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zard’s Restaurant RAW novel - Chapter (58)
# 58
Chapter.14 사과의 순정
“그런데 최근에는 왜 이리 술을 드세요? 50년이나 이렇게 지내셨다면 이제 와서 새삼 술에 빠져 지내실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최근에 그녀가 매우 기운이 없네. 막무가내로 가게를 접는다고 하지 뭐야. 그러기 시작하면서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고 이유는 말해주지를 않으니 답답하고 우울해서 말이네.”
베넨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사랑을 이루는 것 자체는 초월한 듯 보이면서도 한 사람을 이렇게나 오래 생각할 수 있다니.
지금 베넨씨가 우울한 이유는 사랑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그녀가 가게를 접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때문에 힘을 잃어가는 것이 보기 힘든 것뿐.
숭고하다면 숭고한 사랑이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라니.
또 한명의 숭고한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
끝끝내 이뤄지지 못한 베르나의 일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다 보니 베넨씨까지 베르나처럼 되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지는 감정이 생긴다고 할까. 내가 무슨 중매쟁이도 아닐 진데.
“평소에 사과를 많이 주시니까 오늘은 같이 술이나 마셔드릴게요. 이건 향이 좋은 술인데 맛보세요.”
지금은 위로를 해주는 로맨티스트가 되자. 그래서 나는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고맙네.”
물론 비싼 술이네 뭐네, 그런 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저 50년이나 순정을 바쳐온 이 남자에게 바치는 술이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시장을 보는 길에 레이느씨를 찾았다. 그녀는 이 도시의 마당발이며 각종 소식통이다. 도시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레이느씨를 찾는 게 옳다.
“레이느씨, 저 앞쪽 길에 있는 수선집의 미엘씨란 분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요?”
“예? 미엘님이요?”
“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레이느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도 일단 대답은 해주는 게 레이느씨다.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가끔 바느질을 맡기기는 해요. 친한 편이기는 한데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으음, 그래요?”
“왜 그래요? 엘씨는 바느질을 해줄 사람이 있지 않아요?”
“하하, 제가 바느질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고요.”
왜 여기서 루린이 또 튀어나와.
이들 부부에게는 지난 날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마법사를 은퇴하고 그레이크시에 은거했다고 설명을 하는 바람에 뭐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루린에게 바느질을 맡겼다가는 수선은커녕 옷이 더 찢어져서 걸레짝이 될 게 뻔하다.
어쨌든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미엘씨가 가게를 그만두려하고, 그 이유를 베넨씨에게는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레이느씨는 워낙에 이 주변의 사람들을 많이 알고 계시니까 뭔가 알지 않을까 해서요. 어떤가요?”
그러자 레이느씨는 매우 안쓰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쩐지 최근에 대량의 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 하셨다고 하던데 그런 이유가 있었나요? 으음, 어쩌지…. 이럴까요? 제가 그나마 조금 친한 편이니까 가서 한 번 떠볼게요!”
“정말요? 그래 주면 고맙죠.”
“걱정마세요. 제가 힘써 볼게요. 다만 미엘씨는 전혀 생각이 없는데 베넨씨의 일방적인 사랑이라면 더 깊게 관여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사람 마음이라는 강요할 순 없는 거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죠. 딱히 두 사람을 이어 준다기보다는, 왜 가게를 그만두려고 하는지 그게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알겠어요!”
레이느씨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남편! 가게 좀 보고 있어!”
“뭐야? 나는 이따 오후 당번인데?”
“차례고 뭐고, 갔다 올 데가 있으니 좀 보고 있어. 엘씨의 부탁인데 그럼 거절하니? 은인을 몰라보면 안 되잖아?”
“뭐야? 이놈의 여편네가?”
튀어나오는 크놀씨.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레이느씨가 눈썹을 치켜뜨자 딴청을 부린다. 그럴 줄 알았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왜 내뱉어?
“잘 갔다 오라고. 으하하하! 그래 뭐 엘의 일이라면 할 수 없지.”
괜한 반항을 하다가 밥을 굶을 뻔한 크놀씨를 뒤로하고 나는 레이느씨와 미엘씨 가게 앞에 도착했다.
***
미엘은 어릴 때부터 베넨을 믿고 따랐다. 베넨이 2살 연상이기도 했고, 여러 가지 잘 챙겨주었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가장 힘이 되어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에는 베넨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미엘은 베넨이 언제나 자신을 친동생처럼 생각한다고 느꼈다. 자신을 여자로 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만한 행동을 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손이 맞닿으면 먼저 피하고 도망가는 모습이라든지. 맨날 잔소리하려 드는 모습이라든지.
그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미엘은 자신에게 베넨이 그저 동생으로 비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아버지는 미엘에게 결혼자리를 들고 왔다. 28살이 되던 해.
처음에는 거부하던 그녀였으나 베넨이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다면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승부를 걸어보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가져온 이 결혼자리를 베넨이 막으려 하면, 고백하자. 그런 마음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승부수.
“오라버니, 저 아버지가 결혼을 시키려고 해요. 이달 말에 다른 도시로 떠날 것 같아요.”
그렇게 고한 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엇나가기 시작했다. 베넨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가 거의 포기상태가 돼서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 이웃 도시로 떠나기로 한 바로 전날, 베넨이 찾아왔다.
그는 말했다. 밤에 만나자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미엘은 뛸 듯이 기뻤다. 이것은 아무리 봐도 자신을 잡아주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속장소에 베넨은 없었다. 미엘은 좌절했다.
그 자포자기 마음을 가지고 이웃도시로 떠났으나 생판 모르는 사람과 결혼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대로 파혼하고 몇 년을 떠돌며 제국을 돌아다녔다. 갖가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손재주가 좋았던 그녀는 밥을 굶을 일까지는 없었고, 그렇게 간신히 베넨을 잊었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그레이크시로 돌아왔다.
떠난 지 10년째가 되는 해였다.
***
미엘씨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약간 어려웠으나 레이느씨의 도움 덕분에 대강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베넨씨가 최근 술을 마시다가 건강을 해쳤다는 이야기를 듣자 벌떡 일어난 미엘씨를 보면서 레이느씨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덕분이다.
“그분은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나는….”
“잠깐만요. 제가 알기로는 베넨씨는 약속장소에 나갔는데 미엘씨가 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래, 분명히 어제 베넨씨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 부분이 이상해서 끼어들자 레이느씨와 미엘씨 둘 다 미간을 좁히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럴 리가 없어요….”
이 사람들은 잘못된 약속장소 때문에 20년이 넘게 서로 오해했다는 건가? 원래대로면 벌써 이뤄졌어야 하는 커플이 아닌가.
“요즘 베넨씨가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미엘씨는 왜 그러시는 거죠? 가게를 접으려고 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 혹시 미엘씨도 몸이 안 좋으신지…?”
“그건 개인적인 일이라서, 미안하지만 말해줄 수가 없답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이대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비밀로 해드릴 테니 저희한테 상담을 해보세요. 도울 수 있는 건 도울 테니까요.”
미엘씨는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분에게는 말하지 않아 주실 수 있겠어요?”
“네. 약속할게요.”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미엘씨는 한참을 더 고민했으나 결국에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실은 나이를 먹어가는지라 눈이 갈수록 침침해서 작은 게 잘 안 보인답니다. 그러니 바느질을 할 수가 없어서….”
말을 하면서도 미엘 씨는 계속 우물쭈물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렇게나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을 베넨씨에게 알리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소녀 같은 부끄러움인가.
“그런 이유였습니까? 그건 해결책이 있습니다.”
나는 미엘씨와 레이느씨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
돋보기는 눈이 침침할 때 세심한 작업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피로감이 몰려올 수는 있지만, 소량의 일을 계속 받는 데는 별문제가 없을 테지.
“자네! 들었나? 미엘이 다시 가게를 한다더군! 얼굴도 많이 좋아졌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은 모르겠지만…. 하하하!”
저녁이 되자 쳐들어온 베넨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기 시작했다.
“뭐 건강적인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닐까요? 실은 미엘씨의 가게 주변에 엘레나의 진료소라고 실력 좋은 의원이 있거든요.”
“그게 정말인가? 그녀가 아팠어?”
세상이 무너지는 얼굴을 하는 베넨씨.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큰 병까지는 아니고요.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일단 앉으세요.”
“그러지….”
베넨씨는 가져온 사과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오늘은 가져온 사과가 더 많은 기분이었다.
그러자 꼬물꼬물 드래곤의 손이 사과바구니로 다가간다.
“베넨씨, 그거 아세요? 이거 하나만 알려드릴게요.”
나는 베넨씨의 앞에 위스키를 따라주면서 입을 열었다.
“뭔데 그러는가?”
“미엘씨도 25년 전 그날 약속장소에 나가셨다는데요?”
“뭐라고?”
위스키를 들이키던 베넨씨는 아닌 밤중에 그게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버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네. 나는 아침이 될 때까지 그녀를 기다렸어.”
“글쎄요, 거기에는 뭔가 큰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요. 지금까지 두 분이 외면하고 있던 그날의 진실은, 두 분이 직접 이야기를 해봐야 해결되겠죠.”
“그게 정말인가? 정말 그녀가 왔었다고?”
“일단 제가 아는 건 그것뿐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줬다.
결국은 두 사람이 해결할 문제다. 주위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까지지.
내 말을 들은 베넨씨는 그대로 식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은.
후일담을 말하자면 그 이후 베넨씨는 그렇게 애지중지한다던 과수원 부지를 나에게 팔고 그 돈으로 그레이크시 한복판에 집을 샀다나 뭐래나.
그 덕분에 드래곤은 사과의 산에 치어버렸다.
과수원을 밀려고 해도 지금 자라난 사과는 다 처리해야 되니까. 버리기는 아깝잖아? 물소에게도 먹이고 드래곤에게도 먹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먹이고.
“그대! 이제 이거 지겹다! 왜 밥이 사과냐!”
“사과는 아침밥으로 훌륭한 물건이래.”
“지금은 아침이 아니다!”
“너는 지금 일어났으니까 아침이지 뭐.”
울상을 짓는 드래곤에게 사과를 들이밀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