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08)
절대회귀-108화(108/424)
제108회 졌으면 하기 싫은 걸 해야죠.
말들에게 풀을 먹게 한 후 우린 언덕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하지만 극악소마의 마음에는 여전히 피바람이 부는 모양이었다.
“섭혼마존은 어떻게 죽였습니까?”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저보고 착한 척 집요하다고 하셨지요? 소마님 집요함도 저 못지않습니다.”
“자랑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공자 나이면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나인데. 내가 섭혼마존 죽였다! 그러니 내 앞에선 그 건방진 눈깔 다 깔아! 유아독존 안 하고 싶습니까?”
“제가 허세가 있긴 합니다만, 없던 일을 내가 한 것처럼 하면서까지는 아닙니다. 맞습니다. 저 강합니다. 이런 의심을 받을 정도로요. 한데 제가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끝까지 잡아뗐다. 극악소마란 사람에게 약점이 될 말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약점을 잡히는 것과 같다. 순간 감정에 휩싸여 말을 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다.
“좋습니다. 그럼 나랑 한판 붙어봅시다.”
결국,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살수들을 상대하는 내 실력을 보면서 나와 싸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을 테니까.
살수들을 죽이면서 그는 피 냄새를 맡은 야수가 되었다. 참고 참았던 욕망이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싫습니다.”
“왜 싫습니까?”
“강적을 앞두고 우리끼리 싸우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니까요.”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싸우면 되잖습니까?”
“싸우다 보면 흥분하기 마련이죠.”
“흥분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흥분할 겁니다. 만약 소마님이 보신 것처럼 제가 섭혼마존을 죽일 정도의 실력이라면, 흥분한 저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더 싸우고 싶군요.”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용암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대형 사고를 치지 않게 하려면 저 용암을 오늘 조금은 흘러내리게 해야 한다.
“합시다!”
“싫습니다.”
“오늘 많은 살수가 죽었습니다. 한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 공격하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기 싫은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뭡니까?”
“전 이겨도 손해, 져도 손해니까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내가 이기면 날 죽이고 싶어질 겁니다. 내가 지면 나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질 것이고요.”
“내가 이공자에게 흥미를 느껴서 뭐가 좋습니까?”
“제 목적이야 하나지요. 소마님이 제 편이 되어 주시면 후계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될 겁니다. 나머지 마존들은 다 적으로 삼아도 상관없죠.”
극악소마는 코웃음을 쳤다.
“말은 그래 놓고 다음에는 다른 마존을 끌어들이려 하겠지요?”
“표납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뻔하죠.”
그에게는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공자와 같은 배를 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알잖습니까? 이공자가 꿈꾸는 마도는 제 마도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내게 잘 보일 필요 없습니다. 이공자의 그 아부신공도 심력 낭비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왜죠?”
“그래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극악소마가 웃었다. 그의 마음에 딱 맞는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아주 좋은 이유입니다. 만약 내가 좋다거나, 존경해서라거나, 이런 헛소리를 했다면 역효과가 났을 겁니다.”
극악소마가 딱 이런 정도, 딱 여기까지만인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의 옷에 불과하다. 그가 신는 신발이고, 그가 쓰고 있는 저 가면이다. 그의 본질은 이다음부터다.
“그러니까 붙읍시다. 어차피 우린 친해질 일이 영원히 없는 사이입니다.”
그가 세상이라고 보여준 곳들은 진짜 그의 세상이 아니다.
나는 진짜 극악소마의 세상을 안다.
눈깔이 돌아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그 광기가 터져 나오는 그 순간, 그곳이 바로 진짜 그의 세상이다. 오직 그 순간에만 그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지금은 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그가 생각지 못한 부분을 밀어붙이는 나의 특별함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다.
원래 그는 한판 붙자고 조르는 사람이 아니다. 죽이려고 덤벼들어서 싸워버리는 사람이지. 자신이 너무 참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서는 안 된다.
“좋습니다, 붙읍시다.”
“!”
내 말에 극악소마는 깜짝 놀랐다. 내가 정말 붙자고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좋습니다! 당장 붙읍시다!”
극악소마가 크게 웃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소마님.”
“왜 그러십니까?”
“저기 저 끝에 나무 보입니까?”
“보입니다.”
“우선 경공으로 붙읍시다.”
극악소마의 눈빛에 실망감이 스치기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제게 경공을 이기면 비무를 붙겠습니다.”
“좋습니다.”
극악소마의 눈빛에 가소로운 기색이 스쳤다. 경공에 자신이 있는 그였기에 당연히 이길 자신이 있는 것이다.
“만약 제가 이기면 부탁 하나 들어주십시오.”
“뭐든 말씀만 하세요.”
“오늘 저녁에 나와 술 한잔합시다. 가면 안 벗어도 됩니다. 이렇게 살짝 들어서 마시면 되죠.”
나는 가면을 들어서 술 마시는 시늉을 보였다.
“이공자.”
“네.”
“살짝 들어서 마시라고요? 이공자야말로 살짝 미친놈입니다. 이렇게 집요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나는 미친놈처럼 웃었다. 미친놈을 상대하는데 내가 선택한 방식이다. 그는 집요함이라고 하지만, 이건 우직함이다.
두드리고, 두드리고, 같은 자리를 또 두드리는 거다. 내가 두드리는 자리에 그의 가면이 있다.
“좋습니다. 내가 지면 술 마십니다.”
“그럼 해볼까요?”
우린 어깨를 나란히 섰다. 경공 시합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극악소마가 내게 물었다.
“경공 시합을 해본 적 있습니까?”
“네. 딱 한 번 있었습니다.”
“누구랑 해봤습니까?”
당신과.
“있습니다. 옛날 친구.”
“이공자는 젊은데 옛날 친구도 있습니까?”
“나쁜 놈 하나 있습니다.”
“제가 봤으면 좋아했겠군요.”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너무 닮아서 싫어했을 수도 있고요.”
나의 뜻 모를 웃음에 극악소마는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제가 먼저 달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갑니다!”
내가 먼저 달려 나가자 느긋하게 극악소마가 뒤따라 달려왔다.
극악소마는 순식간에 나를 따라잡았다. 그는 놀리듯 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저 앞으로 달려 나가던 그가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경공 시합을 하자고 한 겁니까?”
“아직 안 끝났습니다.”
반환점으로 정한 나무를 돌 때까지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물론, 극악소마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내가 질 시합을 붙자고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내게 질 것 같진 않은 모양이다.
도착지점을 얼마 남기지 않고 극악소마는 마지막 여유를 부렸다.
“이공자도 약점이 있었군요. 이제 좀 인간으로 보입니다.”
“이전에는 뭐로 보였습니까?”
“괴물이죠. 새파랗게 젊어서 자꾸 방심하게 만드는데 알고 보면 괴물인 거죠.”
“이렇게요?”
무슨 말인가 싶어 그가 고개를 돌리는 바로 그 순간.
쉬이이이이익.
난 갑자기 속도를 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극악소마를 따라잡았다. 지금껏 숨겨둔 풍신사보의 쾌속보를 발휘한 것이다.
극한의 내공으로 발휘되는 나의 쾌속보는 말 그대로 쾌속이었다.
뒤늦게 극악소마가 내공을 끌어올려 나를 뒤쫓았지만, 거리는 더 벌어졌다.
“거기 서!”
피이잉!
극악소마가 뒤에서 혈앙지를 쏘았다. 경고용으로 쏜 것이었기에 내 옆을 지나갔다.
내가 거의 도착지점에 다다르자 극악소마가 마극광폭장을 발출했다. 승부에 미쳐서 내 머리를 스치게 날렸지만, 그래도 차마 날 맞추지는 못했다.
내 앞쪽 나무가 박살 나며 쓰러졌다. 내 승리를 축하하듯 나뭇잎이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뒤늦게 도착한 극악소마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출수할 기세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루에 두 번이나 질 겁니까?”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기에 효과가 있었다.
극악소마가 악인이기는 해도 소인배는 아니었다.
대신 화풀이를 하늘에 했다. 짜증이 한가득 실린 마극광폭장이 연이어 허공으로 발출되었다. 마른하늘에 천둥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나는 그가 화를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치미는 화를 한바탕 해소한 후 극악소마가 내게 물었다.
“그 경공 대체 뭡니까?”
“비장의 한 수로 숨겨둔 경공입니다.”
“그러니까 뭐냐고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장의 한 수니까요.”
그는 승패에 불복했다.
“다시 붙읍시다. 그 경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 것도 진 것이지만 방심해서 졌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다음에요.”
나는 훌쩍 말에 올라 먼저 출발했다.
뒤에서 다시 한번 한바탕 살기가 휘몰아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또각또각.
극악소마가 조금 떨어져서 나를 뒤따랐다.
뒤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내가 원한 뜨거움이다. 극악소마의 용암이 내 쪽으로 흘러넘치고 있었으니까.
그래, 당신의 광기. 그렇게라도 좀 덜어내라.
그날 밤.
극악소마와 나는 야영을 했다. 워낙 천천히 이동했기에 다음 마을까지는 아직 한참 더 남았다.
모닥불 너머에서 극악소마는 사냥해온 짐승을 손질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낮부터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모닥불이 좋은 점은 그 어떤 침묵도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나는 손질한 고기를 구워 그에게 주었다.
“마차에 들어가서 드시고 오십시오.”
그러자 극악소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왜 술 마시자는 말을 하지 않는 겁니까? 어차피 말해봤자 내가 약속도 지키지 않는 쓰레기라서?”
그의 가시 돋친 말에 나는 차분히 대했다.
“할 겁니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순간 극악소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해야죠. 그렇게 열심히 달려서 이겼는데.”
“그럼 왜 안 합니까?”
“식사부터 하고 마시려고 그럽니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시는 것 같지 않아서요. 반주 싫잖아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걸 알면서 왜 술을 마시자고 했습니까?”
“벌칙이니까요. 시합에 졌으면 하기 싫은 걸 해야죠.”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극악소마는 내가 건넨 고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가면을 살짝 들더니 먹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이렇게 쉽게 가면을 들고 내 앞에서 음식을 먹을 줄은 몰랐다. 자존심을 좀 건드려야 먹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의 이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은 내가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다.
“싱겁습니다.”
“소금 여기 있습니다.”
내가 손을 뻗자 펼쳐진 가죽에 놓여 있던 소금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모습에 극악소마가 눈을 번쩍 떴다. 어떤 하나의 물건보다 소금과 같은 수많은 알갱이를 허공섭물로 올리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촤르르르륵.
허공을 날아간 소금이 그의 고기에 뿌려졌다.
나를 쳐다보는 극악소마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나와 싸우고 싶은 열망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 싱겁습니다.”
“먹어보지도 않고요?”
내 절기를 더 보고 싶어 하는 그에게 난 웃으며 말했다.
“싱겁게 먹어야 장수한답니다. 마의가 하신 말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이공자 당신은 참…….”
극악소마는 뭐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하려던 말이 뭐였을까? 미친놈이었을까? 사람을 짜증 나게 한다였을까? 아니면…….
극악소마가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나도 먹기 시작했다.
허기가 좀 채워졌다 싶었을 때, 술을 가져왔다. 야영을 자주 했기에 우리 짐에는 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극악소마는 이번에도 가면을 살짝 들고는 술을 마셨다. 싫어한다고 하더니 잘만 마셨다.
“시원하게 가면을 벗는 것도 아니고. 참 없어 보이지요?”
“있어 보이진 않죠.”
“드디어 솔직하게 말하는군요.”
“그래서 좋습니다. 너무 있어 보이려는 사람하고 있는 것 불편하거든요. 우리 형 보면 알 수 있죠.”
극악소마는 갑자기 들고 있던 고기 뼈다귀로 바닥에 선을 쭉 그었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그었던 곳에 세로줄을 그었다.
“나는 지금 어디쯤입니까? 여기까지 와야 살려준다고 했었는데, 여기까지 왔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