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zard’s Restaurant RAW novel - Chapter (213)
# 213
Chapter.41 망각
“…….”
루린이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입이 삐주욱 나와 있다. 삐져도 한참 삐진 상태다. 예상은 했지만 현실이 되니 공포스럽다.
“루린.”
“…….”
“그보다 있잖아. 하루가 아니라 정말로 기억을 잃은 거면 어쩌려고 했어?”
어쩌나 싶어서 급하게 내뱉은 질문은 내가 생각해도 최악이었다.
“……그런 거 생각하기도 싫다. 나는… 나를 잊은 그대 같은 거… 그러니까 화난 거다! 말 시키지 마라!”
그러니 당연히 통할 리가 없다.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지 않은 채, 물론 허벅지를 깔고 앉은 상태지만.
루린은 여전히 부우웅을 시전하면서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럼 너가 기억을 잃는다면 어떨까 같아?”
“나 말이냐? 내가 그대를 잊는다고?”
“응.”
“그런 일은 없다! 천지가 개벽해도 그대를 잊는 일 같은 거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에 대한 기억은 그저 뇌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항상 말했듯이 나의 DNA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내 피에도 새겨져 있고, 내 심장에도, 내 내장에도, 그리고 그대가 안아주던 이 피부에도 새겨져 있으니까 절대로 잊을 수는 없다. 절대로.”
“아. 그래?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아까처럼 너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결국 같은 생활을 하겠지.”
“……정말이냐?”
“응.”
루린이 살짝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전부는 아니고 3분의 1정도만.
“그리고 그렇게 새겨져 있는데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면, 나는 네가 나를 다시 좋아하게 만들 거니까.”
“나는 그렇게 쉬운 드래곤이 아니다.”
아까처럼 다시 삐짐을 내뿜는 루린.
“그렇겠지. 니 맘을 여는데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네 어머니의 레어에서 지내온 날들만 떠올려도 말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들어도 나는 네 맘을 열건데? 백 년이 걸린다고 해도 천 년이 걸린다고 절대로 마음을 열게 만들 거야. 기억을 잃으면 다시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서 다시 추억을 쌓아서, 기억을 찾았을 때 면 처음 좋아했던 기억과, 다시 한 번 좋아하게 된 기억, 두 배의 좋아함과, 두 배의 추억이 생기도록….”
“…….”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린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곤 우물쭈물거리더니 삐죽 나온 입을 조금 풀고는 말했다.
“그, 그게 모냐…! 하지만 조, 조금 해보고 싶어졌다.”
“뭐?”
“나 기억을 잃었다! 그대가 누군지 모른다!”
“뭐 임마?”
“누구냐. 그대.”
“아니, 이미 그대라고 하는 시점에서 아웃인 거 같은데.”
“그대는 그대다! 왜 아웃이냐.”
“뭘 그렇게 천진난만한 얼굴이야? 니가 처음 날 부른 호칭은 네놈이었다고. 인간놈도 있었지.”
“……나는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 그대. 아니 인간놈!”
“어쭈. 이래도?”
“꺄아르아으악. 꺄하하하하! 그거 하지마라! 간지럽다!”
어이가 없어서 옆구리를 간지럽혔더니 마구 웃기 시작했다.
“기억 안 난다. 누구냐! 네놈네놈. 에잇! 네놈! 그러니까 간지럽히지 말고! 으으으읍?”
그래서 웃는 루린의 입술에 키스했다.
루린은 막 발버둥을 쳤으나 곧 얌전해졌다. 얌전하게 내 키스를 받아주곤, 혀를 엉켜왔다.
내가 꼬옥 껴안자, 제 쪽에서 더 거세게 나를 껴안는다.
“흐, 흐냐… 이, 이게 모냐… 네놈! 기억을 잃었는데 바로 키스부터 하다니… 그런 건 바로…! 즉살이다아!”
“그런데 왜 얼굴하고 귀하고 다 빨개졌어?”
“히히히. 모르겠다. 그러니까 죽어라!”
“뭘 죽어 죽기는…!”
“꺄하하하! 그러니까 간지럽히지 말라고 했다앙! 꺄아. 꺄하하하! 싫다아… 으으…!”
급기야 나를 밀쳤고 곧 우리는 밤중에 미친 듯이 웃으면서 잔디밭을 굴러다녀야 했다.
***
이틀 후.
그레이크 영주성으로 사람이 찾아왔다. 시에나의 기억에 그다지 차도가 없는 상황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그레이크는 외부인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으나.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
그레이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방문자를 맞이했다.
“각하, 제 주인님의 요청을 가져왔습니다.”
“요청이라니? 평소 교류도 없는 두 가문에 무슨 요청이 있단 말인가.”
“그건, 아마 잘 알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만.”
살짝 속을 긁는 말투에 그레이크는 화가 솟구쳤다.
‘잘 알고 있긴 개뿔이!’
마음 같아서는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고 싶었으나 그건 불가능하니 속으로만 삭일 뿐.
게린 남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남자는 바로 시에나가 이동했던 백작가에서 찾아온 인물이다. 그러니 공손해도 화가 치솟을 판에 저렇게 뼈있는 말을 남기니 화가 안 나고 배길 수가 있나.
“각하께서 진료소를 통해 보호한 그 아이는 엄연히 루티안 백작가의 일원입니다. 그러니 인도해 주십사 요청하옵니다.”
“그건 틀린 말이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대대로 그레이크 백작가에서 일 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건 과거의 일이지 않습니까. 각하! 사용인들의 교환은 어디까지나 폐하의 윤허 아래에서 이뤄진 일입니다.”
크윽.
데드란 백작.
정말로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위인. 베르나의 아버지이기는 했지만, 그레이크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레이크에게는 증오의 대상 그 자체.
그레이크는 머릿속에서 평화를 외치면서 게린 남작을 응시했다.
“하지만 시에나의 생사를 물었을 때, 그쪽에선 분명히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 죽었다는 사람이 대체 어찌하여 살아있지? 죽은 사람을 돌려보낼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레이크가 그들의 허점을 집어내 꼬았으나 이미 예상한 답변인 듯 게린 남작은 곧바로 입을 열어 또박또박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건 뭔가 착오가 있었습니다. 잘못된 답변을 한 관계자를 처벌할 예정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사죄드립니다.”
쾅-!
어이가 없는 작태에 그레이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의자를 내리쳤다.
그렇게나 간절하게 시에나에 관해서 물었을 땐, 병 때문에 죽었다는 한마디로 퉁치더니. 뭐, 착오?
사과를 해?
너무나도 웃기는 작태에 그레이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시에나를 돌려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인데다가, 데드란 백작에게 완전히 눌려 있었고, 심지어 시에나가 그레이크 모르게 떠났기 때문에 보낼 수밖에 없었을 뿐.
베르나도 외면하고, 아버지는 쓰러지고, 엘도 없었던 그 암울했던 시기에 자신을 지탱해준 것이 시에나였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이 지키고 싶다.
그레이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게린 남작의 요청은 어림도 없는 소리.
그녀는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것뿐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다르겠지만. 그것은 기억을 찾고 나서의 이야기.
그레이크는 그 마음을 담아 게린 남작을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어쨌든 그녀는 지금 사소한 병을 앓고 있으니, 낫기 전에는 내어줄 수 없다는 것이 내 뜻이네. 그러니 루티안 백작에게 그렇게 전해주겠어?”
“각하, 그게 무슨 뜻이옵니까? 지금 제국의 법을 어기시겠다는 겁니까?”
“뭣이?”
“병이 들었어도 루티안 백작가의 일원인 이상 루티안 백작가에서 치료합니다. 남의 집안사람을 각하께서 구류하고 있는 것은 납치나 다름없사옵니다. 그렇게 나오시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옵니다.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납치라니! 지금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니 인도적인 차원에서 기다려 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루티안 백작께서는 기다릴 수 없으니 바로 내어달라고 하고 계신 겁니다.”
“내어줄 수 없네. 내 뜻은 바뀌지 않아.”
“…각하.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나온다면, 제국법에 의해서 처리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레이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라는 표현이었다.
“여봐라!”
그레이크가 기사들을 부르자 게린 남작이 한숨을 쉬면서 한마디를 남기곤 제 발로 걸어 나갔다.
“각하, 다시 말씀드리지만, 루티안 백작가의 일에 다른 가문이 관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후회하실 겁니다.”
마지막에 남긴 말은 그레이크를 더욱 열 받게 만들 뿐.
그레이크는 탁자를 쾅 내리치곤 씩씩거리며 일어나 게린 남작이 나간 자리에 욕을 퍼부었다.
“각하. 하지만….”
그걸 보고 있던 베렌다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저들이 말했듯 제국의 법으로 따지자면 송환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죽었다고 할 때는 언제고, 뭔가 속사정이 있다고 생각해. 시에나가 그레이크시에서 정신을 잃었던 것도 어찌 보면 루티안 백작가에서 도망치다가 그런 걸 수도 있는 일이고. 그걸 알아낼 때 까지는 끝까지 버틸 것이야.”
분명히 루티안 백작은 공작에게 가서 이 일을 호소할 것이고 자신은 공격을 받겠지.
그레이크는 그렇게 생각하곤 주먹을 쥐었다.
자신에게 정치력은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작들을 회유할 수 있는 힘이다.
그들을 흔들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어차피 언제까지고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할 수도 없는 일.
소속을 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물론 어느 공작도 주인으로 섬길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 그건 최악의 경우.
지금 해야 할 것은 그저 그 조건을 내걸고 공작을 흔들어 자신의 편을 들게 한 후, 말을 바꾼다. 그것이 정치인의 특기가 아닌가.
그레이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
“오셨어요?”
“좀 괜찮아?”
그레이크가 시에나에게 물어다. 시에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 상태도 좋아요.”
“그래?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불편한 건 전혀 없어요! 오히려 매우 익숙한 느낌이어서 편해요. 영주님 말씀대로 돌아다녀 봤는데 전부 낯익은 느낌이었어요.”
“정말?”
“네. 그리고, 영주님도… 전혀 남 같지가 않고 이상해요.”
“그건 당연하지! 남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거든. 오라버니라고 불렀었으니까!”
그레이크가 눈을 빛내면서 설명했다.
“전 시녀라고 들었어요. 그런 제가 영주님께 오라버니라고 불렀다고요?”
“그건… 기억이 없어서 그렇지! 어릴 때부터 친했으니까….”
“정말요?”
“이거 기억나?”
그레이크는 품속에서 주섬주섬 시에나가 남겨놨던 동판을 꺼냈다. 그리고 시에나의 손을 펴서 올려 주었다.
“이게 뭔데요?”
“네가 떠나기 전에 나한테 남기고 간, 보물 같은 거야.”
“보물이요?”
시에나가 동판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약간 표정을 찡그렸다.
“뭔가 기억나?”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낯이 익어요!”
“그렇구나… 휴, 일단은 편히 쉬고 있을래? 뭐라도 기억나면 바로 말해주고.”
“그럼 뭔가 일이라도 하면서….”
“일은 무슨 일이야? 어차피 예전의 영주성이 아니야. 너를 꾸짖던 하녀장은 없어. 모두 새로운 사람들이니.”
“하지만….”
“게다가 지금은 요양 중인 상황이니까 일을 하는 건 말도 안 되고. 편하게 돌아다녀도 되니까 자유롭게 기억을 떠올려보고 있어. 이따가 다시 들릴게.”
“여, 영주님?”
그레이크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할일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빠져나왔다.
영주님이라는 딱딱한 호칭보다 다시 오라버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