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43)
절대회귀-143화(143/424)
제143회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내가 답을 알면 이런 꼴을 당했겠소!”
추생이 버럭 소리쳤다.
역시 다혈질적인 성격은 확실했다. 마인을 상대로,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무공이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미안하오, 요즘 내 인내심 통이 다 차서 찰랑거리고 있소. 작은 돌멩이 하나만 떨어져도 넘쳐 버리오.”
“이해하오.”
“당신이 뭘 이해하는데!”
또 버럭했다가 이내 그가 사과했다.
“미안하오. 당신에게 화낼 일이 아닌데.”
“괜찮소. 이런 상황에서 냉정함을 유지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소?”
추생이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내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오?”
“평소대로 하시오.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하려던 일을 진행하시오.”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생각하오?”
“당신에게만 집중하시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 판국에 안 되는 게 어딨소?”
나는 그에 관한 정보를 적은 종이를 꺼내 아예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거 항상 간직하고 있다가 혼란스럽고 자신감이 떨어지면 펼쳐보시오. 특히 명석하다는 그 부분을 잊지 마시오. 당신은 명석한 사람이오. 그러니 그 똑똑한 머리로 잘 판단하시오.”
추생은 읽고 있던 종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 종이마저 인내심 통을 넘치게 하는 모양이다. 그는 차마 그것을 찢어버리지는 못하고 구겨진 그것을 품에 넣었다.
“이제 어떻게 움직일 작정이오? 내가 오지 않았다면 무림맹에 기별했을 거요?”
내 물음에 추생은 잠시 숙고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라리 사도맹과 손을 잡으면 손을 잡았지, 무림맹을 부르진 않았을 거요.”
“그럼 사도맹과 손을 잡을 거요?”
“그쪽도 아니오.”
그는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그는 무림맹이나 사도맹, 모두와 손을 잡지 않았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풀려고 했소?”
“나도 모르겠소.”
바로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나를 속이려면 스스로를 속일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는 아직 너무 젊었다.
‘뭔가 내게 감추는 것이 있구나.’
하지만 그를 압박하지 않았다. 처음 본 나를 믿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상대가 뭔가를 감추려 들 때, 몰아붙여봤자 듣게 되는 건 거짓말이나 핑계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대처해야 한다.
“오늘은 이만 쉽시다.”
* * *
석형이 나를 객방으로 안내했다.
좋은 음식과 술이 나왔다. 나는 일일이 은침으로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확인한 후,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방에서 풍신사보 수련을 했다. 좁으면 좁은 대로, 넓으면 넓은 대로. 방에서 하는 수련은 앞서 아버지와 객잔에서 나눴던 비무의 연장선이었기에 큰 효과가 있었다.
구화마공을 전수받기 전에 반드시 대성을 이루겠다는 목표가 생긴 이상, 내 수련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 *
달이 휘영청 떴을 때, 나는 추생을 보러 갔다.
그는 밤이 늦었음에도 잠들지 못하고 자기 방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잘 쉬셨소?”
“나는 잘 쉬었지만, 추 문주는 한숨도 못 잔 것 같소.”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소.”
과연 추생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잠을 못 자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법이오.”
“자고 싶어도 잠이 오지 않는 걸 어쩌겠소?”
“하루라도 제대로 자보시오. 내가 도와드릴까?”
“어떻게 말이오? 수혈이라도 짚으실 거요?”
“본교의 마의에게 배운 잠이 안 올 때 잠드는 비법이 있소.”
마의에게 배웠다는 말에 추생은 솔깃한 눈치였다.
“자, 밑져야 본전이니 이리 침상에 누워보시오.”
“이거 대장부가 쑥스럽게.”
말과는 달리 추생은 잠 못 자는 고통이 너무 힘들었는지 새색시처럼 순순히 침상에 누웠다.
“내 말대로 해보시오. 우선 얼굴 근육을 편안하게 하시오. 다음으로 어깨와 팔에 힘을 빼시오. 좀 더 편안하게. 자, 이번에는 허벅지와 다리 전체의 힘을 빼시오. 그리고 따스한 볕이 비치는 모래사장에 누워 있다고 상상해 보시오. 자, 그런 다음 단전에서 한 줄기 기를 일으켜 천천히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시오. 수분혈에서 중완혈로, 중정에서 옥당혈로 천천히 움직이세요. 그리고 다시…….”
* * *
추생이 눈을 떴을 때, 아침이었다.
침상에서 깨어난 그는 어리둥절했다. 요즘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는데, 지끈거리던 두통은 사라졌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푹 잤다.
“아! 그 비법!”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마교 남자가 알려준 비법대로 하던 중에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던 모양이다.
침상에서 내려온 추생이 서둘러 방을 나섰다.
검무극은 어제 처음 만났던 대청에서 벽에 난 흔적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셨소?”
“덕분에 잘 잤소. 얼마 만에 이렇게 푹 잤는지 모르겠소.”
“추 문주는 정파에 어울리는 사람 같소.”
“갑자기 무슨 말이오?”
“추 문주가 잠을 자지 못한 이유는 수하들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나는 그자에게 화가 났을 뿐이오. 분해서 내 성질을 못 이겨서 잠 못 들었던 것뿐이오.”
정파로 취급받는 것이 싫은 추생이었다. 이건 그의 아버지 영향이 컸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착하면 당한다고 가르쳤다.
“내가 그런 어설픈 마음으로 내가 지금까지 이 강호를 버틸 수 있었겠소? 어림없는 소리요. 괜한 말로 사람 열받게 하지 마시오.”
“알겠소.”
너무 순순히 알겠다고 하자 그건 또 그거대로 화가 나는 추생이었다. 잘 자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러 왔다가 괜히 언성만 높이고 있었다.
그때 검무극이 몸을 돌려 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이 구멍.”
“아, 내가 화가 나서 몇 군데 뚫었소. 지금도 하나 더 뚫기 직전이오.”
“그거 말고 이것 말이오.”
검무극이 가리킨 곳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그자가 날린 지풍으로 뚫린 구멍이오?”
추생의 표정이 굳어졌다.
“맞소. 내 수하를 뚫고 나가 그 벽까지 뚫었지. 일부러 여긴 막지 말라고 했소. 두고두고 보면서 그날 일을 되새기게.”
구멍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표정이 심각했다.
“왜 그러시오?”
“꼭 진짜 혈앙지 같아서 그렇소.”
“혹시 극악소마의 무공을 말하는 거요?”
“그렇소. 나는 그의 무공을 본 적이 있소.”
그러자 추생은 흥분했다.
“거 보시오, 내 말이 맞지 않소? 진짜 극악소마라고!”
“극악소마는 아니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진짜 혈앙지라고 하지 않았소?”
“그만큼 수법이 고절하다는 의미였소. 극악소마 짓이 아니오.”
“당신은 극악소마를 너무 믿는 것 같소.”
“믿소.”
“이래서 당신을 더 못 믿겠소. 극악소마를 이렇게나 믿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믿겠소?”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지만, 이번만큼은 나를 믿으시오.”
추생은 검무극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마교에서 왔다면서 마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인 특유의 그 거칠고 잔혹하고 사이한 느낌이 없다. 오히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자꾸 믿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이 사람이 악인이면, 정말 대악인이 될 거다.’
추생은 그런 생각을 감추고 검무극에게 물었다.
“한데 내가 이렇게 의심할 것을 알면서 왜 말해준 거요?”
“알려줘야지요. 힘을 합치기로 했으면서 속내를 감추고 행동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소. 그럴 거면 애초에 손을 잡지 말았어야지.”
감추는 것이 있는 추생의 마음을 쿡 하고 찌르는 말이었다.
“오늘도 잠 안 오면 내가 알려준 방법을 쓰시오. 얼굴이 한결 낫소.”
* * *
다음 날 아침에도 추생이 나를 찾아왔다.
“어제도 잠을 잘 잤소. 어쩌면 당신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소. 잠을 잘 잘 수록 죽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자꾸 드는 걸 보니.”
“추 문주가 지켜야 할 다른 문도들을 생각하시오. 어쩌겠소? 산 사람은 살아서 나아가야지.”
뻔한 위로였지만 그게 또 위로가 되었는지 조금 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편한 것 있으면 말씀하시오.”
“그러겠소.”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추생은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요? 이렇게 있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보이는데.”
“당신이 진실을 말해줄 때까지 있을 거요.”
“!”
순간 움찔한 추생이 날 향해 돌아섰다.
“잠을 잘 자서 머리가 맑아지니, 당신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소. 저 사람이 내 옆에 있는 이유가 있겠구나, 저렇게 비범한 사람이 그냥 있지는 않을 텐데.”
나는 그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맞소. 당신이 내게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무렵만 해도 그는 내 말에 딱 잡아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추생은 그러지 않았다.
“그럼 왜 강요하지 않소? 당신 무공이라면 억지로 고문해서라도 알아낼 수 있을 텐데.”
“당신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하겠소. 내 마도는 세상의 절대악을 없애는 마도요. 내 마도는 탁자를 부수지 않고, 내 마도는 악인이 아닌 사람은 고문하지 않소.”
“정말 이상한 말이군.”
하지만 표정은 말과 달랐다.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저들이 당신을 선택한 이유가 지금 당신이 숨기고 있는 그 어떤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당신은 결국 그것 때문에 저들에게 죽게 될 거요.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당신을 살려주고 싶소.”
“믿기지는 않겠지만…… 당신 말을 믿고 있소.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자꾸 믿고 싶어져서 더 망설여지오. 당신에게 속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는 절대 남의 말을 믿어선 안 된다고 하셨소. 그게 아버지 유언이셨소.”
추생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의 아버지는 무슨 대답을 해주고 있을까?
지금까지는 잘 해왔지만,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나이에 닥쳐온 이 시련은 그가 자력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아들을 위해 마음을 좀 열라고 말해주시오. 내가 반드시 당신 아들, 살려주겠소.
그런 내 마음이 닿은 것일까?
한참을 고민하던 추생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일이 터지고 나서 나는 한 가지 방법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소. 그걸 당신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고민했었소. 머리는 절대 비밀을 밝혀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내 감은 밝히라고 했소. 당신을 믿으라더군.”
“통천각 호남지단에 연락해서 당신에 대한 기록을 바꾸라고 하겠소. 감은 좋지만 명석하진 못함. 이렇게.”
추생이 웃었다. 이제 마음의 결정을 내린 웃음이었다.
“나는 한 사람에게 부탁해 볼 작정이었소.”
“그게 누구요?”
“누군지는 나도 모르오.”
추생이 목걸이 줄에 매달아 고인 간직하고 있던 것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반으로 잘린 동전이었다.
“은원전(恩怨錢)이오.”
은원전은 동전을 반으로 잘라 은인에게 주고 나중에 후대라도 그 동전을 가져오면 은혜를 갚는 일종의 징표였다.
“이 은원전의 주인이 다쳐서 사경을 헤매는 것을 아버지가 구해줬다고 하오. 이걸 내게 물려주면서 아버지는 신신당부하셨소. 나와 가문의 생사가 달린 경우에만 사용하라고.”
“이 동전의 주인이 누군지 아시오?”
추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해주지 않으셨소. 그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이 은원전은 어떻게 쓰는 거요?”
“중원에 있는 어느 황하객잔(黃河客棧)이라도 가서 주인장에게 동전을 보여주면 사람이 찾으러 온다고 했소.”
객잔을 통해 연락을 취하는 방법은 본교나 무림맹에서 쓰는 방법이었다. 아마 동전의 주인은 한때 큰 조직에 몸담은 적이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나 가져가도 되는 거요?”
“아니오. 우리 직계 가족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했소. 당신이 내 것을 뺏을까 걱정해서 하는 말 아니오. 정말 그렇다고 말씀해주셨소.”
“믿소.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저들이 당신을 죽이고 은원전을 뺏어갔겠지.”
“정말 당신은 이것 때문에 놈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시는 거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예감이 그렇소.”
만약 내 예상대로 놈들이 노린 것이 이것이었다면, 그들은 이 동전의 주인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대체 누구이기에.
“일이 터졌을 때, 왜 바로 사용하지 않았소?”
추생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했었소. 정말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소. 나는 두려웠소. 이걸 쓰면 또 그자와 엮이게 될까 두려웠소. 복수에 실패하고 놈이 우릴 찾아와 멸문시킬까 봐 두려웠소. 차라리 그냥 이대로 다 지나가 버렸으면 했소.”
추생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그런 나의 비겁함을 꾸짖으러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라 생각하오. 당신에게 나와 본문의 운명을 걸어보겠소.”
* * *
나흘 후.
우린 호남의 한 황하객잔에 앉아 있었다. 주인장에게 동전을 보여주자 이곳에서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우리는 무작정 기다렸다.
추생은 누가 왔다가 그냥 갈까 두려웠는지 하루 종일 객잔에 앉아 있었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서 풍신사보를 수련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추생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게 천마신교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각지의 유명한 무인들이나 문파, 낭인에 관한 이야기도 해줬고 중원 곳곳의 절경과 맛있는 요리에 대해서는 말해주었다. 사냥과 야영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내 해박한 지식에 그는 감탄했다. 그가 뭘 물어도 나는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추생이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 젊은 사람이 어떻게? 당신 혹시…… 반로환동한 것 아니오?”
“그럴 기회가 있어도 그러지 않을 거요. 난 내 사람들하고 같이 늙어가다 죽을 거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오. 당신 같은 사람 주위에는 누가 있는지, 그 사람들이 보고 싶소.”
“보면 후회할 거요.”
“왜 그렇소?”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혈천도마에게 피멍이 들 정도로 옆구리를 쿡쿡 찔려 봐야 저런 말을 안 하지.
그렇게 그곳에서 기다린 지 십 일째 되던 날, 드디어 한 사람이 우릴 찾아왔다.
그를 보는 순간 추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생 뿐만 아니라 나도 놀랐다.
백색 가면을 쓴 남자가 우릴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