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74)
절대회귀-174화(174/424)
제174회 우리에겐 안 통할 겁니다.
조이백이 무림맹 인근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올라섰을 때, 무림맹주는 뒷짐을 진 채 절벽 끝에 서 있었다.
“맹주님.”
“조 장주, 오셨소? 이리 오시오.”
조이백이 무림맹주와 나란히 섰다. 높은 만큼 경치도 좋은 곳이었다.
“풍광이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자주 오는 곳이오.”
“이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다 맹주님 덕분입니다. 맹주님이 든든하게 강호를 받쳐주시니, 마교 무리들이 준동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씀해주시니 고맙소이다.”
무림맹주가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조이백은 내심 혼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리라 기대했다. 게다가 무림맹이 아닌 산 정상에서 보자고 했기에, 이목이 없는 곳에서 부모로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줄 알았다.
“조 장주.”
“네, 맹주님.”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얼마나 됐소?”
“거의 삼십 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세월유수라더니 벌써 그렇게나 되었구려.”
두 사람은 잠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며 그렇게 서 있었다.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아드님 문제로 뵙자고 했소.”
역시. 예상대로 혼사 문제로 불렀구나 싶어서 조이백의 표정이 밝아졌다. 무림맹에 막대한 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했음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일이 잘 안 풀리나 했는데.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돈 아니겠소? 맹주.’
진패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조이백을 쳐다보았다.
“혹시 천명회라고 들어보셨소?”
허를 찌르는 가슴 철렁한 질문이었음에도 조이백은 태연히 대답했다.
“처음 들어본 곳입니다.”
오히려 어떤 곳이냐고 차분히 되묻기까지 했다.
“신비 문파를 자처하는 곳으로 여러 나쁜 일에 개입된 거로 알고 있소.”
“무림에는 별의별 쓰레기 같은 놈들이 많습니다.”
“조 장주.”
“네, 맹주님.”
“그 쓰레기에 아드님이 개입된 것 같소.”
조심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진패천의 눈빛은 조이백을 꿰뚫어 보는 것같이 날카로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조 공자가 천명회에 포섭되었다는 말이오.”
조이백은 깜짝 놀랐다. 진짜 놀란 건지, 놀라는 척을 한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대 아들 조신이 천명회라는 조직에 포섭되어 내 손녀를 납치하려 했소.”
놀람이 커지면서 조이백의 언성도 높아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혼사가 진행 중인데 그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뭔가 오해가 있을 겁니다.”
“나도 그러기를 바라오만, 현재 명백한 증거가 있소.”
“어떤 증거입니까?”
“조 공자 명령을 받은 자의 자백이 있었소.”
“아들놈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자백일 수도 있습니다.”
진패천은 말없이 뒷짐을 진 채 저 멀리 깎아지듯 솟아오른 돌산을 쳐다보았다. 지금 두 사람의 마음은 저 날카로운 돌산보다 훨씬 날카롭게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맹주님, 제 아들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제가 만나보고 어찌 된 일인지 듣겠습니다.”
“맹칙상 그럴 수는 없소.”
“저와의 지난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이러실 수는 없으십니다.”
“맞소. 지난 인연을 생각해서 이럴 수 없지.”
진패천의 차갑고도 엄중한 눈빛이 조이백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대가 천명회 사람인 것을 알고 있소.”
“!”
“발뺌할 생각은 마시오.”
진패천이 기도를 개방했다. 서릿발 같은 기세가 조이백을 엄습했다. 망망대해 거친 폭풍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기세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널 죽일 수도 있다는, 너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조이백은 이를 악물고 기세에 맞섰지만 위태로운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절벽 아래로 떠밀려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를 찢어발겨 버릴 것 같았던 폭풍은 이내 천천히 잦아들었다. 조이백은 망망대해의 작은 섬에 올라설 수 있었다.
“나는 장주와의 오랜 인연을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소. 이번 일은 나와 내 수하 한 사람만 알고 있소.”
검무극이 말한 대로 진패천은 조이백의 숨통을 열어주고 있었다.
천명회의 수뇌부가 아니냐고 압박하지 않고 그냥 천명회 사람이라 칭한 것도 그렇고, 자신과 수하 한 사람만 안다고 한 것은 잘 협조하면 덮어줄 수도 있다는 암시였다.
조이백이 맹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해하네. 거느린 사람이 많으면 원치 않는 길도 걷게 되는 법이지.”
“맹주님의 하해와 같은 아량에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심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까지 흘리겠나 싶을 정도로 눈물은 줄줄 흘러내렸다.
그를 내려다보는 진패천의 표정은 씁쓸할 뿐이었다. 삼십 년을 알고 지냈음에도 배신의 길을 선택한 그였다. 상대의 잘못인가? 아니면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든 자신의 잘못인가?
“천명회주만 넘기시오. 그럼 다 지난 일들이 될 거요.”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를 용서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조이백은 그 열어준 숨통으로 올라와서 숨을 쉬었다.
“그자는 저 모르게 제 아들까지 포섭했습니다. 그 사실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일 천명회주와 회합을 가질 테니, 그 자리에 아들을 데려와 주십시오.”
“내일이라고 했소?”
“천명회주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단 하루 만에 올 수 있는 거리에 천명회주가 있었다는 말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잘 생각하셨소.”
“그럼 자리를 만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맹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돌아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뜨거움도, 차가움도 담기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아서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임은 확실했다.
그가 사라지고 잠시 후, 그곳에 검무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렇게 감시 없이 돌려보내도 되나?”
“괜찮을 겁니다.”
검무극은 그냥 풀어둬서 오히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한 번에 다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가 배신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아들을 데려와 달라는 것은 천명회주와 아들을 맞교환하자는 건데. 맹주님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천명회주를 잡은 후 내 마음이 변하는 것을 의심하고 있다?”
“그 정도 의심이면 다행인데, 아예 천명회주와 손잡고 이판사판 함정을 팔 수도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반반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후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조이백이 배신을 해도 위험하고, 하지 않아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누군지도 모를 천명회주를 잡는 일이었으니까.
“정말 혼자서 처리하겠다는 말인가?”
“만에 하나라도 저들이 딴마음을 품는다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귀하신 분이 단독으로 나설 일이 아니지요.”
“자넨 위험하지 않고?”
“원래부터 제 일이었으니까요.”
진패천은 잠시 검무극을 응시했다. 정말 놀랍게도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검무극이 정파의 무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저자의 배신에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저자는 원래 악인이었습니다. 자신을 숨긴 채 맹주님 옆에 있었을 뿐이지요. 이쪽은 선의였고, 저쪽은 악의였을 뿐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위로까지 하고 있다. 진패천은 이런 검무극과 한잔하고 싶었다.
“나와 한잔하겠나?”
맹주와는 좋은 인연을 맺고 떠나려던 검무극이었다. 그와 단둘이 하는 술자리를 마다할 리 없었다.
“여기서 드시지요. 제가 사 오겠습니다.”
“기다리겠네.”
“혹시 좋아하시는 술이 있으십니까?”
“독한 술로 사 오게.”
검무극은 순식간에 그곳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진패천은 깜짝 놀랐다. 다시 돌아온 검무극의 손에 술병이 들려 있었는데 아무리 경공이 특출나도 벌써 내려갔다 올 시간이 아니었다.
“산에 술을 묻어 두었나?”
“간만의 술이라 주충이 요동을 쳐서, 발걸음이 좀 빨랐습니다.”
일전에 동호에서 돌아올 때, 굳이 경공으로 따라잡아 맹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오늘 일부러 늦게 오진 않았다.
“좋은 잔도 사 왔습니다.”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스르르륵.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검무극 주위에 항상 은신하고 있던 무인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술을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그가 은침으로 술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했다.
날카롭고 각진 사람일 줄 알았는데, 동글동글 포근한 인상의 남자였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무림맹주가 가장 믿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란 것을. 아버지에게 휘가 있다면, 맹주에게는 이 사내가 있는 것이다.
이 충성스러운 수하는 그간 내 주위에 머물며 내가 술에 독을 탈 사람이 아님을 알았음에도, 맹주의 안위만큼은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았다.
술에 독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가 다시 모습을 감췄다.
“인사라도 하고 가시지.”
내가 농담 반, 진담 반 아쉬움을 표하자 진패천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니 자네가 이해하게.”
“제가 잘 알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한때 제 호위였거든요.”
“왜 지금은 호위가 아닌가?”
“남의 인생 그만 따라다니고, 자기 인생을 살아보라고 억지로 밀어냈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진패천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전혀 마인같지 않은 성격이었기에 욕심이 나면서도 동시에 묘한 두려움도 느꼈다. 이자가 천마가 된다면? 에서 시작하는 두려움이었다.
서로의 잔을 다 채운 후, 두 사람이 건배한 후 술을 마셨다.
“약주 좋아하십니까?”
“자주 마시지 않는다네. 자넨?”
“저도 가끔 마십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니 취마가 생각났다. 여전히 술에 취해 그 호수를 헤엄쳐 다니고 있으려나?
어떤 의미에선 결전전야의 위태로운 상황이었음에도 맹주와의 술자리는 차분했으며 평화로웠다.
인생을 바꿀 큰일은 갑자기 준비해서 치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살아온 지난날이 치러내는 것임을 두 사람 모두 잘 알았기 때문이리라.
“자네 아버지는 잘 계신가?”
무림맹주가 천마에 대해 물었다.
“잘 계십니다.”
“자넬 보니, 검 교주가 보고 싶군. 본지도 꽤 오래되었고.”
“돌아가면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버지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럴 리가. 자네 아버지는 날 죽이고 싶어 할 거네.”
“맹주님은 어떠십니까?”
“나도 지금까지는 그랬는데…….”
잠시 사이를 두고 진패천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자넬 보고 마음이 바뀌었네.”
당대 천마가 죽으면 이 검무극이 천마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정도무림을 위해서라면 지금이 낫지 않을까? 놀랍게도 이 젊은 청년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사이는 어떤가?”
“서먹했었는데 최근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군.”
“아버지와 바둑을 두면서 더 좋아졌죠. 아버지께선 본교 총군사에게 바둑을 배워서 매번 저를 이기신답니다. 반면 제가 얻은 군사는 바둑을 둘 줄 모르고요.”
“군사가 바둑을 못 둔다고?”
“역시! 같은 반응이군요. 제 군사에게 꼭 전하겠습니다. 무림맹주님까지 같은 반응이었다!”
검무극의 너스레에 맹주가 웃었다.
“아버지와 산에 사냥도 다녀왔었습니다. 객잔에서 술도 마셔봤고요. 아버지가 객잔에 오시니 그 주인장 반응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검무극은 일부러 아버지와 지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되도록 유쾌하게 전했고, 진패천은 미소를 지으며 검무극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검무극은 무림맹주의 저 미소 속에 깃든 슬픔을 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다. 그게 어떤 심정일지 감히 짐작조차 못 하겠지만, 지금 자기 아들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검무극은 마음의 상처는 묻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드님 생각 많이 나십니까?”
순간 무림맹주가 움찔했다.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분노와 당혹스러움, 그리고 슬픔과 그리움. 온갖 종류의 감정이 짧은 시간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끔.”
진패천은 더는 말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검무극도 더는 묻지 않고 술을 마셨다.
아들이 죽고 이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거라 생각된다. 감히 누가 무림맹주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는가?
“내일은 함께 가세.”
“아뇨, 저 혼자 가겠습니다.”
“자네가 견줄 사람이 없는 고수임은 나도 알고 있네. 하나 혼자 가면 위험해.”
“무림맹 고수를 동원하면 그들 중 천명회와 관련된 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기밀이 누설되어 천명회주가 달아나 버리면 아마 두 번 다시 그를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럼 나와 둘이서 가세.”
진패천이 진심으로 한 말임을 알았다. 검무극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세상에 어떤 무림맹주가 죽음의 위험이 있을지도 모를 곳으로, 그것도 마교주의 핏줄과 단둘이 가자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진패천이 건재한 이상, 정파무림 역시 건재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맹주님은 하셔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무슨 일 말인가?”
“진룡장주가 배신했을 경우를 대비하셔야지요. 그는 평생 일군 모든 것이 다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맹주님이 용서해 주신다고 했지만, 과연 그 말을 믿을까요? 만약 아니라면, 그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할 겁니다.”
“예를 들자면?”
“저들이 혼사를 앞세워 진 소저를 이용하려 했기에 우린 조신을 이용했습니다. 그들이 한 것보단 조금 더 과격하게 이용했죠. 그럼 저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한 가지 상황을 떠올린 진패천의 표정이 설마 하면서 굳어졌다.
“맹주님과 제가 함께 움직이는 그 시간에, 진 소저를 노릴 수도 있습니다. 자식을 이용했으니, 너도 당해 봐라란 마음이 들겠지요. 목숨을 건 선택이니, 보통이 아닌 고수가 갈 테고요. 맹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가족분들을 지키십시오.”
걱정스러운 진패천의 눈빛에 검무극이 술잔을 들었다.
“한 번쯤은 마도를 믿고 맡겨주십시오. 그 악이 아무리 지독해도, 우리에겐 안 통할 겁니다.”
진패천이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짧은 시간 동안 딱 한 병을 나눠마셨는데, 평생 마셨던 그 어떤 술자리보다 좋았고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잔을 내려놓으며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했다.
“작별 인사는 오늘 미리 드리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부디 보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