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33)
절대회귀-133화(133/424)
제133회 사람들이 내 마음 같지 않다.
혈천도마의 등장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서대룡과 장호, 여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했다.
“마존을 뵙습니다.”
내가 혈천도마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지나가다가 들렀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내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가 취마와 술을 마신다는 소식에 이곳을 찾아온 것이리라.
날 위해 온 것이다. 내가 취마에게 휘둘릴까 봐 걱정되어서. 요즘 무공수련을 열심히 한 것도 같은 연장선상의 일이리라.
혈천도마는 내게 받은 술을 마신 후 서대룡과 장호, 그리고 여빈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잠시 나가 있게.”
누구 명인데 거부하겠는가? 세 사람이 공손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곳에는 나와 혈천도마, 그리고 취마만 남았다.
취마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오, 선배.”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혈천도마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겠네. 그만 물러나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공자에게서 물러나란 말이네.”
“저는 이공자와 술을 마셨을 뿐입니다.”
“그거 하지 말라고.”
“취마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니요?”
“다른 사람하고 마시게.”
취마가 웃으면서 술을 마셨다. 혈천도마는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존들 사이에서도 누구 하나 친한 사람이 없는 그였는데, 음흉하다고 여기는 취마를 좋게 볼 리 없었다.
“자, 흥분 가라앉히시고 제 술 한잔 받으시지요.”
취마가 혈천도마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는 혈천도마 앞에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제가 선배님을 존경합니다만, 이건 좀 도가 지나치지 않나 싶습니다만.”
“만날 취해 있는 자네에게 도(道)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는데?”
“제겐 주도(酒道)가 있지요. 선배님, 저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지만 오늘 혈천도마는 작정하고 온 상태였다.
“이공자에게서 멀어지게. 그럼 자네 인생에 참견할 일 없네.”
그러자 취마가 자리에서 술잔을 챙겨 일어나 내게서 제일 먼 자리에 앉았다.
“이 정도 멀어지면 되겠습니까?”
혈천도마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내가 지금 장난치는 것 같나?”
“아닙니다. 하도 진지하게 말씀하셔서 제가 장난 좀 쳤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취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 시점에서 너는 뭐라 할 말이 없느냐는 눈빛이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취마의 시선이 다시 혈천도마를 향했다.
“선배 이런 분 아니셨잖습니까?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몰입하시는 분이셨습니까?”
혈천도마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자네야말로 남에게는 관심 없는 사람 아닌가?”
“제가요?”
“술에 취한 자기 기분만 중요한 사람 아니었나?”
“맞습니다. 제가 그런 이기적인 놈이긴 합니다.”
취마가 술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내려놓는 소리가 앞서보다 크게 났다.
어느새 주위 공기가 차가워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들의 기세는 두 사람의 기분을 반영하고 있었다.
“술은 그만 마시고 그 입으로 대답하게. 더는 이공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만 취마는 다시 술을 마셨다. 술잔 너머 취마의 표정은 굳어 있었는데, 내내 웃고 떠드는 모습만 보다가 정색하고 있는 그의 표정이 낯설게 느껴졌다.
“싫습니다.”
취마의 거절에 혈천도마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취마의 몸에서도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혈천도마의 마기와 취마의 마기가 뒤섞이자 생전 처음 느끼는 기운이 우리 주위를 덮쳤다.
“마존들 사이에는 절대 싸워선 안 된다는 불문율을 믿고 이러나?”
“불문율을 깨겠다는 말씀입니까?”
“못 깰 이유가 있나?”
“좋죠. 저는 언제나 깨는 쪽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설마 제가 불문율이 깨지는 걸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네의 술병이 깨질 때도 그렇게 여유로운지 궁금하군.”
두 사람의 마기가 더욱 짙어졌다. 점차 마기가 짙어졌지만 나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천마호신공으로 내 몸을 보호하며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유나 물어보죠. 절 막는 이유는 뭡니까?”
“자넨 이공자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될 테니까.”
“선배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아니고요?”
혈천도마의 입꼬리가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그의 기세는 상대적으로 젊은 취마에 못지않았지만, 문제는 취마가 그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며칠 전에 검존 선배와 술을 마셨습니다.”
일화검존이 언급되자 혈천도마의 얼굴에 짜증이 치밀었다.
“잘 계시더라고요. 여전히 아름다우시고, 여전히 품위 있으시고. 지난번 팔마회합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왔습니다. 아, 선배님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하시더라고요.”
혈천도마의 두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정말 당장에라도 멸천대도를 휘두를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취마의 독문병기는 허리에 차고 있는 조롱박처럼 생긴 술병이었다. 보검으로도 잘리지 않는다고 알려진 그 술병의 이름은 혈루(血淚)였다. 왜 이름을 그렇게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마개가 열리면 누군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른다는 점만은 확실했다.
나는 회귀 전에도 멸천대도와 혈루가 사용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과연 저 두 사람이 충돌하면 어떻게 될까?
이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취마는 계속 혈천도마를 자극했다.
“저보고 물러나라고 하셨습니까? 물러나야 할 분은 선배님 아니십니까? 선배가 이공자와 함께하는 한 검존은 이공자를 돕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라면 검존은 기꺼이 이공자를 돕겠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배가 우리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검존을 끌고 들어오자 혈천도마는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일화검존은 그의 약점이었으니까.
게다가 역량이 비슷비슷한 마존들인데, 두 사람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때 그 대답을 한 사람은 나였다.
“낫습니다.”
취마와 혈천도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두 분을 합친 것보다 혈천도마 어르신이 더 낫습니다.”
날 향하는 혈천도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작고 예리한 눈에 스치는 것은 고마움이었고, 감격이었다.
취마가 웃으며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검존이 앞에 있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있습니다.”
“극악소마가 있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극악소마와 깊은 정서적 교류를 한 것을 취마는 알고 있었다. 역시 정보가 빠르고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 자리에 없다고 허풍을 치는군.”
취마가 코웃음을 치며 일어나더니 창가로 갔다. 길 건너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여빈에게 소리쳤다.
“가서 일화검존과 극악소마를 모셔 와라.”
“네.”
여빈이 순식간에 몸을 날려서 사라졌다.
취마가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나는 자네와 호형호제까지 제안했거늘, 너무 하는 것 아닌가?”
“저를 좋게 봐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저는 이제 겨우 술 두 번 마신 사람과 호형호제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으시면 줄 서십시오. 아직 취마님 순서가 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취마와 지금보다 훨씬 더 친해질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대업에 취마가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그래도 나는 혈천도마가 우선이다.
나는 열심히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고, 그는 기꺼이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취마가 아무리 현란하게 나를 현혹하고 좋은 말을 해주더라도, 너무나 오랫동안 닫혀 있어 녹슬고 굳어 있던 그 육중한 문을 힘들게 열어준 고마움에 비할 수는 없다.
그때 혈천도마가 전음을 보냈다.
―나중에 검존이 오면 검존이 더 중요하다고 해라.
―싫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네 편을 들 거다.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불운을 이야기하던 그 꼬장꼬장하던 늙은이는 어느새 여기까지 와 있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사람이 나 때문에 버리려 하고 있다.
―그러시리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한데 왜 싫어?
―어르신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시당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알았다. 지금 자네 마음 알았으니까, 내 말 대로 해라.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대의가 중요한 법이다. 그건 알지?
이런데 어찌 내가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겠는가?
―그래서 안 됩니다.
―왜?
―일화검존은 내가 거짓말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테니까요. 아시잖습니까? 눈치 빠른 분이시라는 것. 대의를 위해서도 솔직히 말하는 게 좋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혈천도마는 뭐라 말하지 못했다.
취마가 일화검존을 언급하면서 이 자리는 그에게 아주 불편한 자리가 되었다.
몇 번이나 자리를 박차고 싶었을 텐데, 나를 위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먼저 도착한 사람은 일화검존이었다.
이미 그녀는 여빈에게 이곳에 누가 있는지 물어봤는지 혈천도마를 봐도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선배님.”
“이공자, 뭔 이런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나?”
그녀의 농담에 취마가 웃으면서 말했다.
“친구, 섭섭하게 무슨 그런 말씀인가.”
친구란 호칭으로 취마는 그녀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일화검존은 그를 수더분하다는 정도로 표현했지만 취마는 그를 친구라 부르고 있다.
마존들은 내게 서로에 관해 설명할 때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술 좀 그만 마셔.”
“그대가 검술 수련하는 것과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은 마찬가지 일이라네.”
“그럼 술도 혼자 마셔야지. 수련도 혼자 하니까.”
“이공자와 술 마시면 너무 재미있어서.”
“그건 나도 인정하는 바지. 한데 술도 잘 못 마시고 재미도 없는 나는 왜 불렀나?”
그러자 취마가 혈천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도마 선배가 후배 군기를 잡으려 해서. 도마 선배는 또 네가 꽉 잡고 있잖아?”
원래라면 나에게 검존 앞에서 선택해 보라고 밀어붙였겠지만, 취마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똑똑했고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봤자, 내 감정만 상할 뿐 자신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또 그는 알았다. 이 정도만 해도 혈천도마가 먼저 나서는 성격이라는 것을. 특히 일화검존과 관련해서는 더욱 경직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내가 취마에게 이공자에게서 물러가라고 했네.”
혈천도마의 말에 일화검존이 냉담하게 반응했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요?”
“권한 같은 것은 없네. 그냥 이공자에게 도움이 안 되겠다는 내 직감이네.”
“당신의 직감이 형편없다는 것은 이미 내가 확인했어요.”
“자넨 나에 대해서 하나도 몰라.”
“알고 싶지 않아요.”
한때 자주 보면서 날 세우는 것이 좀 줄어들었는데, 취마가 있어서인지 또 서로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취마가 다시 혈천도마의 약점을 찔렀다.
“좋습니다. 이공자가 선배를 선택해서 나와 검존이 물러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남은 극악소마하고는 친하십니까?”
혈천도마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아무하고도 친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나서서 않았다. 이럴 때 나서서 어설프게 편을 들었다간 오히려 혈천도마의 분노를 더욱 키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취마는 혈천도마의 약점을 제대로 찌르고 있었다. 그를 탓할 수만도 없다. 오늘 이 자리에 난입한 사람은 혈천도마였으니까.
취마가 취기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이제 자넨 나를 미워하겠군. 자네가 좋아하는 도마 선배를 이렇게 몰아붙였으니. 이해해주게. 난 현실을 보여줬을 뿐이라네.”
“미워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왜?”
“취마님도 검존 선배도 보내지 않을 작정이니까요. 다 제 사람으로 만들 겁니다.”
순간 혈천도마가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마음이 복잡한 그는 나를 말리지 못했다. 혼자서 세 사람 몫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려 있었으니까.
“그렇게 보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전 이분들 다 데리고 갈 겁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넨 사람들이 노력하면 모두 친해지고 화합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네. 자넨 그럴지도 모르지. 나이에 맞지 않는 포용력이 확실히 있으니까. 하나 자네도 결국 알게 될 거네. 사람들이 내 마음 같지가 않다는 것을.”
혈천도마가 취마와 검존을 쳐다보다가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창문에는 언제 왔는지 하얀 가면을 쓴 극악소마가 허공에 떠서 팔짱을 낀 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었다.
“자네 때문에 겉으로 화합하는 척할 수 있겠지만, 뒤에선 싸우고 미워하고 난리를 치겠지. 야단법석 와중에 누군가는 상처받고 증오를 키울 테고 결정적일 때 배신할 거네. 그때 받은 상처를 이유로 들면서 말이네.”
다른 마존들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한데 왜?”
“왜 우리가 같이 가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죠.”
나는 네 마존을 바라보며 기도를 발출했다. 지금껏 제대로 그들에게 기도를 내보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기도를 밀어내고 주위를 내 기도가 장악했다.
강함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기도에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위엄을 담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천마는 저이니까요.”
내 말에 모두 흠칫 놀랐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미래 그대들의 천마가 될 사람의 결정입니다. 제가 누구를 데려오든 받아들이십시오. 죽이지만 않는다면 싸우든 미워하든 배신하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대신에 딱 한 가지!”
난 네 마존을 쳐다보며 선포하듯 말했다.
“제 울타리 안에서 하십시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었다. 취한 눈도 나를 보았고, 부드러운 눈도 나를 보았다. 작고 예리한 눈도 보았고, 가면 속 눈도 보았다.
내 뜻을 따라주길 바랐다. 누군가 긍정적인 말로 먼저 나서 주기를 기대했다.
그때 마존들이 동시에 말했다.
“싫은데?”
“싫네.”
“싫습니다.”
“싫다.”
이 순간 그들은 한마음이었다.
난 참지 못하고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휴, 이 귀엽고도 징글징글한 나의 마존들 같으니라고!
난 고개를 내밀어 일 층에 있는 조춘배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새로 술상 좀 봐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