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20)
절대회귀-120화(120/424)
제120회 천사문 아니고 천양문.
이안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어떻게 하죠?
―네게 술 사주겠다는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
나는 그녀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볼 작정이었다.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라고요.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처음이야.
―정말 제 마음대로 해요?
―해.
―정말 합니다.
비천검법도 좋고, 임독양맥 타통도 좋지만 그녀를 지켜줄 가장 중요한 무기는 경험이다.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천양문(天壤門) 소문주 곡사(穀思)라고 합니다.”
비싼 비단옷에 팔목이며 손가락이며 온갖 비싼 보석들로 치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부채에도 화려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혹시 본문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아뇨. 제가 견문이 좁아서 미처 못 들어봤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그럴 수 있지요.”
사실 천양문은 인근에서 제법 알려진 문파였다.
차림새만 봐도 내 가문이 어디요, 하고 다닐 곡사였으니, 그녀가 몰라줘서 가장 큰 무기를 잃은 셈이다.
“소저께서는 사문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멀리 시골의 이름 없는 문파라 모르실 거예요.”
“그럼 소저의 성함이라도 알려주시오.”
“백면이에요.”
백색 가면을 떠올려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곡사는 백면이란 이상한 이름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자, 백면 소저. 우리 자리를 옮겨서 말씀 나눌까요?”
“그건 좀 곤란하네요. 지금 우리도 한창 이야기 중이어서.”
그제야 곡사는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자리에 앉고서 내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던 그였다.
“소협은 누구십니까?”
이안이 뭐라 소개할지 망설이는 사이 내가 먼저 대답했다.
“백면 아가씨 호위입니다.”
순간 곡사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호위가 왜 겸상을 하고 있느냐는 의미였는데, 그는 이 한 번의 반응으로 사람 자체가 간파당했다.
난 이안에게 전음을 보냈다.
―오늘 하루는 내가 네 호위를 해주마. 평생 내 호위하고 살았는데 하루쯤 괜찮잖아? 즐겨라. 자주 오는 기회 아니니까.
―정말 즐깁니다.
곡사가 이안에게 말했다.
“호위와 친하신가 봅니다.”
이안이 날 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기 인생 살라고 그렇게 말해도, 제게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네요.”
곡사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이 딱 이랬다. 네 주인이 아름다우니 어떻게든 붙어서 수작을 부리려는 것 아니냐?
“호위와 할 이야기가 뭔지 궁금합니다만.”
“우린 온갖 이야기를 다 해요.”
“하나 충고를 해주자면 호위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곡사의 말에 이안이 대답했다.
“호위에게 정 쌓는 것은 나 대신 죽어달라고 점수 쌓는 거겠죠?”
나는 내심 웃었다. 지금 그녀는 계속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다 되돌려주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곡사가 말했다.
“그래서가 아닙니다.”
“그럼 왜죠?”
“수하들은 틈을 주면 딴생각을 품기 마련입니다. 그들을 위해서도 좋지 않아요.”
그는 진중한 표정을 지었지만, 온갖 보석을 치렁치렁 걸치고 뭔 인생 경험이 많아서 하는 말이겠는가? 여자 앞에서 멋있게 보이려는 허세임이 느껴졌다.
“귀엽네요.”
“네? 아, 그렇죠. 딴마음 품는 수하들 보면 귀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뇨, 곡 소협이 귀엽다고요.”
순간 곡사가 당황했다. 이렇게 대놓고 귀엽다고 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좋아요, 술 사주세요. 이 고을에서 제일 비싼 주점에 가서 제일 비싼 술로 사주세요.”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요? 비싼 술 사달라니까 마음 바뀌었어요?”
“그럴 리가 있겠소? 갑시다.”
우린 주점을 나왔다. 이안은 내 예상과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흔쾌히 술자리를 허락할 줄 몰랐다.
잠시 후 우린 마을에서 제일 비싼 주점의 특실에 자리를 잡았다.
“곡 소협. 기왕 노는 것, 친구들도 다 불러요. 남자고 여자고 싹 다 불러서 같이 놀아요. 왜요? 친구 없어요?”
곡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무림에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이오.”
그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교육을 받은 모양이다. 아무도 믿지 말라고.
“친구 없으신가 보네. 그럼 제가 우리 외로운 곡 소협 친구 해드려야겠네요.”
이안은 한없이 우울할 수도 있는 이 자리를 특유의 유쾌함으로 이끌고 있었다. 분위기는 한없이 밝아졌고 그녀는 진심으로 이 자리를 즐기려 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느낌이었다.
술 마시자고? 좋아, 못 마실 게 뭐 있어? 기왕 노는 것 우리 재미있게 놀자!
그러는 사이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차림새에서 알 수 있듯, 가진 것은 돈밖에 없다가 그의 독문무공이었다.
“한 병에 오십 냥이 넘는 술입니다.”
곡사의 허세에 이안은 호들갑을 떨었다.
“처음이에요, 이렇게 비싼 술은! 자,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아, 제 호위에게도 한 잔 줄게요.”
이안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술을 따라주었다.
“검 호위, 한잔 받으시게. 아주 비싼 술이니 남기지 말고 마시게.”
“그 전에 잠시 검사부터 하겠습니다.”
내가 은침을 꺼내 술과 요리를 일일이 검사했다. 물론 곡사는 온갖 인상을 다 썼지만, 이안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곡 소협, 설마 음식에 장난치고 그런 짓 안 하시죠? 그럼 혼나요! 정말 혼납니다.”
“날 어떻게 보고하는 소리요! 그딴 짓 안 해도 여인들 줄을 섰소.”
그러자 이안이 배시시 웃었다. 원수의 마음도 푸는 그런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그런 줄 알았어요. 자자, 우리 술 마셔요.”
우리 세 사람이 건배했다. 술잔을 비운 이안이 아쉬움을 표했다.
“이렇게 좋은 술을 우리끼리만 마시니 아까워요. 바깥에 호위 분들!”
그녀가 이번에는 밖에 있는 곡사의 호위들을 불렀다. 네 명의 호위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곡 소협, 저분들하고도 같이 마시죠?”
대번에 곡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네 호위 중 한 남자가 나섰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도련님을 지켜드려야 합니다.”
이안이 그에게 말했다.
“정말 거기 밖에서 도련님이 지켜지던가요?”
의미심장한 말에 호위 무인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지금껏 돈으로 여자나 꼬시고 다니는 망나니의 술자리나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이내 이안이 부드럽게 곡사를 설득했다.
“곡 소협, 이 일에 대단한 의미 두지 마세요. 그냥 같이 술 한잔 마시는 겁니다. 자자, 앉으세요.”
호위들이 곡사의 눈치를 살폈다.
이안이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짓자 곡사는 더는 버티지 못했다. 곡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네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자자, 제 술 한 잔씩 받으세요.”
그녀가 그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어쩌면 이안은 그들에게 애틋한 심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호위였으니까.
“자, 다 같이 한잔해요!”
그녀가 잔을 높이 들었고 우리는 건배했다.
“캬, 술맛 좋네요. 곡 소협, 술 더 시켜주세요! 아, 너무 비싸죠?”
“무슨 소리! 마음껏 시키시오.”
아름다움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안 특유의 유쾌함과 생기가 더해지자 그 어떤 것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이들과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상대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았기에, 누구도 감정적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단지 내가 옆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실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임독양맥의 타통이 그녀의 자신감에 더욱 큰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우린 술을 마시며 온갖 이야기를 다 했다. 처음에는 극도로 말을 아끼던 호위들도 하나둘씩 질문에 답했고, 곡사조차도 알지 못했던 일도 밝혀졌다.
“열흘 전에 아들을 낳았다고요? 오, 축하해요!”
이안은 당연히 몰랐을 곡사를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에 모두를 위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자, 우리 공자님 선물 나갑니다! 선물! 선물!”
그녀에게 나는 감탄했다. 곡사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면서 축하하게 해주는. 솔직히 이 순간만큼은 이렇게 생각했다. 나보다 낫구나.
곡사는 한 번도 호위들에게 선물을 줘본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안이 차분하게 그에게 말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선 긋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녀가 젓가락을 들고 술을 찍어 상에 선을 쭉 그었다.
“여기가 고용된 시점이고, 여기가 끝이에요. 여기 끝까지 오면 고용주를 위해 대신 죽어줄 수도 있죠. 끝까지 간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죠. 한데 호위들은 바란답니다. 자신과 자신이 지키려는 사람과의 관계가 이 끝에 오기를. 여기 오면 자신이 죽는 선인데도 말이죠. 그게 바로 여기 계신 호위 분들이세요.”
담담한 그녀의 말에 네 호위들이 살짝 격앙되었다. 그 말은 내게 한 말이기도 했다. 자신이 그렇다고.
“호위 무인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호위 중 한 사람의 입에서 질문이 나왔다.
“어려서 경험해 봤어요.”
그때 곡사가 그 호위를 노려보았다. 어디서 나서느냐는 눈빛이었다. 나섰던 호위가 움츠러들며 고개를 숙였다.
이안이 곡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면 선이 반대로 가요.”
“나는 믿지 않소. 누군가가 순수하게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을. 소저는 믿소?”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밀었다.
“곡 소협도 한 번 믿어봐요.”
“믿다가 뒤통수 제대로 맞소.”
“안 믿는다고 안 맞을까요?”
“!”
“우린 흔히 배신을 믿음과 결부시키죠.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배신당하는 쪽의 입장이죠. 이만큼 믿었는데 날 배신하다니! 한데 배신하는 쪽에서는 상대가 날 믿지 않아서 배신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대부분 다른 이유 때문이잖아요? 돈이든, 권력이든, 자기 개인사든. 전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제 주인이 절 믿지 않아서 배신했습니다, 하는 경우는. 나중에 대는 핑계죠. 날 믿지 않아서 배신했다고. 그러니 믿어도 된다는 말씀! 어차피 배신은 별개의 일이란 말씀!”
“궤변이요!”
“오늘의 궤변을 위해 한잔해요!”
곡사는 이안이 내미는 술잔을 거절하진 못했다.
그는 술에 취했지만, 이안은 취한 척하고 있었다.
나는 보았다. 그녀가 틈틈이 손가락 끝으로 주기(酒氣)를 배출하고 있음을. 막 정신없이 노는 것 같아도 그녀는 조심하고 있었다. 완벽하다, 이안!
―언제 배웠어? 주기를 배출하는 법은?
―어려서 배웠죠. 지금까지 실력이 안 돼서 못 했을 뿐이지. 아, 아깝다. 이 비싼 술을!
뒤늦게 생각났다며 그녀가 소리쳤다.
“아, 맞다. 아기 선물! 선물! 선물 주세요!”
그녀가 흥에 겨워 소리치자 곡사가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많이! 많이! 많이!”
결국 제법 큰 액수가 전낭에서 나왔다.
“괜찮습니다.”
“받게. 애 옷이라도 사 입히게.”
“감사합니다.”
그를 보며 이안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곡 소협! 멋있어요!”
“별일 아니오.”
괜히 곡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덕분에 분위기는 더 좋아졌고, 우린 밤새 술을 마셨다. 처음 본 사이인데, 여러 이야기를 다 나눴다. 곡사와 호위들도 처음 가지는 술자리였다.
이안이 분위기를 몰고 가니, 모두 가랑비에 젖듯 이 술자리 재미에 빠져들었다. 우린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밤새워 마셨다. 무공 이야기도 했고, 돈 버는 이야기도 했으며, 가족들 이야기도 했다.
자리를 이끄는 이안이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니, 모두 자기도 모르게 진심을 드러냈다. 우린 이별이 못내 아쉬울 정도로 즐겁게 술을 마셨다.
“곡 소협, 다음에 이 고을에 오면 천사문부터 찾아갈 거예요.”
“천사문 아니고 천양문이오.”
“아아, 우리 천양문의 곡 소협. 나 꼭 기억했어요. 곡 소협, 오늘부터 우리 술친구야.”
오늘부터 술친구란 말에 곡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면 오늘 그가 처음 접근했을 때, 이안과 어떻게 해서든 자려는 마음으로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그는 술친구란 말에 감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볼 때까지 아무 여자나 유혹하고 다니면 안 돼요! 무공수련도 하고. 멋진 모습으로 또 봐요. 알았죠?”
“알겠소.”
놀랍게도 곡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오늘부터 달라질 것만 같았다. 심지어 그는 내게 용돈도 주었다.
“아가씨 잘 모시게.”
“네, 감사합니다.”
아, 곡사는 모를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얼마나 감탄하고 있는지. 곡사에게 감탄이 아니라 이안에게였다. 하룻밤 사이 남자 다섯을 그녀의 매력에 푹 빠뜨렸다. 솔직히 여섯이다. 나도 정말 그녀에게 감탄했으니까.
그렇게 우린 그곳을 떠났다. 저 멀리 우릴 바라보는 곡사와 호위 무인들은 작별을 아쉬워했다.
“사실 처음에는 네 걱정을 했었다.”
“저를요? 왜요?”
“남자들에게 속고 휘둘릴까 봐. 흥분해서 사고 칠까 봐. 남자들에게 실망하고 상처 입을까 봐.”
처음 저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결국 곡사가 얻어터지거나, 더 설쳐대다 죽거나.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끝났다. 황천각에 잡아가서 겁주고 두들겨 팬다고 곡사가 저렇게 변할까? 바람이 벗기지 못한 겉옷을 햇살이 벗긴 느낌이다.
“그런데요?”
“이제 정반대의 걱정을 하게 됐다.”
“어떤 걱정요?”
“남자들 걱정. 너 내보냈다간 무림의 남자들 다 거덜 나겠다. 가산탕진하고, 강한 모습 보인다고 수련에 미치고. 상사병 걸리고.”
이안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시잖아요? 제 꼬리가 몇 개인지.”
오늘 그녀의 모습을 보자 비천검법 대성을 꼭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녀는 더욱 매력적인 사람이 될 테니까.
“이제 우리 어디로 가나요?”
“곡사 같은 녀석 만나면 또 같이 놀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가는 길에 절경도 구경하고. 그리고 혼례 구경도 가고.”
“누구 혼례요?”
“있다. 말려줄지 말지 고민 중인 혼례가.”
“남의 혼례를 왜 말려요?”
“그렇지?”
“재밌겠다! 저 혼례 구경 제대로 해본 적 한 번도 없어요!”
신난 그녀가 앞으로 뛰어갔다.
저 멀리 떠오르는 해를 향해 뛰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한 장의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천천히 그림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