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75)
절대회귀-175화(175/424)
제175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소.
동경 속 내 모습을 응시하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속옷 하나만을 남겨 두고 전부 다 벗었다. 무공수련으로 다져진 군살 하나 없는 매끄러운 몸매.
난 흑마검의 검 손잡이에 감아둔 극품천잠사를 전부 풀어서 내 심장과 목, 단전 등 주요 급소에 정성껏 감았다. 그리고 그 위에 혈천도마가 준 귀호의를 입었다.
결전을 준비하는 내 모습을 서대룡은 침상에 걸터앉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럴 때 장난이 빠지면 섭섭했기에 서대룡에게 농담을 던졌다.
“함께 가서 싸우겠습니다, 안 해?”
“안 할 겁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은 이미 끝났습니다. 소룡전 우승! 평생을 두고두고 사골처럼 우려먹으며 자랑하고 살 겁니다. 더 이상 제 인생에서 위험은 없습니다.”
나는 가볍고 편한 무복을 입으며 그에게 말했다.
“경지가 더 오르면 마음이 바뀔 거야! 생사가 오가는 위험 속으로 스스로 몸을 던지겠지. 거기서 희열을 얻고, 더 큰 위험을 찾아 나설 거다.”
“그런 이상한 예언 같은 것 하지 마시라고요!”
서대룡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 모험은 끝입니다.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해줄 이야기, 이미 충분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반응해주니 장난을 안 칠 수가 없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신비조직은 신비할 때나 위험하지, 이렇게 밝혀지면 오히려 더 보잘것없는 법이다. 걱정하지 마라.”
“그런 말씀 아무리 하셔도 전 안 따라갑니다.”
“안 통하는구먼.”
나는 안다. 지금 저 서대룡이 나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얼마나 나와 함께 싸우고 싶은지. 그의 눈동자에서 불타오르는 저 열기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다려 달라고. 더 강해질 때까지.
* * *
천명회주와 조이백은 장원의 정자에 마주 앉았다.
“잘 지내셨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조이백은 천명회주를 여러 번 만났다. 천명회주는 비밀에 싸인 사람처럼 굴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찾아오기도 했고, 만나자고 하면 이렇게 자신을 부르기도 했다.
천명회주의 무공실력이야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하지만 그 무공실력을 빼고 나서의 느낌은 의외로 ‘평범하다’였다.
흑막의 수장에게 평범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는 평범했다.
객잔에서 밥을 먹다 돌아보면 옆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을 것 같은 얼굴에 차림새도 평범했다. 말투나 행동도 평범했다.
평범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 평범했기에, 오히려 비범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평범했기에 흑막으로 숨어 있을 수 있었겠구나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오늘 왜 보자고 하신 거요?”
“문제가 생겼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무림맹에서 제 아들이 본 회에 들어온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조이백이 천명회주를 응시하며 덧붙여 물었다.
“제 아들은 언제 입회시킨 겁니까?”
화를 내야 할 상황이었지만, 조이백은 차분하게 물었다.
“아드님도 입회했소?”
그러자 천명회주는 자기는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모르고 있었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정말 몰랐던 것처럼 보였지만 조이백은 믿지 않았다.
진룡장주인 자신을 포섭한 상황에서, 후계자인 아들을 포섭한 일을 몰랐다고? 만약 그런 허술한 조직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나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조이백은 뻔한 시치미를 굳이 따지지 않았다. 지금은 천명회주와 감정싸움을 하러 만난 것이 아니었으니까. 오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날이다.
“아들이 지금 뇌옥에 갇혀 있습니다. 방법을 찾아주십사 하고 회주님을 뵙자고 한 겁니다.”
“단지 본회와 관련이 있다고 뇌옥에 가둘 수는 없었을 텐데요.”
“놈들의 계략에 빠져 맹주의 손녀를 납치하려 한 혐의를 쓰고 있습니다.”
“저런! 하여튼 파렴치한 무림맹 놈들이 하는 짓이 그렇지요.”
천명회주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방법이 있겠습니까?”
“조 장주가 무림맹주와 친분이 깊지 않소?”
“맹주가 손녀를 끔찍이 아끼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친분만으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알겠소이다.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겠소.”
“감사합니다.”
바로 그때 저 멀리 문이 열렸다.
아마도 조이백이 살면서 가장 떨렸던 순간을 꼽으라면 지금 이 순간일 것이다.
당연히 무림맹주라 생각했는데, 그곳으로 들어온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다.
‘맹주가 안 왔다?’
맹주가 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자기 아들도 데려오지 않았다.
‘왜?’
그렇게나 천명회주를 원했으면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물론, 수작은 자신도 부리려 하고 있었다.
맹주가 천명회주를 처리한 후에도 아들을 풀어주지 않으려 한다거나, 자기까지 가두려 들었을 때를 대비한 한 수였다. 바로 진하령을 진짜로 납치할 고수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다. 맹주도 안 오고, 아들도 안 오고.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조이백의 시선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청년을 향했다.
귀한 신분인 만큼 맹주가 직접 오지 않고 다른 고수들을 보낼 수는 있다. 한데 저렇게 젊은 고수 하나만 보낸다고?
‘설마? 이 청년이 천명회주를 상대할 정도의 고수인가?’
그럴 리가 없다. 뭔가 맹주의 말을 전하려고 온 것이 틀림없다.
검무극이 그곳으로 걸어오는데 아무도 막아서지 않았다. 천명회주나 조이백이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검무극이 두 사람이 앉아 있던 탁자에 합석하자 천명회주가 조이백에게 물었다.
“이 소협은 누구시오?”
천명회주는 너무나 태연하고 당당하게 자신들에게로 걸어온 검무극이 당연히 조이백의 수하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이백이 모른 척 물었다.
“회주께서 데려온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저는 무림맹주께서 보낸 사람입니다.”
순간 천명회주가 흠칫 놀랐다.
주위 공기가 달라졌다. 검무극은 주위에 은신해 있던 이들이 분주히 자리를 옮기는 것을 느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저는 이만.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천명회주가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 순간.
“앉으시오, 천명회주.”
“!”
천명회주가 검무극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오셨군요.”
천명회주의 시선이 조이백을 향했다. 조이백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천명회주가 물었다.
“맹주께서 무슨 일로 소협을 보냈소?”
“여기 조 장주께서 협상을 했소. 아들과 회주를 맞바꾸기로.”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기에 조이백은 당황했다. 반면 천명회주는 당연히 그랬으리라 여겼는지 조이백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조이백이 극구 부인했다.
“믿지 마시오. 맹주가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수작이오.”
조이백은 맹주가 대체 왜 이 젊은 청년을 대신 보낸 것인지 알기 전까지는 악착같이 잡아떼야 했다.
물론, 검무극이 있는 한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조 장주를 너무 탓하진 마시오. 자식 문제니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요.”
“이해하오.”
천명회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이백은 끝까지 부인했다.
“속지 마시오. 저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마시오.”
조이백은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주가 천명회주를 통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고. 그랬기에 조이백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당신이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조이백이 은밀히 숨어 있던 수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하령 쪽 진행하라고 해. 지금 당장!
-네.
진하령을 최대한 빨리 손에 넣어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무림맹주가 이곳에 오지 않은 이유는 진하령을 지켜주라는 검무극의 조언을 받아들여서라는 것을.
검무극이 천명회주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소. 뭐부터 듣겠소?”
“어떤 일이든 기분 좋게 시작하는 것을 좋아하니 좋은 소식부터 들읍시다.”
“나 혼자 왔소.”
“정말 혼자 왔소?”
천명회주는 깜짝 놀랐다. 밖에 무림맹의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럼 나쁜 소식은 뭐요?”
“나 혼자 왔소.”
검무극이 앞서 했던 말을 반복하자 천명회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왜 나쁜 소식이오? 좀 전에 좋은 소식이라 하지 않았소?”
“나쁜 소식이기도 하오. 아무도 나를 말릴 사람이 없기 때문이오.”
자신만만을 넘어 광오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천명회주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요즘 이런 패기 있는 젊은이들을 찾기가 쉽지 않지. 그렇지 않소, 조 장주?”
“맞습니다. 신진들뿐만 아니라 경험 많은 중진들도 다들 제 몸 사리느라 바쁘지요.”
그렇게 맞장구를 치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천명회주를 죽일 정도의 고수인가? 그래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지금이라도 무림맹주에게 붙어야 하나? 천명회주를 넘겨준 공이 있기에 어떻게든 뒷일은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갈등을 읽었는지 검무극이 조이백에게 말했다.
“조 장주, 이제 어느 쪽에 설지 확실히 밝혀야 할 것 같소.”
조이백은 정말 갈등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젊은 청년이 천명회주를 죽일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 무림맹주가 있다면 모를까, 지금 가까이 있는 사람은 천명회주였다.
“무슨 소리요? 나는 단 한 순간도 회주님을 배신한 적이 없소.”
“당신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참형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조이백은 갈등에 휩싸였다. 무림맹주가 왜 이러는지 예상하지 못했으니, 결정이 쉽지 않았다.
그때 천명회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우리 조 장주의 고민을 해결해 주겠소.”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 사람만 봐도 조이백의 마음이 기울어질 만한 사람이었다.
짧은 직도를 허리에 찬 남자는 참마도(斬魔刀) 구령(具玲)이였다. 한때 정파에서 도법의 삼대고수라 불리던 최고수였다.
천명회주에 참마도.
이 둘만 해도 마음이 확 기울어졌을 터인데, 또 다른 이들도 있었다.
커다란 철장(鐵杖)을 손에 들고 법복을 입고 나타난 승려가 있었다. 그는 서장의 절대고수로 활약하던 패승(覇僧) 요라이(堯羅利)였다.
이들 두 사람만 해도 당해낼 사람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독특한 행색의 꼽추 노인까지 등장했다.
그의 허리에 매달린 닳고 닳은 녹색 주머니가 그가 누군지를 알려주었다. 독으로 일가를 이룬 대독노(大毒老) 곡추(谷秋)였다. 그가 걸어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도 살지 못하고 영원히 죽음의 땅이 된다고 할 정도로 독을 잘 다룬다고 알려진 그였으니,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두려워했다.
하지만 정작 이곳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꾼 것은 그들 세 고수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개미굴에서 개미들이 밀려 나오듯,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복면인들이 수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주위를 그들이 가득 채웠다. 담장 아래서부터 담장 위, 마당과 지붕 위. 그 숫자가 못해도 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단지 머릿수만 채운 이들이 아니었다. 복면 위의 눈매와 기세는 사납고도 날카로웠다.
조이백은 처음 알았다. 천명회주가 이렇게 대단한 고수들을 대동하고 다니는지.
‘정말 엄청나구나. 천명회주는 붙잡고 싶어도 절대 붙잡지 못하겠구나.’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했다.
조이백이 신호를 보내자 그곳으로 네 사람이 등장했다.
그들의 복장은 각자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문양이 그려진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조이백의 수족인 사군자(四君子)들이었다.
“저 어린놈은 저희 쪽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이번 일을 용서받으려면 확실하게 받아야 하는 법. 자신 쪽 사람이 나서서 저자를 제거해야 한다.
조이백이 천명회주에게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남자 대 남자로 지난 과오는 서로 잊는 게 어떻겠소? 애초에 나 몰래 내 아들을 끌어들여서 벌어진 일이지 않소? 그냥 서로 잊읍시다.”
“좋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지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자 검무극이 말했다.
“나를 죽이고 나면 당신을 죽일 거요. 배신자를 살려둘 리 없을 테니까.”
“어린놈아! 이간질은 그만해라.”
조이백은 한번 마음 결정을 하니까 뒤돌아보지 않았다.
“너는 결코 이곳을 살아나가지 못할 거다. 너희 맹주라 해도 살아남지 못할 거다.”
“나는 솔직히 걱정되었소. 당신이 내 편을 들까 봐.”
“그게 무슨 소리지?”
“당신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내 편을 들어버리면 죽일 때 미안하지 않겠소?”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거냐? 실로 광오한 놈이구나.”
조이백이 사군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사군자가 공터로 나섰다.
검무극도 천천히 걸어가서 그들 앞에 마주 섰다.
주위를 백여 명의 복면 고수가 빈틈없이 둘러싼 데다가, 참마도와 패승, 대독노라는 절대고수, 거기에 진룡장주, 그리고 천명회주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검무극은 그 거대한 덩어리 속 천명회주를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극악소마를 사칭해서 강호인들의 생명과 재물을 약탈하고, 맹주의 손녀와의 혼사를 통해 무림맹 전복을 꾀한 죄를 물어, 천명회주와 진룡장주 외 전원, 이 자리에서 즉결처분하겠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곧이어 누군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그것을 시작으로 비웃음이 모두에게 퍼져나갔다. 이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 고수겠지.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저런 말을 하겠지.
하지만 자신들은 당장 무림맹으로 쳐들어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전력이었다. 그랬기에 다들 천지 분간 못 하는 애송이의 광오함을 즐길 뿐이었다.
웅성거림과 비웃음 소리가 커지던 바로 그 순간, 모두 조용히 하라는 듯.
우우우오오오오오!
심연에서 나는 깊은 울림으로, 흑마검이 스스로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