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9
8화. 통밀 식빵(1)
***
농장의 풍경이 조금 더 변했다.
어제보다 안개가 2미터 정도 물러났고, 그만큼 부지는 더 넓어졌다.
서둘러 밀을 수확한 해준은 빈 밭에 다시 밀을 심었다. 농장과 포테의 회복을 위해서였다.
[오오, 농장 곳곳에서 생명력이 움트는 기운이 마구마구 느껴집니다.]어느 때보다 힘찬 목소리로 포테가 말했다.
[이게 다 해준 님 덕분입니다.]“그래? 고생한 보람이 있네.”
밀 파종을 마친 해준은 안개가 걷힌 지역을 살폈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부지는 어제처럼 풀과 나무, 돌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해준은 울타리 주변을 돌며 주변을 정리해나갔다.
‘이건 뭐지?’
잡초들 사이에서 열무 이파리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다른 풀과 달리 식용이 가능할 것 같은 모양. 노트를 펼쳐 비슷한 그것과 비슷한 생김새의 작물을 찾았다.
“흐음··· 이렇게 봐선 잘 모르겠는데.”
아버지의 그림은 다 자란 작물만 그려놓았기에 이 작은 식물의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때,
[오, 이건 양배추네요.]“양배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즐겨 먹던 채소로 장수 식품 중 하나로 꼽히는 작물입니다. 동그란 공처럼 생겨서 샐러드나 볶음요리에 쓰고, 염소가 아주 좋아하는 먹이죠. 씨앗을 뿌려도 되지만, 이렇게 모종을 옮겨 심어도 잘 자라는 작물입니다. 여기 농장에서라면 12시간이면 충분히 먹기 좋은 크기로 자라죠.]포테의 친절한 설명. 아버지 역시 포테의 설명을 들어 이 노트를 작성했으리라.
그래도 조금은 보충이 필요할 것 같았다. 여긴 여기선 휴대전화를 쓸 수 없으니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양배추 모종을 발견한 김에 생김새를 적어 놓고 싶었다.
창고를 뒤져 새 깃털이 달린 펜과 잉크를 찾아내 모종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 비슷하게 옮겨 그렸다.
“됐다··· 아! 이것도 밭에 옮겨 심자.”
밭에는 몽땅 밀을 심어둔 상태.
해준은 밀밭과 비슷한 크기의 밭을 하나 더 일구었다.
울타리 밖에서 가져온 양배추 모종을 옮겨 심고, 물을 줬다. 양이 워낙 적은 터라 밭에 남은 이랑이 3개나 더 있었다.
“여기에도 뭘 심었으면 좋겠는데. 다른 것들도 있는지 더 찾아볼까?”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아 괜히 흥이 올랐다.
나무 막대기를 하나 구해온 해준은 지뢰탐지를 하는 것처럼 땅을 쿡쿡 쑤시며 새롭게 열린 부지를 돌아다녔다.
그 결과.
“수확이 괜찮은데?”
양배추 모종을 추가로 더 발견했고, 덤으로 오이 넝쿨도 찾았다.
찾은 것들을 밭으로 가져와 남은 공간에 심어주고, 물을 줬다. 그랬더니 이내 작물들이 자리를 잡고 쑥쑥 성장하기 시작했다.
농장이 가진 생명력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아! 거름.”
식물의 놀라운 생명력을 감탄하며 보던 해준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채소 종류는 거름을 주면 쑥쑥 잘 자란다는 글귀는 아버지의 노트에서 봤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창고 옆에 쌓아둔 비료를 확인했다. 썩어버린 밭을 새로이 일구는데 대부분을 써버려 얼마 남지 않았다.
“거름이 얼마 남지 않았네··· 만들어야겠는데?”
아버지의 노트엔 거름 제조법도 적혀있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지푸라기와 나뭇가지, 낙엽 등을 긁어모아 바람이 잘 통하는 양지에서 잘 발효시켜주면 된다.
해준은 갈퀴를 꺼내 울타리 밖에서 나뭇가지와 낙엽을 긁어모았다. 열심히 모으다 보니 10미터 간격으로 작은 더미들이 만들어졌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밀짚모자를 잠시 벗어두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노동을 할 때마다 부지가 조금씩 넓어지고, 새롭게 얻은 땅을 정비해나가는 데서 묘한 쾌감이 생겼다. 눈에 보이는 성과 덕분에 생기는 성취감. 사실 공시 준비를 할 때는 결과가 당장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맞는 길로 가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나침반도 없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를 헤쳐나가는 기분이랄까.
지금은 하는 만큼 결과가 나타났고, 뿌듯함이 느껴졌다.
[또 뭘 하시는 겁니까?]“거름을 만들게. 전에 만들어 놓은 건 조만간 동날 것 같아서.”
[오, 찰스 님도 시간이 날 때면 늘 거름을 만들곤 하셨죠. 소똥으로도 만들고, 해준 님처럼 낙엽과 식물들을 모아 만들기도 하셨는데.]“알아. 나도 노트에서 본 거거든.”
[역시!]거름이 될 때까지는 최소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아마도 여기선 하루나 이틀이면 밭에 뿌리기 좋은 양질의 거름이 완성될 것이다.
[크으··· 역시 근면, 성실의 아이콘 차해준 님! 어쩐지 믿음직스럽습니다.]포테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의 노력 덕분에 농장이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울타리를 감싸듯 수십 개의 거름 더미가 생겨났다. 한쪽에 보기 좋게 모아놓고 싶었지만, 운반 도구가 마땅치 않아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생산성이 떨어지네. 손수레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물품 반입이 안 된다는 사실이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아쉬웠다.
넓은 농장을 관리하려면 최소한의 도구들이 더 필요한데, 해준이 아는 지식 범위에선 그걸 만들어낼 재간이 없었다.
꼬오옥- 꼬- 꼬- 꼭-
꼬끼오-
거름 만들기 작업이 막 끝났을 무렵 어디선가 아주 익숙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해준은 귀를 쫑긋 세웠다.
“닭?”
울음소리는 안개의 경계 언저리에서 들려왔다.
[닭이다, 닭! 닭이 나타났습니다.]포테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쉿!”
[읍!···]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하자, 포테가 양옆으로 솟아난 줄기로 입을 가렸다.
몸을 숙이고 주변을 둘러보다 풀숲 사이에서 하얀 깃털이 돋아난 암탉을 발견했다. 이따금 오솔길을 오갈 때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른 생명체를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암탉이야.”
[잡아서 가축으로 기르시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닭은 달걀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도축하면 양질의 고기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동물이죠.]“달걀?”
[넵. 삶아 먹어도 좋고, 프라이를 해도 맛있는 달걀. 사람에겐 아주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죠. 해준 님도 좋아하시죠?]“당연하지.”
어린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는 입이 짧은 해준이 밥투정을 할 때면 늘 간장 계란밥을 해주셨다.
갓 지은 뜨끈한 흰쌀밥에 반숙 달걀 프라이를 얹어 간장과 참기름을 쪼르르- 붓고, 노른자를 톡 터트려 슥슥 비벼주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이때 핵심 포인트는 흰자 가장자리를 태우듯 오래 튀겨야 한다. 그래야 과자처럼 바삭한 식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노른자와 간장, 참기름으로 코팅된 밥알과 바삭한 식감의 흰자를 동시에 입에 머금었을 때의 황홀감.
꿀꺽-
자신도 모르게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해준은 눈앞의 닭을 포획하겠다는 일념으로 상체를 숙여 살금살금 전진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암탉.
때를 노리던 해준은 암탉이 등을 보인 순간,
“잡았···.”
잽싸게 몸을 날렸다.
우당탕-
그러나 해준을 비웃기라도 하듯 닭은 쏜살같이 앞을 향해 튀어 나갔다.
[큭. 실패하셨네요. 야생의 닭을 포획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죠.]“알아. 조용히 해.”
녀석은 여간 눈치가 빠른 게 아니었다.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접근해 뒤를 노렸으나 이번에도 해준을 비웃듯 빠져나가 유유히 풀숲을 거닐며 먹이를 뜯어 먹었다. 마치 해준을 놀리듯.
빠직-
어쩐지 약이 잔뜩 올랐다.
“닭 꽁무니만 쫓아다니다가 힘 다 빠지겠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생각에 잠겼다.
몸만 써서는 약삭빠른 닭을 생포할 수 없었다.
“아!”
문득 떠오른 묘책.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떠오르셨나요?]“응. 아주 기가 막힌 방법. 으흐흐···.”
해준은 어쩐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반드시 잡아주겠어.”
.
.
.
[이 방법이 통할까요?]수풀 사이에 포복하듯 엎드린 해준을 보며 포테가 물었다.
한 손으로 줄을 꽉 잡은 해준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저었다.
“당근 통하지. 저리 가 있어. 들킬라.”
전면을 응시한 해준은 긴장한 듯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엔 작은 덫이 설치되어 있었다. 덫의 원리는 간단했다. 닭이 좋아하는 먹이인 밀을 한주먹 뿌려놓고, 바구니 덫을 만들어 줄을 연결했다. 시골에서 참새잡이에 쓰던 방법. 이제 닭이 먹이를 먹으러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잠시 후.
한가로이 풀을 뜯던 닭이 덫 아래 놓인 밀알 주워 먹으러 접근했다.
‘옳지. 안으로 더 들어와.’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해준은 줄을 쥔 손을 고쳐잡으며 타이밍을 쟀다.
너무 빨라도 안되고, 느려도 안 된다. 녀석이 먹이에 정신이 팔린 절호의 순간 낚아채야 한다.
“바로 지금!”
휙-
탁-
파다닥- 꼬끼오- 꼭꼭꼭-
덫에 걸린 암탉이 빠져나가려 날갯짓하며 몸부림을 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나이스. 잡았다.”
해준은 바구니 안에 갇혀 날갯짓하는 암탉을 의기양양하게 내려다보았다.
“짜식아, 도망쳐봐라. 안되지? 으하하.”
만면에 가득한 미소.
해준은 실로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
“이 정도면 됐겠지?”
울타리를 수리하고 남은 판자를 사용해 어설프게나마 닭장을 만들었다. 알곡을 수확하고 남은 지푸라기로 나름대로 알 낳을 곳도 마련해주고, 먹이로 밀알을 한 움큼이나 줬다. 잡혀 올 땐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던 녀석이 먹이를 주니 이내 자신의 처지를 잊은 듯 먹이를 쪼아먹는 데 집중했다.
역시 닭은 닭이다.
“잘 먹고, 쑥쑥 커서 달걀 좀 많이 낳아줘라.”
닭을 포획하고, 닭장을 만들어주니 경험치와 기술이 대폭 상승했다.
해준은 자신의 정보창을 확인했다.
*
[차해준] Lv.2나이 : 25세
칭호 : 차원을 넘어온
직업 : 초보 농사꾼
경험치 : 19(95%)
체력 : 2/15
기술 : 14
명성 : 0
*
워낙 많은 일을 했더니 체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
그래도 일을 조금만 더 하면 레벨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장작이라도 팰까?”
체력을 모두 소진하고 돌아가기 위해 도끼를 들고 커다란 나무 앞에 섰다.
탁- 파악- 파악-!
묵직한 도끼가 나무 옆구리에 박혔다.
현실에서라면 전기톱으로 베야 할 나무가 몇 번의 도끼질에 손쉽게 쓰러졌다.
쿵-
여기서라도 로망인 불멍을 실현하기 위해 태우기 좋은 크기의 장작으로 팼다.
한 시간 가량 묵묵히 도끼질했더니 제법 많은 양의 땔감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레벨 업.
쿠르릉-
지면에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동시에 해준이 서 있던 곳의 안개가 걷혔다.
종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울타리 주변의 안개가 전체적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한 구역의 안개가 썰물 빠지듯 사라져버린 것. 그러더니 그 안에서 폐허가 된 작은 오두막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뭐지?”
해준은 그곳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벽과 지붕에 구멍이 뚫린 오두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쪽 벽에 오래된 화덕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옆으로 조리대와 선반이 있었다.
“요리하는 곳인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화덕을 보아하니 음식을 만들던 곳인 것 같았다.
확인해보니 외관은 다 허물어졌지만, 안에 있는 도구와 화덕은 아직 쓸만해 보였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본 해준은 밖으로 나와 건물 주변을 살폈다. 박물관이나 사진에서 봤었던 오래된 원통 모양의 탈곡기가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손수레가 보였다.
“이런 게 여기 있었네. 둘 다 쓸만해 보여.”
밀을 재배해도 알곡을 수확하는 게 문제였는데, 탈곡기가 생겼으니 해결된 셈. 거기에 군데군데 쌓여있는 거름 더미를 적당한 장소에 모을 수 있었으니, 손수레의 발견도 꽤 행운이었다.
“이거라면 거름을 한곳에 모을 수 있겠어.”
지금 당장이야 상관없지만, 내일 이곳에 돌아왔을 때 거름이 완성되기라도 한다면 농장 전체에 꾸릿한 냄새가 진동할 게 뻔했다.
해준은 손수레를 끌고 와 울타리 밖 곳곳에 쌓아 놓은 거름을 창고 근처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차곡차곡 쌓았다. 금세 창고 높이만큼 커다란 봉우리가 생겼다.
거름 옮기는 작업을 마지막으로 체력을 모두 소진해버렸다.
“휴··· 오늘은 끝. 새로 발견한 오두막은 내일 제대로 살펴보자.”
해준은 포테에게 인사하려 했으나 보이지 않아, 그대로 현실 세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