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91
90화. 썬플라워 2호점(3)
***
농장이 순식간에 아름답게 변했다.
벚나무와 목련이 크게 자라 시원한 나무 그늘을 만들었고, 칙칙했던 울타리가 빨갛고 노랗게 변했다.
“농장에 꽃이 피니까 엄청 예쁘다. 흐음~ 향기도 좋고. 그렇지 해준아.”
“그러게. 풍경이 확 달라졌네.”
초록 일색이던 농장의 색채가 다채로워졌다.
“어? 벌이다.”
꽃이 피어나니 어디선가 벌이 날아왔다.
열심히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녀석들.
“신기하다.”
클로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꽃 앞에 쭈그리고 앉아 꿀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꿀벌은 열심히 꽃에서 꿀을 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해준은 문득 양봉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마침 시드르 꿀도 다 떨어져 가니까.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해준은 그길로 제임스에게 찾아가 그의 도움을 얻어 사각형 벌통을 5개 만들었다.
해가 잘 드는 곳에 벌통을 설치하고, 꿀벌을 유인했다.
“오, 들어간다.”
새로운 집이 마음에 들었는지 꿀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해준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일하는 꿀벌을 바라보았다.
“놀지 말고 열심히 생산해라.”
벌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걸 지켜보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어느새 수확이 가능할 정도로 훌쩍 자란 배추와 무.
해준이 밭을 둘러보며 농작물을 확인했다.
“실하다.”
다 자란 배추는 통통하고 속이 꽉 차 있었으며, 반으로 가르니 노란 잎이 가득했다.
무 역시 표면이 매끈하고, 크고 실하게 자랐다.
해준은 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고 잘라 맛을 봤다.
아삭-
씹는 순간 시원한 채즙이 입안 가득 흘러들어왔다.
“달다. 김치 담그면 맛있겠어.”
이제 제대로 된 김치를 담글 수 있게 됐기에 해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확의 기쁨을 맞이했다.
***
“어휴~ 김치는 인기가 별로네.”
가오픈 이틀째.
음식을 퍼가는 사람들을 보며 혜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음식들은 모두 인기가 많은데, 유독 자신이 직접 담근 김치만 잘 팔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많이 퍼가는데, 결국 식판 위에서 젓가락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모두 잔반으로 버려졌다.
“대충 만든 것도 아닌데, 왜 김치만 인기가 없지? 어디···.”
혜자는 고무장갑을 벗고, 김치를 한 조각 시식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간도 딱 맞고, 젓갈도 듬뿍 들어가 감칠맛이 풍부했다.
“괜찮은데···.”
“언니. 언니 김치만 안 팔려 서운해요?”
“언니가 무친 나물이랑 다른 반찬은 잘 먹는데, 뭘 그런 거로 서운해해요.”
보글보글 끓는 큰 솥단지를 양쪽에서 들고 홀로 향하는 미숙과 은실이 혜자를 보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준의 레시피로 만든 닭볶음탕은 벌써 세 번째 리필되는 중이었다.
다른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건 사장 레시피로 만든 거잖아.”
개인 사정상 최근 몇 달간 일을 쉬었지만, 나름 잘나간다는 식당 찬모를 하면서 손맛 좋다는 소리를 제법 들은 그녀였다.
그런데 자기가 만든 회심의 김치가 인기가 없으니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달까.
“얘, 은실아. 넌 왜 김치만 안 팔리는 거 같아?”
“음··· 다른 게 더 맛있으니까? 김치가 맛없는 건 아닌데, 사장님이 만든 다른 요리가 더 맛있어. 젊은 양반이 어찌 그렇게 손맛이 좋은지. 웬만한 사람은 명함도 못 내밀겠더라니까.”
단순히 다른 음식이 월등히 더 맛있으니 그저 젓가락이 안 가는 것뿐이다.
의기소침한 강혜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혜자 이모님 솜씨가 나쁜 게 아니라 배추가 좀 별로네요. 양념은 간도 적당하고 감칠맛이 있는데, 배추 자체가 질기고 식감도 썩 좋지는 않아요.”
대화를 듣고 있던 해준이 시무룩 해하는 강혜자를 위로했다.
그녀의 솜씨는 훌륭했다. 다만, 다른 재료에 비해 배추만 현실의 재료를 쓰다 보니 맛의 불균형이 심하달까.
유독 배추의 나쁜 식감이 도드라졌기에 사람들은 김치가 맛없다고 느낀 것이다.
“그치? 그래서 그런 거지?”
“네. 이따 오전 장사 끝나고, 배추랑 무 가져올 테니까 다시 담그죠.”
“차 사장. 미안해요.”
괜히 비싼 재료만 못쓰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해진 혜자였다.
그러나 차해준의 입장에선 오히려 다행이었다.
배추와 무를 수확하고 나니 도저히 혼자 김치를 담글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준은 JH 직원에게 오늘은 점심 장사까지만 한다고 고지하고, 썬플라워로 향했다.
농장에서 미리 가져다 놓은 김장 재료를 픽업트럭에 가득 싣고 망원동으로 돌아왔다.
“뭐가 이렇게 많아?”
트럭에 가득 쌓인 김장 재료를 본 혜자가 놀라 물었다.
해준도 이번에 알았다.
김장은 재료 준비만 해도 꽤 복잡하다는 걸.
덕분에 농장에서 꼬박 사흘을 재료 준비하는데 보내야 했다.
없는 농작물은 포테에게 포인트로 구매해 키웠고, 젓갈은 직접 바다에 들어가 잡은 걸 얼음 동굴에서 숙성했다.
“어머나~ 배추 좋다.”
“실하네. 이렇게 좋은 건 어디서 구했대?”
통통하고, 짤막한 게 김치 담그기 딱 좋은 크기의 배추다.
겉잎은 진한 녹색이고, 속은 노란 잎으로 꽉꽉 차 있다.
“어제 그 시장 놈팽이가 가져온 거랑 차원이 다르네.”
혜자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내가 이번엔 실력 발휘 제대로 해볼게.”
어제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배추는 무엇보다 절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
배추 1포기 기준으로 소금과 물을 1대5 비율로 섞은 소금물에 담가 절인다.
대략 6시간 정도 절여야 하니 이 과정은 미리 해놓는 게 좋다.
“배추는 다 절였으니까 김칫소부터 만들자고.”
김칫소를 만드는 방법은 지역별로도 다르고, 각 가정마다 엄마들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다.
강원도는 명태를 넣어 시원하고 개운한 맛을 내는 게 특징이고, 경기도는 젓갈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 깔끔한 맛을 낸다. 전라도는 젓갈과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경상도는 맵게 담근다.
재료를 준비하는 걸 보니 강혜자의 고향은 충청도와 전라도 사이 그 어디쯤인 것 같았다.
“미숙아. 넌 무채 썰고, 은실이 넌 갓이랑 쪽파 다듬어서 듬성듬성 썰어.”
“예, 언니.”
명예 회복할 기회를 달라던 혜자는 능숙하게 김장을 리드했다.
차해준도 이번엔 한걸음 물러서 혜자의 지휘를 받았다.
혜자는 건고추를 곱게 갈아 멸치액젓, 토하젓, 새우젓과 갖은양념을 넣고, 찹쌀풀을 넣어 버무렸다.
한식 연구를 하며 틈틈이 담가놓은 젓갈들이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사장님 간 좀 봐줘요.”
혜자가 새빨간 양념을 해준의 입에 넣어줬다.
매콤하고, 간간하니 밥이랑 먹으면 간이 딱 적당할 것 같았다.
“좋습니다. 맛있어요.”
소가 완성됐으니 이제 배추에 양념을 묻힐 차례.
혜자는 잘 절인 배추에 시범 삼아 양념을 발랐다.
“속을 버무릴 때는 배추 이파리에만 바르지 말고, 안쪽에 잘 발라줘요. 이렇게.”
“언니. 우리도 알아요.”
“그래. 나도 열 살 때부터 도왔으니까 김장 경력 35년이유.”
“호호호. 그런가? 그럼 빨리 묻혀.”
혜자, 미숙, 은실이 빠른 속도로 양념을 묻혔다.
김장은 처음인 해준도 이모들의 손놀림을 보고 따라 했다.
“우리 사장 김치는 못 담그는데, 요리 잘하는 거 보면 신기해.”
“근데, 사장님은 어디서 요리를 배웠어요? 막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그런대서 유학하고 오던데. 거, 이름이 뭐더라? 꼬··· 꼬로··· 꼬···.”
“르 꼬르동 블루요?”
“응. 그래. 꼬르동 거시기. 거기서 배웠어?”
“아뇨. 그냥 너튜브보고요.”
“에이, 우리 사장님 농담이 심하시다. 너튜브라니. 그거 보고 요리사 되면 개나 소나 다 요리사 하지.”
‘진짠데···.’
조금 억울했지만, 해준이라도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아줌마들의 수다는 김장 내내 계속됐다.
화제는 거의 드라마 얘기.
“참, 근데 사장님. 이서준이랑 친해요?”
은실이 물었다.
“같이 예능 프로그램 찍드만.”
“배우 서준이형이요? 네. 친해요.”
“어머, 진짜? 그럼 나 사인 좀 한 장 받아다 줘요. 내가 드라마 보고 팬 됐잖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생겼어?”
“난 어제 이서준 나오는 드라마보다가 남편 퇴근했는데, 무슨 오징어가 들어오는 줄 알았잖아. 어떻게 그렇게 생겼는지.”
“호호. 아이고, 미숙이 너 말도 참 잘한다.”
김미숙의 너스레에 모두 자지러졌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만들다 보니 그 많던 배추가 거의 사라졌다.
“출출하시죠? 고기 좀 삶을게요.”
“고기? 좋지.”
“마무리 좀 지어주세요.”
“알았으니까 맛있게 삶아주기나 하세요, 사장님.”
주방으로 향한 해준은 커다란 솥에 대파, 양파, 월계수 잎, 통후추를 넣고 물을 끓였다.
팔팔 끓을 때쯤 된장 한 숟가락과 통삼겹살을 통째로 넣고 삶았다.
갓 담근 김치를 가져와 먹기 좋게 썰고, 그 옆에 신선한 굴과 뜨끈한 수육을 담아 막걸리와 함께 가져갔다.
“다 했으면 드시죠.”
“아이고, 푸짐하다.”
“맛있겠어. 아주 잘 삶았다.
“암튼 우리 사장님 솜씨는 끝내준다니까.”
“하하. 칭찬은 드시고 하세요. 고생하신 혜자 이모부터 한잔 받으세요.”
해준이 오늘 가장 고생한 강혜자의 잔에 막걸리를 가득 따랐다.
건배를 하고, 술을 나눠마셨다.
첫 안주는 당연히 김치.
아삭-
“으음~ 맛있다.”
“어쩜 이렇게 맛있어? 언니, 솜씨 죽이네.”
“그치? 끝내주지? 사장님도 하나 먹어봐요.”
혜자가 손가락으로 김치를 쭉 찢어 입에 밀어 넣었다.
매콤하면서 아삭하고 개운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뜨끈한 밥 한 공기가 떠오르는 맛이랄까?
“익으면 더 맛있겠어요. 내일은 이 김치가 가장 먼저 동날 거 같은데요?”
“호호. 고마워요.”
혜자, 미숙, 은실이 수다를 떨며 수육 보쌈을 먹었다.
해준도 이번에는 절이지 않은 노란 배추에 수육과 굴을 올리고, 남은 김칫소를 듬뿍 올렸다.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 정성껏 싼 쌈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입술 사이로 빨간 물이 주르륵 흘러냈다.
우걱우걱-
‘환상적이다.’
그동안 먹었던 그 어떤 음식보다도 황홀한 맛이었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금세 막걸리 4통과 수육이 싹 동나버렸다.
“아이고, 배부르다.”
“나 취했어. 우리 서방한테 혼나겠네.”
“언니. 또 알아요? 취한 김에 오징어 서방이 이서준으로 보일지.”
“미숙이 오늘 막둥이 보나? 호호호.”
“아으~ 언니!”
“뭐 어때? 늦둥이 보면 좋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아줌마들의 수다는 재밌다가도 때로는 정신없으면서 난감하다.
한참을 취해서 수다를 떠들던 이모들이 돌아갔다.
가게 문을 잠근 해준은 한쪽에 쌓아둔 김치통을 모조리 열었다.
막 발효가 시작된 김치는 톡톡 유산균 기포가 올라왔다.
‘안 늦었겠지?’
품에 숨겨두었던 마법 재료를 김치에 솔솔 뿌렸다.
재생 풀과 독성 중화 열매, 생명 뿌리를 혼합해 말린 가루다.
가루를 어떤 음식이든 섞으면 랜덤으로 특별한 효과가 튀어나온다.
[특별한 배추김치] – 마법 가루의 효과로 함유된 나트륨이 1/10 수준으로 하락한다. 단, 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됐다.”
해준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김치 뚜껑을 닫았다.
시간은 어느새 밤 12시.
‘술도 깰 겸 다리만 걸어서 건널까?’
해준은 가게에서 나와 양화대교를 향해 걸었다.
선선한 밤공기에 정신이 맑아졌다.
이따금 옆을 스쳐 지나는 자동차 외에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분 좋게 한참을 걷고 있을 때.
‘저거 뭐지··· 사람인가?’
깊은 밤 다리 위에 흐릿한 실루엣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