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38)
절대회귀-138화(138/424)
제138회 그냥 보내면 제가 극악이겠습니까?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서대룡의 질문에 목적지가 어디였는지를 말해주었다.
서대룡이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이젠 놀라지도 않았다.
“거길 나흘 만에요?”
“그래.”
“당연히 농담이나 장난 아니시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서대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이해하려고도 안 하렵니다. 괜히 고민해봤자 저만 이상한 사람 될 테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나 내일 무림맹에 입맹해, 라고 하셔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분이니까요.”
“알면 됐다. 참, 취마는?”
“각주님 출교하신 후에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헤어졌을 때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나룻배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는 모습이.
무림평화 같은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진짜 이유를 말하라고 했었는데, 어쩌면 내 말에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솔직해지지 않는 한, 우린 결코 호형호제할 수 없을 거요.’
그에게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나에게 접근한 것은 아님을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한데 서 조사관, 아까부터 다리는 왜 절뚝거려?”
“어제 사부님의 지옥훈련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네.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셨는데.”
그때 다른 조사관의 안내를 받으며 혈천도마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마침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중이어서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사부님!”
서대룡에게는 언제나 존경하는 반가운 사부였다.
좀 살갑게 대해주면 좋으련만, 혈천도마는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너는 잠시 나가 있거라.”
“네!”
서대룡이 밖으로 나갔다. 내 앞에서는 그렇게 절뚝거리더니, 지금은 이를 악물고 꿋꿋이 걸어 나갔다.
서 조사관, 힘내라. 네 꼬장꼬장한 사부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쉽지가 않다.
혈천도마의 작고 매서운 눈이 오늘따라 더 사납게 보인다. 어제 기분이 나빠 보였다더니 오늘도 그 기분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혈천도마가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어제 취마가 날 찾아왔었네.”
나는 알 수 있었다. 서대룡의 지옥훈련은 취마 때문이었음을.
“술을 한 병 사 왔더군. 아주 비싼 술로.”
말은 담담하게 하고 있었지만 혈천도마는 이 상황이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왜 왔답니까?”
“그냥 주고 싶어서 사 왔다면서 술만 주고 갔다.”
혈천도마와 화해하려는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술 한 병 주러 가는 결정에 닷새나 걸렸다.
“예전에 극악소마가 와서 자네에게 가면 전해달라고 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거와는 다르죠. 그건 제게 용무가 있는 거고, 이번에는 어르신께 용무가 있는 거니까요.”
“난 여전히 자네 용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아뇨,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그래서 술은 드셨습니까?”
“뭐가 든 줄 알고 마셔? 그냥 부어서 버렸지.”
“남의 성의를 그렇게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남의 성의를 자네가 왜 신경 쓰나?”
“비싼 술이라니까 그러지요. 저나 주시지.”
혈천도마가 의심스럽게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지? 자네가 뭔 수를 썼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 주정뱅이가 평생 안 하던 짓을 할 리가 없지.”
솔직히 말할까 하다가 끝까지 잡아뗐다. 이 화해가 제대로 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이 풀어야 했다.
“아뇨,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날 풍류주점에서 술 마시다가 어르신께 감명을 받았는지 모르죠.”
“무슨 감명? 그자에게는 욕밖에 안 했는데?”
“세상에 누가 있어 그에게 그렇게 욕을 하겠습니까? 마음에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취마를 두둔하지 말게. 내가 분명히 말했지? 취마는 음흉한 자라고. 이공자, 괜한 이에게 마음 주지 말게. 너무 멀리 가면 돌아와야 할 길이 고된 법이라네.”
자기 할 말만 하고 혈천도마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둘의 화해는 이후에 취마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다. 그 과정에서 취마는 또 선입견을 한 꺼풀 벗겨낼 것이고, 그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 *
그날 밤.
나는 멀리 거목의 나뭇가지에 앉아 이안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할 먼 거리였지만, 나는 그녀의 표정까지 다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세상 진지한 얼굴로 땀을 뚝뚝 흘리며 비천검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했던 초식을 또 하고, 또 하고. 저 반복과 반복이 언젠가 응답할 때까지 그녀는 쉬지 않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바로 극악소마의 수하인 청면이었다.
“이 무인.”
“아, 청면님.”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무슨 일로 오셨죠?”
“그때 조장으로 들어오라고 했던 말, 아직도 유효합니까?”
“청면님이 확실하게 거절하실 때까지, 일조장 자리는 언제나 비어있습니다.”
이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갑작스러운 청면의 방문에 당황한 것이다. 반면 청면은 준비한 질문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귀영대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귀영대는 오직 이공자님을 위한 조직으로 활약할 겁니다.”
“만약 교주님의 명령과 이공자님의 명령이 상충된다면요?”
이안은 이미 대답을 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지금 무슨 대답을 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으시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걸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청면의 가면 속 눈동자에서 고민이 느껴졌다.
더없이 뚱뚱했다가 더없이 아름다워진 이 이상한 여자가 갑자기 조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솔직히 처음에는 미친년인가, 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마차까지 부숴가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긴 하지만, 미래의 마존 자리를 포기하고 조장을 하라니?
정말 그 순간은 이렇게 생각했다. 하늘은 다 주지 않는구나. 이렇게 아름다운데 미친년이라니!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미친년 생각이 자꾸 났다.
이십 년, 삼십 년을 기다려 마존이 되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무림을 휘젓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떨치려고 하면 할수록 계속 이안 생각이 났다.
만약 변신 전의 그녀가 제안했다면 이렇게 고민했을까? 미모에 현혹되는 멍청이라며 자신을 질책했지만,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아니었다면 죽은 목숨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그 유혹에 힘을 보탰다.
이안은 청면을 끌어들이는 기분 좋은 말보다 솔직함을 선택했다.
“저는 도련님을 믿어요. 하늘을 보고 저건 땅이라고 하시면, 그날부터 하늘을 땅처럼 생각하고 살 거예요. 나 대신 죽어줘, 하면 대신 죽을 거예요. 그때 어떤 말을 남길까 거울 보면서 미리 연습하기도 한답니다. 여러 말을 준비해뒀어요. 두고두고 날 기억하게 할 말도 있고, 부담 없이 나를 보내게 할 말도 있고, 상처 줄 말도 있어요. 어떤 말을 하게 될지는 그때 돼봐야 알 것 같아서요. 이런 제가 이끄는 조직이 귀영대입니다. 들어오셔도알고는 들어오셔야지요.”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떨림은 가라앉고 있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를 위해서도 신중하게 결정해 주세요.”
“이 무인을 위해서라니? 그건 무슨 뜻입니까?”
“제가 청면님께 제안한 그 자리는 제게는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자리거든요. 제 인생 첫 수장을 맡은 조직의 제일조장 자리니까요. 그 자리에서 청면님이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소중한 자리가 누군가의 후회가 되는 자리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천천히 후회 없는 결정을 하세요. 청면님이 결정할 때까지 일조장 자리는 비워둘 작정이니까요. 다른 조장이 다 차도 일조장 자리는 비워두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귀영대에 들어가서도 이 가면을 계속 써도 됩니까?”
“네. 대신 평소에 제게 많은 말씀을 해주셔야 해요. 누군가 그 푸른 가면을 쓰고 제 앞에 나타나 청면님처럼 행세했을 때, 제가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요.”
잠시 말없이 이안을 응시하던 청면은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떠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비로소 이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으아!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아아! 망했어. 주저리주저리 말을 너무 많이 했어!”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 누군가 훌쩍 날아오더니 내가 앉아있던 나뭇가지 옆에 내려앉았다.
놀랍게도 그는 극악소마였다. 아마 청면을 따라 이곳에 왔던 모양이다.
“한동안 잠을 설치며 고민하더니 결국 여길 왔군요.”
이미 극악소마의 눈에 청면의 고민이 들어와 있었던 모양이다.
“멍청한 놈! 미색에 홀려서 뭘 하는 짓인지.”
“홀릴만한 미색이지 않습니까?”
“이공자는 내 가면을 뺏어가더니 이제 수하까지 뺏어가는군요.”
“자, 바로 잡죠. 가면은 선물로 주셨고요, 청면은 제가 아니라 저 이안이 뺏어가는 것이고요.”
“그럼 저 예쁜 심장에게 복수해야겠군요.”
“그냥 제가 뺏어가는 거로 하죠.”
극악소마가 나직하게 웃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지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청면이 간다고 하면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그냥 보내면 제가 극악소마겠습니까? 팔이라도 하나 잘라서 보내야죠.”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 이안이 청면에게 제안했을 때만 해도 지켜보던 극악소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편히 보내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다. 청면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편히 보내주셔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미래의 마존보다 아무도 없는 저 조직의 조장이 낫다는 말씀입니까?”
“이런 측면에서는요. 마존은 먼 미래의 일이고, 조장이 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마음이니까요.”
사실 애초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청면은 나이가 들어도 마존 자리에 앉지 못한다.
지금의 극악소마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마존 자리를 지키게 된다는 것을. 청면이 그 오랜 세월을 자신의 뒷바라지만 하다 보내게 된다는 사실을.
“소마님도, 저도 타고난 운명에 매여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 청면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살게 놔둬 보시죠.”
“나중에 후회할 겁니다. 그건 어떡합니까?”
“뭘 어떡하겠습니까? 자기가 선택했는데 후회해야죠. 그때 후회해서 소마님을 다시 찾아갈지도 모르죠. 다시 받아달라고요.”
“어림없습니다.”
“받아주십시오. 받아줄 이유가 충분합니다.”
“어떤 이유죠?”
“지금의 청면과 자기 인생을 살아본 청면은 분명 다를 테니까요. 방황하고 돌아온 청면이 더 강할 겁니다. 후회해본 사람의 검이 더 빠를 겁니다.”
극악소마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내 가면 속을 항상 궁금해했었죠? 저도 항상 궁금합니다. 이공자 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내심 뜨끔했지만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가끔은 저도 궁금합니다. 제 속에 뭐가 들어서 이렇게 인생 다 산 것 같은 이야기나 하는지. 이렇게 말 많고 가르치려 들면 요즘 여자들에게 인기 없겠죠?”
“알긴 아는군요.”
극악소마가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말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부탁드리죠. 혹시라도 청면이 조장을 선택하고, 소마님이 열 받아서 팔을 자르고 싶어지실 때, 그때 저를 먼저 만나주십시오.”
“왜요? 못 자르게 제 팔을 자르시게요?”
“청면보다 소마님이 더 좋은데,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그럼 왜 보자는 겁니까?”
“이안을 위해서라도, 소마님을 어떻게든 말리고 설득해봐야죠.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생각해보죠.”
극악소마가 훌쩍 몸을 날려 그곳을 떠났다.
내 시선이 다시 이안을 향했다.
그녀는 흥분을 진정시키고 다시 지겨운 무공수련에 들어가 있었다.
잘하고 있다, 이안. 청면도 결국 네 설득보다 네 실력에 반해서 오게 될 거다. 내 생각에 소마의 용서도 거기에 달렸다.
* * *
다음 날, 서대룡이 흥분한 얼굴로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각주님,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서대룡이 정말 놀랄만한 소문을 가져왔다.
“사부님이 취마님과 한판 붙으신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인가?”
“헛소문인지, 진짜인지도 확실하진 않습니다. 남도종에서부터 난 소문이긴 한데. 근데 마존들끼리 싸우지 않는다, 이거 불문율 아닙니까?”
서대룡은 혹시라도 소문이 진짜일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걱정되냐?”
“솔직히요.”
“뭐가 걱정이냐? 네 사부, 요즘 무공수련 엄청나게 했다.”
“그래도 연세도 있으신데.”
혈천도마는 알까? 자기 제자가 이렇게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을. 하긴 그거 알았다면 자기 기분 나쁘다고 지옥훈련을 시켰겠나?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대룡이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술 사러. 오늘은 아주 독한 술로.”
“아! 취마를 말리러 가십니까?”
집무실을 나서며 말했다.
“결투는 없을 거다. 내 손에 먼저 죽을 테니까.”
화해하라고 했더니 오히려 결투를 한다고? 정말 못 산다, 못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