 익은 햄버그스테이크를 접시에 담고, 그 위에 소스를 부었다.
마지막으로 반숙 달걀을 올려주면.
“완성이다.”
***
한참을 물끄러미 햄버그스테이크를 바라보던 한영수는 군침을 삼키며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잔뜩 설레는 표정으로 서서히 나이프를 움직인다.
달걀노른자가 팟- 터지면서 용암처럼 흘러내려, 반으로 갈라진 햄버그스테이크 사이로 스며든다. 노른자와 소스 그리고 흘러내린 고기 육즙이 한데 어우러져 범벅됐다.
“으음~ 향기 좋다.”
냄새를 맡는 한영수의 코가 거의 접시에 닿을뻔했다.
해준은 그토록 밝은 한영수의 표정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그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아셨어요?”
“그럼. 내가 날 때부터 심통 할배인 줄 알았어?”
‘윽!’
한영수도 자신의 별명을 알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오붓하게 살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심통 할배가 아니었다.
늘 인자한 미소를 띠는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
미자를 먼저 보내고, 괜한 심통이 늘었다.
그런 한영수가 아내를 떠올리게 만드는 햄버그스테이크에서 다시 온화한 미소를 찾았다.
천천히 입을 벌려 소스를 듬뿍 묻힌 스테이크를 먹었다.
눈을 감고 입을 움직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충분히 음미할 시간을 준 해준은 한영수에게 물었다.
“맛은 어때요?”
“···맛있어. 이 맛있는 걸 혼자 먹으려니 집사람한테 미안하구만. 평생 고생만 시켰는데.”
한영수는 이내 말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