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88
87화. 러블리엔젤(5)
***
“미쳤네.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
풀메이크업에 헤어, 의상까지 장착한 민주의 개인 촬영 영상을 모니터하던 김정후 대표가 중얼거렸다.
민주뿐이 아니다. 태린, 서아, 하린, 연우 모두 콘셉트에 맞춰 나름의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대박 예감이다.’
핑키데이를 이을 대형 신인이 탄생할 거라는 느낌이 왔다.
사실 핑키데이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다음에 역주행 신화를 써 내려갔지만, 러블리엔젤은 데뷔와 동시에 톱을 찍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거봐요. 제가 뭐랬어요. 장난 아니죠?”
강은정이 우쭐하며 말했다.
“고생들 했어.”
김정후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직원들의 노고에 감사했다.
캐스팅부터 캐릭터 콘셉트, 노래, 안무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최상의 결과물을 눈앞에 두고 있다.
“대표님, 인사는 음방 1위 찍으면 하세요.”
“음원 차트 1위는 자신 있고?”
“당연하죠. 음원, 동영상, 방송 다 씹어먹을 자신 있어요.”
데뷔 싱글 프로듀서인 용형준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역시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을 지켜보며 뭔가 느낌이 온 것 같았다.
***
-오빠, 내일도 올 거죠?
뮤직비디오 촬영 하루 전.
차해준과의 통화하던 민주가 물었다.
먼발치에서나마 자신을 지켜봐 주고 있으면 용기나 나서 촬영을 잘할 것 같다며 말했다. 해준은 흔쾌히 승낙했고, 빈손으로 가기 뭐해 이번에도 밥차를 준비하기로 했다.
‘겸사겸사 스태프들 식사도 좀 챙겨주고.’
마침 야밤 식당 촬영 없는 주말이라 시간은 충분했다.
스태프들이 먹기 편하도록 평소 파는 메뉴 대신 색다르게 한식 뷔페로 준비하기로 했다.
밑반찬을 미리 만들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혼자 할 수 있고, 현장에서 메인 메뉴만 몇 가지 만들면 되니 간편하다.
‘메뉴는 어떻게 구성하지?’
해준은 노량진 공시생 시절 자주 다니던 한식 뷔페 메뉴를 떠올렸다.
무조건 싼값에 푸짐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한식 뷔페.
주머니 사정이 얇은 차해준도 월정기권을 끊어놓고, 점심은 늘 거기서 해결했다.
‘육해공이 적당히 포함된 메뉴면 좋을 것 같은데···.’
메인 메뉴를 고민하던 해준은 삼겹살을 굽기로 했다.
쌈 채소도 다양하고, 단백질도 풍부하니 현장에서 고생하는 스태프들 반찬으로 안성맞춤.
“하는 김에 치킨도 좀 튀길까?”
썬플라워에서 초벌로 튀겨가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터.
닭 뼈를 발골해 가라아게 스타일로 튀김옷 대신 전분만 얇게 입혀 튀기기로 했다.
“기름진 반찬을 준비했으니, 국은 깔끔하게 바지락을 넣어 끓이자. 칼칼하게 청양고추 좀 썰어 넣고.”
메인을 결정했으니, 음식을 뒷받침해줄 밑반찬이 필요했다.
한식 뷔페인 만큼 도토리묵, 오이소박이, 달걀찜, 나물 무침, 샐러드 같은 메뉴를 넣기로 했다.
‘열대과일도 가져가서 후식으로 내자.’
메뉴를 정한 해준은 바로 조리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도토리묵부터 쑤어야 한다.
도토리 가루를 얇은 면포에 넣고, 물에 담가 빨래하듯 빤다. 그러면 흙탕물처럼 황토색 물이 우러나온다.
주무르고, 옮겨 담고 또 주물러 침전시켜 도토리 물을 만든 다음. 솥에 넣고 뭉근히 끓이며, 한쪽으로 눌어붙지 않도록 계속 저어주기만 하면 된다.
과정은 간단하지만, 도토리묵은 그야말로 인내의 요리.
불 앞에서 몇 시간 동안 미세한 불 조절을 해가며 젓기만 하면 되지만 인내력의 한계에 부딪혀 의외로 실패하기 쉬운 음식이다.
뽁-
뽁뽁-
묵이 밀크커피 색을 띠며 걸쭉하게 익어갈 때쯤 용암처럼 거품이 터졌다.
참기름과 소금을 살짝 첨가하고 넓은 그릇에 부었다.
이제 남은 건 묵이 식으면서 굳는 동안 양념장을 만드는 일.
‘양념은 어떻게 하지?’
간장에 대파를 송송 썰어 넣을지 아니면 오이, 양파, 당근을 썰어 넣고 고춧가루에 무칠지 고민됐다.
‘오이소박이도 메뉴에 있으니 담백하게 간장 양념으로 하자.’
곁들일 소스까지 완성했다.
차갑게 식은 도토리묵은 마치 아기 엉덩이처럼 찰랑거렸다.
해준은 묵과 소스를 따로 담은 후, 오이소박이를 담갔다.
아삭아삭하고 시원한 식감의 오이소박이는 일반적인 배추김치처럼 푹 익혀 먹는 게 아니라 담그자마자 바로 먹을 때 맛있다. 갓 지은 하얀 쌀밥에 새빨간 고춧가루가 듬뿍 발라진 오이를 한입 베어 물고 씹으면 매콤하면서도 싱그러운 오이 향이 입안 가득 퍼지게 마련.
꿀꺽-
손가락 마디 크기로 자른 오이에 십자 모양 칼집을 내던 해준이 군침을 삼켰다.
식감을 상상하니 허기가 밀려왔다.
오이소박이의 아삭한 식감을 유지하기 위해선 절이는 방법이 중요하다.
그냥 소금에 절이는 게 아니라, 팔팔 끓는 뜨거운 소금물에 1시간 정도 절여야 한다. 이때 오이가 뜨지 않도록 누름돌로 눌러주는 건 필수.
오이가 절여지는 동안 부추에 양파, 고춧가루, 마늘, 생강, 새우젓과 멸치 액젓을 넣고 속을 버무려준다.
이렇게 만든 소를 오이에 짜지 않게 적당히 채워주면 끝.
두 번째 반찬까지 만든 해준이 허리를 펴며 걸쭉한 신음을 뱉어냈다.
“으아, 힘들다.”
별것 아닌 것 같은 밑반찬들.
먹는 건 금방이지만, 만드는데 꽤 많은 노동력이 들어간다.
예전에도 이 사실을 알았다면 밥 한 톨, 반찬 한 젓가락까지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 치웠을 것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 해준은 나물과 샐러드까지 밑반찬을 착착 만들었다.
“휴, 겨우 끝났네.”
차원의 농장에서 음식을 만든 덕분에, 이 모든 걸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시간.
해준은 대여한 푸드 트럭에 음식을 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
“응?··· 야, 차해준. 니가 왜 여기서 나와?”
후배 응원차 뮤직비디오 촬영장에 방문한 핑키데이 혜리가 차해준을 보며 놀라 물었다.
“민주 응원도 할 겸 밥차 하러 왔어요. 누나. 다리는 좀 어때요?”
“보다시피 쌩쌩해. 콘서트 때도 봤잖아. 근데, 인연 참 묘하다. 민주가 우리 회사에서 데뷔하다니.”
참 신기한 인연이다.
자기가 준 콘서트 티켓으로 차해준과 민주가 함께 공연에 왔었다. 야밤 식당 촬영장에도 왔었다고 했지만, 혜리는 그때가 민주와의 첫 만남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제법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며칠 후 연습생이 됐다며 인사를 하더니 이젠 데뷔를 한다고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있다.
“사람 일 모르는 거야. 근데 뭘 이렇게 푸짐하게 차려왔어?”
혜리가 푸짐하게 담긴 반찬통을 훑으며 물었다.
정갈한 밑반찬도 밑반찬이지만, 혜리의 후각과 시각을 사로잡는 건 바로.
지글지글-
숯불 위에서 맛있게 익어가는 삼겹살.
“스태프들 든든하게 먹이려고요. 참, 누나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스케줄하러 강릉 가는 길이거든.”
“시간 괜찮으면 식사하고 가세요.”
“헤헤. 그럴까?”
먹지 말라고 해도 먹으려 했다.
삼겹살 굽는 냄새에 이미 영혼까지 빼앗겨버렸으니까.
혜리가 밥과 반찬을 식판에 그득히 담고, 자리에 앉았을 때.
“사장님!” “셰프님~!!”
민주와 러블리엔젤 멤버들이 해준의 밥차를 발견하고 신나게 달려왔다.
그 뒤로 보이는 낯선 사람들.
크게 한 쌈 싸서 입에 욱여넣던 혜리가 정장 차림의 남자를 보고 반갑게 일어났다.
“대호우니이··· 아녀하스에요.”
“야, 혜리야. 입에 건 다 씹고 말해라. 튀어나오겠다.”
쌈을 머금은 혜리의 볼이 짱구처럼 부풀어있었다.
간신히 음식물을 씹어 넘긴 혜리가 다시 제대로 인사했다.
“대표님이 쌈 싸 먹는데, 나타나니까 그렇죠.”
“너 스케줄은 안가고 여기서 뭐해?”
“우리 후배들 뮤비 촬영 잘하나 구경하러 왔죠.”
“그냥 밥차 먹으러 온 거 같은데? 이 밥차 니가 부른 거야?”
“대표님. 그냥 밥차 아니고, 저 일 하던데 사장님이에요. 오늘은 저희 응원해주신다고 오신 거고.”
민주가 중간에서 정식으로 차해준과 김정후 대표를 인사시켰다.
“몰라뵀습니다. 실물이 화면보다 훨씬 낫네요. 하하.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JH 대표 김정후입니다.”
차해준은 혜리와 같은 야밤 식당 출연자이며, 훈훈한 외모로 요즘 주가가 높아지고 있다.
“듣자 하니 얘들 다이어트 도시락을 셰프님께서 직접 싸주셨다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근데 이건?···”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음식 좀 준비했습니다. 다들 오셔서 드세요.”
스태프용 한식 뷔페 음식 중 몇 가지에는 체력과 지구력을 올려주는 버프가 붙어있다.
음식을 먹으면 고된 촬영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터.
“저희도 먹어도 돼요?”
태린이 군침을 흘리며 물었다.
“아니. 너희 건 여기 있어.”
차해준이 따로 가져온 도시락을 건넸다.
평소처럼 다이어트 식단으로 짠 도시락에 오늘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음료도 있다.
“음료는 이거 마시고.”
강렬한 붉은빛 위에 눈처럼 크림이 내려앉았다.
붉은 음료는 딸기 과육이고, 크림은 코코넛 밀크를 휘핑크림처럼 만들어 올렸다.
[딸기 코코넛 스무디] – 섭취 후, 6시간 동안 얼굴 부기를 빼주는 효과가 있다.직접 시음해본 결과 색도 예쁘지만, 맛도 좋고, 버프 효과도 탁월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셰프님.”
“바쁘실 텐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고,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뭘. 앉아서 드세요.”
김정후는 물론이고, 다른 스태프들도 엉겁결에 줄을 서 음식을 배식받았다. 러블리엔젤 녀석들도 자기들끼리 모여 차해준의 스페셜 도시락을 먹었다.
김 대표는 식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즉석에서 구운 삼겹살과 가라아게. 밑반찬도 푸짐하고, 밥과 국도 맛있어 보였다.
‘바지락국인가?’
맑은국에 오동통 살이 오른 바지락이 탐스러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후는 맑은 국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후르릅-
은은한 바다 향기와 함께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국물.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위장까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아··· 시원하다.’
어찌나 시원한지 마시지도 않은 술이 해장 되는 기분이다.
연거푸 두어 숟가락을 더 퍼먹었다.
“크으으~.”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
이번엔 국물 대신 살이 오른 바지락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
조개는 또 어떠한가.
너무 오래 끓이면 육수에 모든 걸 빼앗겨 고무처럼 질겨지는 것이 조개다. 그런데 이 바지락은 탱글탱글한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단지 국만 먹었을 뿐인데, 차해준의 요리 수준을 알 수 있었다.
‘보통 실력이 아니다.’
야밤 식당 셰프 자리를 두고, 장일수 피디가 삼고초려를 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육즙을 제대로 가둔 삼겹살도 닭의 잡내를 완벽하게 잡은 가라아게도 일품이었다.
오이소박이며, 밑반찬도 말할 것 없었다.
‘맛있다.’
다음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던 정후의 젓가락이 양념간장으로 맛을 낸 도토리묵으로 향했다.
‘직접 쑨 건가?’
젓가락 끝으로 도토리의 탄력이 느껴졌다.
탱그르르-
100% 도토리 가루로 묵을 쑤면 마치 푸딩처럼 탄력 있게 탱글탱글함을 유지한다.
향도 진하고, 풍부하며 입에 넣었을 땐 쫀득함과 기분 좋은 탱글탱글함이 느껴진다.
‘역시···.’
비강을 자극하는 진한 도토리 향과 특유의 재미난 식감. 혀뿌리에 은근히 도는 쌉싸름한 맛을 보아하니 진짜 도토리묵이다.
직업 특성상 접대할 일이 많은 김정후 대표는 유명 한정식집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제대로 된 한식을 맛을 여기서 느끼게 되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김정후의 젓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 이 순간. 김정후 대표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그 이유조차 망각했다.
이 세상에 그저 이 밥상과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음식을 먹었다. 가끔 혼자만 들을 수 있는 감탄사를 뱉어내며.
“하아··· 잘 먹었다.”
식판을 깨끗하게 비운 김정후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회사 연습생과 아티스트들에게도 이런 양질의 음식을 먹이고 싶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저, 셰프님.”
“음식 부족하세요?”
“아뇨. 그건 아니고요. 저희 애들 식사 좀 책임져주세요.”
김정후는 앞뒤 다 자르고, 문맥 없이 다짜고짜 들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