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16)
절대회귀-116화(116/424)
제116회 왜 속삭이는 거야?
쇠망치를 열심히 두드리는 여인은 바로 이안이었다. 그녀는 호미나 낫 같은 농기구를 만드는 작은 철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손재주가 좋은 그녀는 금방 일을 배워서 제법 괜찮은 품질의 호미를 뚝딱뚝딱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천마신교의 안가였다. 안가는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진 안가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 평범한 장소로 위장된 곳이 있었다.
그때 그곳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식사하고 일해요.”
돌아보니 천화루주가 밥을 챙겨왔다.
“감사해요.”
철방일은 이안이 주로했고, 식사는 천화루주 담당이었다. 청면은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움직였다.
이안이 천화루주의 옷차림을 보며 물었다.
“어디 가시나요?”
평소에는 평범한 아낙의 옷차림에 머릿수건까지 두르고 있던 천화루주였다. 한데 오늘은 화장도 하고, 예쁜 옷까지 차려입은 상태였다.
“아뇨, 그냥 기분 전환으로 입어봤어요.”
안가에 있는 한, 외출은 절대불가가 원칙이었다.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오늘 뭔가 그녀에게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혹시 오늘 생일이신가요?”
“아뇨. 그냥 좋은 꿈을 꿔서요. 자, 식기 전에 어서 식사하세요.”
“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이안이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같이 드세요.”
“저는 요리하면서 몇 점 집어먹었더니 배불러요. 많이 드세요.”
“정말 요리실력이 타고나신 것 같아요.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요.”
“사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주방에서 일했었어요.”
“아, 그러셨군요.”
“그때 참 고생 많이 했죠.”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바닥부터 고생한 경험이 그녀를 성공시켰다는 것을.
음식이 맛있었지만, 이안은 많이 먹지는 못했다. 검무극이 걱정되어서 이곳에 온 이후 밥맛이 통 없는 그녀였다.
“제가 이공자에게 한 말 혹시 들으셨어요?”
“네. 앞으로 제가 큰일 할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어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사람을 잘 보거든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너무 과분한 칭찬이세요.”
차분한 눈빛으로 이안을 응시하며 천화루주가 말했다.
“이 무인은 귀한 분이세요. 그러니 항상 자신을 귀하게 여기세요.”
이렇게 말해주는 그녀가 이안은 고마웠다.
안가에 숨어 있으면서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검무극 걱정이 많이 되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천화루주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녀의 위로는 묘하게 힘이 된다. 천화루주라는 여인이 가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청면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이안이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사도맹 본단에 비상이 걸렸답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시고요?”
“네. 비상이 걸렸다는 소식만 들어왔습니다.”
이안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도련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소마님이 지켜주고 계시니까요.”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
“반대는 왜 생각 안 해? 내가 소마님을 지켜드릴 수도 있지.”
돌아보니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나란히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 옷에 피가 튀어 있었는데, 특히 검무극은 옷에는 피가 흥건했다. 놀란 이안이 달려가서 검무극의 몸부터 살폈다.
“괜찮아요? 다쳤어요?”
검무극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안이 몸을 살폈다. 곳곳에 검상을 입었지만, 치명상은 피한 상태였다.
“많이 다쳤어. 팔다리가 다 잘릴 뻔했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냐, 자세히 봐. 손가락 발가락 다 붙어 있나 확인해 보라고.”
이안이 고개를 돌려 극악소마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저희 도련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라고! 반대라고!”
검무극이 너스레를 떨었고 극악소마는 차분히 있었다. 그러니 극악소마가 검무극을 살려준 분위기처럼 보였다.
극악소마는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하고 있었다. 천화루주는 극악소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쓰고 있는 가면이 달라진 것처럼, 검무극을 보는 눈빛이 달라진 것이다.
그녀가 극악소마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오라버니,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없다.”
“그럼 이제 우리 천화루로 돌아가도 되나요?”
극악소마가 고개를 끄덕였고 천화루주는 기뻐했다.
그녀가 극악소마의 변화를 느낀 것처럼, 이안도 한 가지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저 천화루주는 오늘 두 사람이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다들 바로 가시겠어요?”
“우리 먼저 가자.”
극악소마의 턱짓에 천화루주가 돌아봤을 때, 검무극은 이안의 등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이안이 잠시 이렇게 있을 테니, 먼저 가라는 시늉을 했다.
천화루주가 극악소마에게 속삭였다.
“오랜만에 제가 만든 요리로 한잔하세요.”
“좋지.”
극악소마와 천화루주, 청면이 먼저 그곳을 나갔다.
이안은 검무극이 깨지 않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비로소 한동안 초긴장 상태였던 이안의 표정도 편안하게 풀어졌다.
‘잘 돌아오셨어요, 도련님.’
* * *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백망기와 싸우고 있었다. 새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앞서 싸움을 재현하고 있었다.
싸울 때는 너무 빨라서 보이지 않았던 백망기의 검초가 느린 그림처럼 펼쳐졌다. 내 초식 역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제삼자의 입장이 되어서 그 싸움을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구경꾼이 되어 옆에서 보는 것처럼 말이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초식들이 정확히 떠올랐다. 마치 바둑기사들이 대국을 복기하듯, 나는 싸움을 복기했다. 내 무의식은 정확히 백망기와의 싸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싸움의 속도까지 조절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깐 멈췄으면 하는 마음을 먹는 순간, 꿈속에서의 나와 백망기는 동작을 멈췄다.
덕분에 나는 검의 위치와 각도를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내 의지대로 싸움은 움직였다. 천천히 움직여서 볼 수도 있었고, 멈출 수도 있었다.
그렇게 검황의 무공과 내 무공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볼 수 있었다. 이 과정은 직접 싸웠던 경험만큼이나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사실 새로운 경험은 싸울 때도 있었다. 백망기와 싸울 때 마지막 순간 오직 그만 보이고 세상이 어두워졌던 그 순간 말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신비한 일들은 비천검법이 십이 성 대성을 이루고, 내공은 어떤 한계를 넘어섰으며, 거기에 만사종주의 가르침까지 더해져서 생긴 변화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 검이 그의 심장을 찌르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몸과 마음이 상쾌했다.
꿈속에서도 싸운다고 더 피곤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 깨기 전에 꿈을 꾼 것이고, 실컷 잘 잔 모양이다.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배고프시죠?”
“내가 얼마나 잤어?”
“거의 열 시진 가까이 주무셨어요.”
거의 꼬박 하루를 잤다는 의미였다. 정말 오랜만에 푹 잤다. 그러고 보니 회귀한 후 이렇게 푹 자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몸 상태도 좋았다. 귀호의와 극품천잠사 덕분에 다쳤던 곳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혈천도마가 귀호의를 내주지 않았다면 분명 더 다쳤을 것이다. 나는 극품천잠사를 풀어서 다시 흑마검의 손잡이에 감았다.
“그렇게 오래 잔 것 같지 않은데.”
“많이 피곤하셨던 것 같아요.”
“극악소마는? 천화루로 갔나?”
“네, 두 분은 먼저 가셨어요.”
문득 극악소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사람은 역시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참, 주무시는 동안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어요. 비사인이 석관추의 손자를 죽였답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사인의 운명과 더불어 사도맹의 운명까지 바뀐 순간이었다. 원래는 사도맹의 후계자는 석관추의 손자가 차지했다. 이 변화가 우리들의 미래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알 수 없다.
“이거 잘된 일이죠?”
“아마도?”
나는 다시 벌러덩 누웠다.
이안이 이불을 잡아당겼다.
“안 돼요. 식사하시고 주무세요.”
“조금만.”
“식사 준비할 테니, 부르면 바로 나오세요.”
난 방을 나서는 이안을 불렀다.
“이안아.”
“네?”
“다시 보니 반갑다.”
이안이 활짝 웃었다.
“저두요.”
* * *
총군사 사마명은 작전지휘실에 내려와 있었다.
천마전보다 더 안전하다고 알려진 곳이 바로 이 통천각의 작전지휘실이다.
하루에 수백 통의 전서가 날아오고 이곳에서 분석된다.
“아직인가?”
“네.”
마지막으로 날아온 전서 때문에 사마명은 긴장하고 있었다.
석관추가 배후라는 소식이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았다.
검무극과 극악소마라면 알아서 헤쳐 나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한데 백망기 이름이 날아들자 통천각에 비상이 걸렸다. 만약 진짜 백망기가 움직인 것이라면, 검무극과 극악소마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교주는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당장 인근에서 그들을 지원할 고수를 파견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검무극과 극악소마에게 모든 일을 멈추고 돌아오라는 급보를 보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검우진은 그러지 않았다.
사마명은 교주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자신이라면 절대 못 할 결정이란 생각도 했다.
‘그만큼 믿고 계시단 걸까?’
총군사가 이곳에 내려와서 이렇게 전서를 직접 기다린 적이 잘 없었기에, 이곳에서 일하는 군사들 역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군사들은 통천각의 최고 기밀을 다룰 권한을 가진 이들이었다. 사마명이 가장 믿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때 기다렸던 전서가 도착했다. 내용을 확인한 군사가 반가운 어조로 보고했다.
“석관추와 백망기 모두 죽었습니다.”
수하 군사의 보고에 사마명은 안도하면서도 내심 크게 놀랐다.
“우리 쪽 두 사람은?”
“이공자, 극악소마 모두 무사하답니다.”
사마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긴장이 풀린 그는 의자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 백망기와 석관추를 죽였다?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사도십삼랑과 비사인이 함께 움직였으니 다른 변수가 있었을 것이다. 사도맹 측에서 새로운 고수가 나섰을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사이 보고를 한 군사가 전서를 정리해서 보고서로 가져왔다. 천마에게 갈 보고서였다.
보고서를 받아들며 사마명이 그에게 물었다.
“자넨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백망기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최근 이공자와 관련된 소식은 언제나 저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사마명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이런 결과를 예측이라도 한 것 같은 교주가 더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마명은 작전실을 나섰다.
* * *
안가에 도착하고 며칠 후, 나는 저잣거리를 돌며 여러 물품을 사들였다. 사야 할 물건이 많았기에 수레를 사서 실었다.
우선 의원에 들러서 새 침통을 여러 개 샀고, 약방에 들러서는 여러 약초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귀하고 비싼 약초도 있었고, 흔히 쓰는 약초도 있었다.
약초를 사 모은 다음에는 통을 샀다. 사람이 서너 명은 들어가도 될 만큼 큰 나무통이었다.
새 이불과 옷가지를 샀고, 한동안 먹을 식량과 술을 샀다. 그리고 나서는 전신을 비출 수 있는 커다란 동경도 샀다.
내가 저자에서 사 온 것들을 보고 이안은 깜짝 놀랐다.
“이게 다 뭐에요?”
“뭔지 맞춰봐.”
“전혀 연관이 없는 것들이잖아요?”
가득 쌓여 있는 약초에 그녀가 혹시나 하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혹시 내상 입으신 건 아니죠?”
“너 걱정할까 봐 말 안 했는데. 어서 마의께 가봐야 할 것 같아.”
이안은 다시 수레를 살폈다.
“다친 건 아니시고. 한데 왜 이렇게 약초를 많이 사셨대요?”
그러다 수레에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이건 뭐죠? 헉!”
그녀는 집어 든 것을 원래 있던 곳에 내려놓으며 수레 옆에 자세를 낮추면서 속삭였다.
“이건 여자 속옷이잖아요?”
“맞아.”
나도 그녀처럼 자세를 낮췄다.
“속옷을 왜 사셨어요?”
“필요해서. 근데 갑자기 왜 속삭이는 거야? 적이라도 나타났어?”
“그야…… 수레에서 장보도(藏寶圖)보다 더 놀라운 것이 나왔으니까요.”
“허리 아픈데, 우리 그만 일어서면 안 될까?”
“다른 옷도 있어요! 너무 예뻐요!”
고급비단으로 만든 아름다운 궁장도 있었다.
“누구 거예요? 엄청 날씬한 여자 건데요?”
“선물할 사람이 있다.”
“속옷을 선물로 주시는 거면 엄청 가까운 분이신 것 같은데요?”
“가깝지.”
“그렇게 가까운 분을 제가 모를 리 없는데? 그렇다고 천화루주님은 아닐 테고. 아! 혹시 천화루 기녀 중에 마음에 드는 분이 있었어요?”
“누군지 보여줄까?”
“정말요?”
“당연하지. 가자.”
나는 이안과 함께 수레를 끌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담한 장원으로 갔다.
“여기 사는 분이신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안으로 들어선 장원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어요.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이제 생길 거다. 내가 며칠 빌렸거든.”
“왜요?”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 인생을 바꿀 말이었고, 그녀가 가장 듣고 싶어 할 말이 내게서 흘러나왔다.
“여기서 네게 신독정화술을 펼칠 작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