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68)
절대회귀-168화(168/424)
제168회 평범하지 않기에 분노하지 않는다.
“잊고 있었어요!”
서대룡이 소리쳤다. 그는 정말 사부가 준 계략 주머니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 이걸 잊고 있을 수가 있죠?”
“그래서 어르신께서 자네에게 안 주고 내게 준 거겠지?”
“아! 살았습니다. 드디어 살았어요!”
“과연 그럴까? 원래라면 그냥 무난하게 지고 말 것을, 이 주머니를 여는 바람에 무리하다가 죽을 수도 있잖아?”
서대룡이 흠칫 놀랐다.
“지금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서 김빠지게 하는 제 전술을 쓰신 겁니까?”
“아니. 이번에는 정말 있을 법한 가능성을 말한 거다. 그래도 열어볼 거야?”
“봐야죠. 승패를 떠나 사부님이 처음으로 절 위해 남겨주신 계략인데. 봐야죠.”
내가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 종이가 둥글게 말려서 들어 있었다.
그걸 서대룡에게 건넸다. 서대룡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그것을 천천히 펼쳐 읽었다.
내용을 확인한 서대룡이 깜짝 놀랐다. 서대룡은 미처 그것을 다 읽지도 않고 덜덜 떨면서 내게 다시 건넸다.
“이, 이것 보, 보세요!”
그곳에는 하나의 도법 구결이 적혀 있었다.
혈천도마의 독문도법인 멸천마도식(滅天魔刀式) 제 일식의 구결이 적혀 있었다. 전체 구결이 아니라 제일식의 구결만 적혀 있었다.
[……멸천마도식의 아홉 개 도식 중 첫 번째 도식이지만 후기지수들의 싸움에는 큰 도움이 될 거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이공자가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면 될 것이고, 내 무공임을 감추는 법 또한 이공자가 알려줄 것이다.]서대룡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왜 그래?”
“멸천마도식은 정식 후계자에게만 전수하는 무공이라고요.”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각주님은 왜 안 놀라세요?”
“내가 왜 놀라야 하는데?”
“저를 그냥 제자가 아니라 어르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계신다는 거잖아요.”
서대룡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그를 만난 이래 가장 떨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잖아?”
“당연하다고요? 사부님이 저를 차기 혈천도마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당연하다고요?”
“어르신 제자 중에 자네 말고 마존이 될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나?”
서대룡은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사실 혈천도마가 서대룡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나도 이번에 알았다. 예상은 했지만 결정이 내 생각보다 빠르다. 그만큼 서대룡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다.
“한데 이 중요한 무공을 이렇게 쪽지에 적어서 전수하신다고요?”
“그래서 내게 준 거잖아. 나는 잃어버릴 일이 없을 테니까.”
일부이긴 하지만 독문무공 구결을 내게도 알려준 셈이다. 혈천도마가 나를 얼마나 많이 믿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아아아!”
서대룡은 감격한 나머지 이리저리 왔다 갔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내가 종이의 마지막 부분을 보여주었다.
“이 부분도 읽었어?”
“어떤 부분요?”
구결 마지막에 따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지면 내 손에 죽는다.]“헉!”
순간 서대룡이 화들짝 놀랐다.
반대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혈천도마 성격에 이런 말을 안 남겼을 리가 없지.
“아! 꾹꾹 눌러 쓰셨는지 이 글씨가 유독 더 진해 보여요. 설마 진다고… 정말 죽이지는 않겠죠?”
그를 놀려먹을 이 좋은 기회를 내가 놓칠 리 없다.
“과연 그럴까? 자신의 무공으로 후기지수와 싸우다가, 졌다? 그 꼬장꼬장한 자존심에 그냥 있을까?”
“아, 정말 절 죽이실지도 몰라요.”
서대룡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설령 날 봐서 살려주더라도, 한동안 지옥 수련이겠지.”
“평생 지옥 수련일 겁니다. 각주님! 저 반드시 이겨야 해요! 이기게 해주세요!”
“흥분하지 마. 이러다 실수로 진 소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면 무림맹주가 자넬 죽일 거야. 그 경우는 진짜 죽어.”
이미 자신과 서대룡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절대 진소저를 다치게 해선 안 된다. 이렇게 결승 비무까지 가게 해준 것은 천명회를 없애려는 공통의 목적 때문이니까.
“각주님! 진 소저를 안 다치게 하면서 이기게 해주십시오! 꼭 멸천마도식 제 일식을 사용해서 이기되 그 누구도 사부님의 무공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해주십시오.”
“이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는 알고 부탁하는 거지?”
“각주님이 아니라면 이런 부탁 안 할 겁니다.”
결승전까지 남은 시간은 오 일.
다행히 제일식은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아 보였고, 똑똑한 서대룡이라면 한 번 해볼 만했다. 어차피 대성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초식의 현묘함을 이용해서 진하령을 이기는 게 목표였으니까. 딱 한 수면 된다.
“오른팔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가자!”
우린 그길로 산속 수련장으로 올라갔다. 진하령도, 맹주도, 천명회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이것이 천명회에게 의심을 사지 않는 길이라 생각했다. 결승전을 앞두고 수련하러 사라지는 사람들이 어떤 음모를 꾸밀 거라 상상이나 하겠는가? 정말 촌에서 올라온 우직한 무인들이라 생각할 것이다.
우린 순수하게 비무대회에 열중했고, 난 그것이 오히려 천명회에게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여겼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결승전 전날이 되었다.
결전전야의 무림맹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주위는 중원 각지에서 올라온 수많은 무인으로 북적였다. 무인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올라온 장사치들도 많았고, 자기 문파의 무공을 알리기 위해 길거리에서 무공시범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사기꾼들은 무림 초출을 속이려 덤벼들었고, 전낭을 노리는 도둑들도 많았다.
무림맹에서는 청룡단을 비롯한 여러 정예조직의 무인들을 풀어서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단속했다.
그 북새통 속에서 진하령이 삿갓을 눌러쓴 채 객잔에 들어섰다. 객잔 주인에게 검연에 관해 묻자 그의 주인과 함께 며칠째 들어오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 어딜 간 걸까?’
결승전을 치르기 전에 검연을 보고 싶었다. 그와 이런 농담을 하고 싶었다. 당신 도련님 봐줄까, 말까. 이 농담을 그와 꼭 하고 싶었는데.
만약 검연이 봐달라고 사정하면 자기 마음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으로선 봐줄 마음이 전혀 없는데, 혹시 조금이라도 흔들릴까?
아쉬운 마음으로 그녀가 객잔을 나섰다. 이렇게 된 이상 농담을 이렇게 바꾸는 수밖에 없다. 우승한 후,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지.
미리 와서 봐달라고 했으면 봐줬을 텐데. 친구, 대체 어딜 갔던 거야?
* * *
드디어 결승전 날이 밝았다.
수많은 군중이 모였고 결승전답게 중요 인사들도 모두 자리했다.
우선 이번 대회를 개최한 무림맹주를 비롯해서 무림맹 조직의 수장들과 중원 각지에서 온 무림명숙들이 자리를 채웠다.
이번 대회의 화제는 단연 서대룡이었다. 과연 작은 문파 출신의 그가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을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특히 상대가 무림맹주의 손녀인 진하령이었기에 그녀를 이기는 순간, 서대룡은 그야말로 영웅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우승을 점치는 사람보다 진하령의 우승을 점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심판의 소개에 서대룡이 먼저 비무대에 올랐다.
다른 비무 때와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그는 지난 닷새 동안 하얗게 불태웠다. 살면서 뭔가를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져도 후회 없다. 아, 아니다. 지면 안 된다. 평생 지옥 훈련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으니까.
사방에서 그를 연호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서대룡은 잠시 눈을 감고 이 순간을 즐겼다. 인생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었다. 이번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황천각 조사관으로 평생을 천마신교에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소룡전의 결승비무,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순간.
서대룡이 비무대 아래에 있는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팔짱을 낀 채 비무대를 올려보고 있던 검무극이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룡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시합 전 두 사람의 교감은 그걸로 충분했다.
심판이 이번에는 진하령을 소개했다. 서대룡에게 날아들었던 것보다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비무대에 선 그녀의 시선이 서대룡 너머 검무극을 향했다.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서대룡과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 검무극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시종도, 친구도 아닌 다른 사람처럼.
“자, 지금부터 결승비무를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의 외침에 천지를 진동할 함성과 함께 비무가 시작되었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서대룡이었다. 그의 도가 빠르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이길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오직 그 한 번을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 기회를 만들 때까지 절대 먼저 당하면 안 된다.
서대룡이 거칠게 몰아붙였지만, 진하령은 여유롭게 공격을 막았다. 확실히 무공실력은 진하령이 한 수 위.
그나마 다행은 이번에 늘어난 내공 덕분에 힘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빙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비무는 점차 진하령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서대룡의 공격은 점점 느려졌지만, 진하령의 검은 갈수록 빨라졌다. 서대룡은 사력을 다해야만 그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정도 버티는 것도 서대룡의 노력과 자질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이 명백한 실력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점차 밀리는 모습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이제 곧 비무가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무림맹주 역시 여유로운 마음으로 손녀의 비무를 지켜보았다.
서대룡이 비무대 끝까지 밀리던 바로 그때.
그 순간이 찾아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 그녀의 발 위치, 검의 위치, 자신의 발과 몸, 검과 도가 정확히 기다렸던 그 위치에 오던 바로 그 순간.
서대룡은 이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쇄애애애액!
서대룡의 도가 변초를 만들어내며 변형된 멸천마도식 제일식이 발휘되었다.
비무를 시작한 이후 처음 쓴 변초였고, 그것은 그녀의 허를 제대로 찌르는 한 수였다.
놀란 그녀가 검을 휘둘러 막았지만, 그 역시 연습에 있었다.
서대룡의 도가 기이한 각도로 틀어지며 그녀의 검을 연속해서 두들기며 검을 쥔 손가락을 베려고 날아들었다.
지켜보던 무림맹주가 벌떡 일어나던 그 순간!
따아앙!
진하령의 손아귀를 벗어나 허공으로 날아오른 검이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더니 쨍 소리를 내고 바닥에 떨어졌다. 버티면 손가락이 잘릴 상황이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검을 포기한 것이다.
어느새 서대룡의 도가 진하령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진하령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검을 날려버린 마지막 초식은 자신이 어떻게 대처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절묘했다.
정말이지 내뱉고 싶지 않은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졌어요.”
그 순간 심판이 서대룡의 승리를 선언했다.
“소룡전 우승은 감숙 서도파의 서룡!”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서대룡이 아이처럼 비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와서 검무극에게 안겼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서대룡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음 보는 그의 눈물이었다. 참 잘 안 울 것 같은 서대룡이었는데, 그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비록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이기지 못했겠지만, 서대룡은 정말 노력을 많이 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서대룡이었기에 검무극의 가르침이 통한 것이기도 했다.
검무극이 그를 꼭 안아주며 나직이 속삭였다.
“수고했다.”
황천각의 조사관에서 혈천도마의 제자가 되고, 이제 무림맹의 후기지수를 뽑는 대회에서 무림맹주의 손녀를 꺾고 우승을 한 것이다. 기쁨은 우승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제 진짜 무인의 길로 들어선 것 같은 이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그만 울고 비무대 위로 올라가거라.”
“네.”
눈물을 훔친 서대룡이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때 검무극은 하나의 시선을 느꼈다. 저 멀리서 무림맹주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지간한 고수는 절대 전음을 보낼 수 없는 거리였지만, 검무극의 전음은 맹주에게 똑똑히 전해졌다.
―죄송합니다. 함께 온 친구가 워낙 진심이어서 제가 수련을 도왔습니다.
―마지막 수법은 무엇인가?
―혈천도마님의 무공입니다.
솔직한 내 말에 무림맹주는 깜짝 놀랐다.
―도마의 무공이었다고?
―네. 이 친구는 도마님의 수제자입니다.
일부러 말해주었다. 서대룡이 평범한 마인이 아닐 때, 오히려 무림맹주의 분노는 사그라들 것이다. 과연 무림맹주는 이번 결과를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때론 패배가 승리보다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패배를 모르던 손녀에게 어쩌면 이 패배가 더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든 모양이다.
―맹주님의 크나크신 아량에 감복할 뿐입니다.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비무대를 향했다.
그리고 또 다른 순간이 찾아왔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서대룡 너머 저 건너편에서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서대룡이 이길 때마다 와서 축하해주던 그 여인이었다.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그녀의 눈빛과 표정이 차가울 정도로 무덤덤한 것을. 항상 수줍게 웃는 얼굴만 봐서 그 표정은 너무 낯설었다.
그녀가 얼굴을 푸는 연습을 했다. 웃고 찡그리고, 다시 웃고. 그러더니 비무대 위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며 서대룡을 불렀다.
서대룡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 검무극이 보았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멀리서도 그녀의 이 상반된 표정 변화를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신안술 덕분이었다.
‘천명회다!’
이들은 진작부터 작업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서대룡뿐만 아니라 본선에 진출했던 다른 무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여자로, 친구가 필요한 사람에겐 친구로, 돈이 필요한 사람에겐 돈으로. 과연 천명회는 보통 조직이 아니었다.
어쨌든 드디어 천명회의 꼬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검무극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그는 천명회 여인에게 손을 흔들며 활짝 웃고 있었다.
‘아아, 대룡아. 어쩌냐?’
여인이 본색을 드러낼 때까지 서대룡에게는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언행이 자연스러울 테니까.
미안해, 서 조사관, 자네가 진심으로 좋아하면 할수록 놈들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 거야. 어쩔 수 없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