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ility from Parallel Dimensions RAW novel - Chapter 45
45. 이선화
저쪽 세계에서는 드라마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특수 효과를 쓰지 않는다. 그냥 스킬을 각성한 배우들이 몸으로 때운다.
서정우가 시범을 보인 동작은 분명히 멋지고 화려했다.
그런데 그건 보통 사람은 몸에 와이어를 달아도 따라 하기 어려운 고난도 동작이다.
감독이 정신을 차리고 촬영감독을 돌아보며 작게 물었다.
“찍었어?”
“카메라가 켜져 있어서 찍긴 찍었는데요. 이 화면을 드라마에 쓰시게요?”
“이대로는 다음 주 상영분에는 못 쓰지. 대신에 드라마가 다 끝난 후에 제작 과정 영상을 넣을 때는 쓸 수 있잖아.”
“써도 된다는 허락은 받을 자신 있으시고요?”
“그게 문제야. 저 사람은 진짜 저 재능으로 왜 경찰을 하는 거야? 우리 쪽에서 일해야지.”
“뉴스 보면 범인 잡는 재능도 어마어마하던데요.”
“아. 그렇지.”
촬영이 끝나고 나서, 감독이 활짝 웃으며 서정우에게 인사했다.
“오늘 많이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서정우가 도와준 건 없다. 싸우는 장면을 조언한 것도 배우들이 따라 할 방법이 없어서 결국 못 써먹었다.
“다음에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를 드릴 테니, 그때는 꼭 한 장면 출연해 주십시오.”
“공무원이라서요.”
남자 주인공 강서준도 찾아와서 말했다.
“공무원 그만두시고 우리 쪽으로 오시는 게 돈을 더 많이 버실 것 같은데요.”
“형사가 체질이라서요.”
권경철은 다른 의견을 냈다.
“격투기 쪽으로 진출해도 확실히 뜰 겁니다. 무술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뉴스 보고 알았지만, 힘도 그렇고 움직임도 그렇고. 어우.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네.”
“사람 때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냥 깔끔하게 쏴버리는 걸 더 선호한다.
출연 배우들이 찾아와서 한마디씩 인사하는데 이선화만 다가오지 않았다.
서정우가 이선화를 돌아보았다.
이선화가 그의 얼굴을 째려보다가 고개를 획 돌렸다.
서정우가 피식 웃었다.
‘삐진 척하는 것도 똑같네.’
* * *
경찰서 장면까지 찍은 후에 촬영팀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선화는 그곳에서 한밤중까지 촬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투덜댔다.
“뭐야? 순식간에 다들 친해져서. 언제부터 알았다고.”
그녀가 서운한 건 그게 아니다.
“그러면서 나한테만 차갑잖아.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나쁜 남자 콘셉트야? 뭐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녀가 그녀의 집 현관문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어?”
문 위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어젯밤에 누가 그의 차를 긁어 만든 무늬와 비슷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스토커?’
이 건물은 보안이 확실한 곳이다. 그런데도 침입자가 문짝을 긁어놓았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기 무서워졌다.
그녀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112로 전화를 걸려다가 머뭇거렸다.
그녀는 예전에 스토커를 신고해 경찰에 체포되게 한 적이 있다. 톱스타를 스토킹하다가 체포까지 된 사건이라서 뉴스에도 크게 났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출연 협상이 잘 진행되던 드라마의 배역을 경쟁 배우에게 빼앗겼다.
지금은 그녀가 이미 주연으로 드라마를 찍는 중이라 그때와 상황이 다르지만, 예전 생각이 나니 조금 망설여졌다.
‘또 이런 일로 뉴스에 나고 싶지는 않아. 그냥 매니저를 불러서 조용히 처리할까? 아니야. 그건 위험해.’
얼마 전에 그녀와 가까운 배우가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때 그 배우는 매니저를 시켜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려 했다. 그런데 일이 잘못돼 그 매니저가 스토커의 칼에 찔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매니저에게 조용히 해결해달라고 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 앞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다. 지금은 무서워서 집안에 들어갈 수도 없다.
엘리베이터는 아직 그녀가 있는 층에 멈춰 있었다. 그녀는 얼른 그 앞으로 가 열림 버튼을 다다다다 두드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들어가 이번에는 닫힘 버튼을 열심히 눌렀다. 문이 닫히자마자 1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그녀는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아래층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가슴이 덜컹 흔들렸다.
문이 열리면서 아래층에 사는 여자가 들어왔다.
“어머. 이선화 씨. 어디 가나 봐요?”
아래층에 사는 중년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끔 마주치면 인사는 하는 사이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연기력으로 숨기며 평소처럼 도도하게 말했다.
“잠깐 요 앞에서 누구 좀 만나려고요.”
‘이 여사님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입이 좀 싸.’
이선화는 입이 싼 그녀에게 스토커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1층 로비로 내려온 후에 경비원이 보이는 곳에서 스마트폰을 다시 켰다. 일단 112를 찍었다.
“역시 경찰에 신고하는 수밖에…….”
경찰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서정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맞다!”
아까 감독이 했던 말도 생각났다.
–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형사라더라.
“서정우 형사한테 부탁하면 그 스토커를 조용히 잡을 수 있을까?”
아까 서정우가 범인과 싸우는 장면을 찍을 때 쓰라면서 보여준 고난도 동작이 떠올랐다.
‘진짜 대단했어.’
그녀가 전화번호 화면의 숫자 112를 지웠다.
“내가 부탁하는데 설마 거절은 안 하겠……. 아. 번호를 모르지.”
그녀는 서정우의 전화번호를 모른다.
“무슨 남자가 내 전화번호도 안 물어보냐고. 물어보면 가르쳐는 주려고 했는데.”
그녀가 1층 로비에 서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감독과 서정우가 했던 대화를 기억해냈다.
– 오늘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를 드릴 테니, 그때는 꼭 한 장면 출연해 주십시오.
– 공무원이라서요.
“분명히 전화를 걸겠다고 했어!”
그녀는 즉시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감독님. 저예요.”
– 왜 또! 어느 장면이 마음에 안 드는지 몰라도 다시 찍을 시간은 없으니까 좀 봐주라.
“아까 촬영 이야기가 아니라요, 서정우 형사 전화번호 좀 물어보려고요.”
– 선화 씨가 서 형사 번호는 왜? 어? 설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아는데 그거 아니거든요?”
– 아닌데 남자 번호를 왜 물어?
초조한 이선화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범인 잡는 방법 좀 물어보려고 그러는 거거든요? 번호를 따고 싶었으면 아까 땄죠!”
– 어? 어. 알았어. 문자로 바로 보내줄게.
* * *
서정우는 집 소파에 누워서 ‘나공주 갱생기’를 1화부터 보고 있었다.
“VOD 시스템 만든 사람에게 상 줘야 해. 진짜 편하네.”
한 편당 천 원 정도만 내면 드라마 재방송을 TV로 주문해 바로 볼 수 있다. 공중파 방송은 몇 주가 지나면 공짜로 제공되기도 한다.
서소라는 저녁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와서 제일 먼저 본 건 서정우가 편안하게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는 모습이었다.
“이래야 우리 오빠지. 주말이면 소파에 붙어서 뒹굴뒹굴하는 그 모습. 너무 익숙하다. 오늘은 주말도 아닌데!”
원래 평일에는 서소라가 그 소파를 먼저 차지해서 비켜주지 않았다. 그럴 때면 서정우는 거실 바닥에서 TV를 봤다.
그런데 요즘 그녀는 라디오 방송 스케줄이 거의 매일 잡힌다. 그러다 보니 서정우보다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은 당연히 서정우가 먼저 소파를 차지했다.
서정우가 말했다.
“야. 가방에 과자 있으면 좀 꺼내라.”
“있겠냐! 찬장에 있는 거 먹어!”
“다 먹었지.”
“이 돼지 새끼가!”
“족발이나 시킬까?”
“돈은?”
“옜다. 카드.”
서정우가 지갑을 툭 던졌다.
서소라가 공중에서 지갑을 탁 받았다.
“네이! 소녀가 즉시 주문하겠나이다. 오늘 저녁도 못 먹었는데 잘 됐다.”
서정우가 그때서야 고개를 돌렸다.
“저녁을 왜 못 먹어? 돈 없냐? 방송 출연료는 그 자리에서 일단 절반 딱 잘라서 너희들에게 배분하기로 했는데? 나머지는 나중에 정산하기로 하고.”
서소라가 스마트폰 주소록에서 단골 족발집 번호를 찾으며 말했다.
“방송국에서 출연료를 그 자리에서 봉투에 넣어주는 게 아니더라고. 나중에 회사로 이체해준대. 그리고 오늘은 방송시간이 애매해서 못 먹었지.”
족발을 주문한 후에 서소라가 물었다.
“나공주 갱생기 재미있어?”
“어. 재미있네.”
이쪽 드라마는 액션 위주인 저쪽 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돼서 참신한 맛이 있다.
서소라가 같이 TV를 보며 말했다.
“이선화 연기 정말 쩐다.”
“쟤가 원래 연기력 하나는 최고야.”
“맞아. 저 미모에 저 연기력이면 어떤 곳에서도 최고가 안 될 수가 없어.”
서정우는 그게 아쉬웠다.
‘저쪽 세계에서는 연기력과 미모만으로는 최고가 못 되더라.’
서정우가 물었다.
“오늘 스케줄도 라디오냐?”
“당연하지.”
“TV는 안 나가냐?”
“우리가 합창단도 아니고 서서 노래만 부를 수는 없잖아. 춤이 필요한데 아직 못 만들었어. 우리 사장님이 노래는 잘하는데 춤 쪽은 영 아니라서 도움도 안 되고. 이러다 우리 라디오만 하다가 끝나면 어떻게 하지? 오빠한테 무슨 방법 없어?”
서정우는 저쪽 세계의 가수들이 노래를 부를 때 추는 춤을 생각했다.
‘스킬 각성자가 추는 화려한 춤을 이쪽 세계 사람이 추는 건 불가능하고.’
서소라는 공중에서 세 바퀴나 회전하지도 못하고, 몇 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순간 이동하는 블링크 스킬도 없다.
‘일반인 대상으로 나온 춤 중에서 간단한 걸 찾으면.’
배우는 액션 장면에서 제작비를 줄여줄 스킬이 있어야 주연을 맡을 수 있지만, 가수는 노래만 잘해도 충분히 통한다. 그리고 모든 가수가 각성자인 건 아니다. 스킬이 없는 가수들이 추는 춤도 많다.
“있긴 있는데.”
“진짜?”
“좀 간단한 춤이야. 요즘 걸그룹 안무처럼 화려하지가 않아. 대신에 배우긴 쉬워. 동작이 워낙 단순해서.”
각성자가 아닌 사람이 추는 춤은 이쪽 세계가 훨씬 더 화려하다.
서소라가 살짝 흥분했다.
“우리가 지금 찬 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거든? 일단 그거 이미 공개된 건 아니지?”
“이 지구 어디에서도 이 춤이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지.”
“그런 춤을 만들어뒀으면 말을 했어야지!”
“목소리가 크다?”
서소라가 당장 꼬리를 말았다.
“소녀 잠시 정신줄을 놓았나이다.”
“그럼 뭐, 내일이 휴일이니까 내일 봐줄게.”
“아니야! 오늘 밤에 당장 애들 부를 테니까 당장 봐줘! 우리도 TV에 한 번 나가보자! 그리고 족발 값도 경비 처리하자!”
“그러든가.”
그 말을 하자마자 서정우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서정우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형사가 모르는 번호라고 해서 안 받으면 중요한 전화를 놓칠 수 있다.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서정우 형사님?
그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가 걸었는지 알았다.
저쪽 세계에서 자주 듣는 목소리이고, 지금 보고 있는 드라마에도 나오는 목소리다.
“이선화 씨?”
– 네. 저 선화예요.
옆에 있던 서소라가 화들짝 놀랐다.
“뭐야! 이선화라니! 무슨 이선화? 지금 저 드라마에 나오는 이선화?”
* * *
이선화는 전화에서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뭐야? 유부남이었어? 아니면 여자친구?’
“옆에 누구랑 같이 있나 봐요? 바쁜 시간 방해한 건가요?”
– 얘요? 여동생입니다. 지금 집에서 같이 ‘나공주 갱생기’를 보는 중인데, 이선화 씨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네요.
“아. 그렇구나.”
그녀가 숨을 살짝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요.”
– 드라마 이야기는 아까 거절했는데.
“그게 아니라요.”
그녀가 긴장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지금 좀 와주실 수 있어요?”
* * *
서정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긴장한 목소리?’
“무슨 일이죠?”
– 스토커가 있어요. 현관 앞까지 찾아온 것 같아요.
““지금 집 안에 있으면 문을 잠그고, 집 바깥에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요.”
– 지금은 1층 로비요. 앞에 경비 아저씨들이 보여요. 그런데 저분들에게 무슨 사정인지 말할 수가 없어서……. 죄송해요. 경찰차가 오면 되게 시끄러워질 거예요. 조용히 해결하고 싶어요.
“서정우는 저쪽 세계의 이선화가 생각났다.
‘선화 생각이 나서라도 안 가볼 수가 없네.’
“주소 문자로 보내요. 바로 갈 테니까.”
서정우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서소라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오빠. 방금 이선화하고 통화한 거야? 지금 TV에 나오는 저 이선화?”
“어.”
“오빠가 그런 톱스타를 어떻게 알아?”
“난 잘 몰라. 그래서 저쪽에서 먼저 전화 걸었잖아.”
서정우가 집을 나가자마자, 서소라가 단톡방에 바로 글을 남겼다.
– 대박!
윤나나가 바로 반응했다.
– 왜?
– 우리 오빠가 지금 누구 만나러 갔는지 알아?
– 누구?
– 이선화.
– 배우 이선화?
– 어!
윤나나의 다음 글은 10초가 지난 후에 올라왔다.
– 이선화가 디 오빠를 꼬셨대?
– 꼬시긴 뭘 꼬셔? 우리 오빠가 어딜 감히 이선화에게. 말도 안 되지.
– 만나러 갔다며?
– 우리 오빠가 범인 잡는 실력 하나는 세계 최고잖아. 나도 통화하는 걸 옆에서 들은 게 다라서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라는 걸 보면 형사가 필요한 상황인가 봐. 그래서 연락했겠지.
잠시 후에 방긋 웃는 이모티콘이 하나 올라왔다.
대화가 거기서 끝날 뻔했지만, 뒤늦게 쌍둥이가 등판했다.
– 디 형사님이 연예인하고 연애하나 보다!
– 풍악을 울려라!
윤나나의 글이 즉시 따라붙었다.
– 너희는 잠이나 자!!!
서소라가 글을 추가했다.
– 족발 시켰는데 오빠가 가버렸네? 나나 우리 집에 올래?
서소라와 윤나나는 한동네에 산다.
– 지금 갈게. 무슨 상황인지 자세히 이야기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