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9)
절대회귀-19화(19/424)
제19회 올여름 우린.
내가 마군주를 죽였다는 소식에 이안은 펄쩍 뛰었다. 어떻게 죽일 수 있었느냐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짓을 하신 겁니까?”
그녀의 말에 ‘짓’이란 단어까지 포함되었으니 정말 화가 많이 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짓이라고 말한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동생이 죽었는데 혈천도마 어르신이 그냥 있겠어요?”
“그러니까 네가 열심히 수련해서 날 못 건들게 해줘.”
“삼십 년을 폐관수련해도 못 막는다고요!”
“그럼 이기지. 늙어 죽었을 테니까.”
태평한 내 반응에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도련님이 변하신 그 시점부터…… 제 삶이 두 배는 더 힘들어졌어요.”
“하하. 그럼 살 빠지고 좋지.”
“도련님!”
이안뿐만 아니라 교내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앞서 혈천도마의 제자가 내 손에 죽었다는 소식과는 그 파급력 자체가 달랐다.
아버지의 부름에 천마전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 변화를 느꼈다.
나를 보는 눈빛들이 달라져 있었다.
많은 이가 후계자는 형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제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무에서 내가 승리했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고, 소원으로 사냥을 빌어서 화제가 되었다. 혈천도마의 제자를 죽였을 때는 나의 용기에 놀랐다.
그리고 이제 마군주를 죽였다.
이안 말로는 다들 만나면 내 이야기만 한다고 했다. 안하무인 격으로 여러 문제를 일으켰던 마군을 다들 싫어했기에 내 인기가 순식간에 치솟은 것이다.
심지어 내게 다가와서 인사하는 무인들도 있었다.
물론 ‘멋지다’라거나 ‘잘했다’라는 말을 직접 하는 이는 없었다. 혈천도마의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저 말없이 다가와서 포권하고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정도였다. 그 눈빛에서 나에 대한 지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다가와서 인사하는 이들은 내가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이었다.
나는 일일이 그들의 인사를 다 받아주며 천마전으로 향했다.
천마전에는 아버지와 총군사 사마명, 그리고 혈천도마 구천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사마명에게 먼저 인사를 올린 다음 혈천도마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잘 지내셨는가, 이공자.”
동생의 죽음이라는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혈천도마는 침착했다.
혈천도마가 일전에 나를 찾아왔을 때 보였던 그만의 괴팍하면서도 독특한 기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감히 아버지 앞에서는 그러한 기도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번 일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보고서에 모두 적었습니다.”
“이공자에게 직접 듣고 싶네.”
아버지 앞이었지만 혈천도마는 침착하게 자기 할 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나 사마명은 그 정도는 혈천도마의 권리라 여겼는지 참견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두고 보았다.
“조사를 통해 동생분의 중죄를 밝혀냈습니다. 체포하는 과정에서 저를 죽이려 하는 바람에…… 어르신께는 죄송합니다.”
“괜찮네, 동생에게 죄가 있다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한데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 동생이 비록 한심한 놈이라고 해도, 죄가 명백히 밝혀진 상황에서 이공자를 공격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는 점이네.”
순순히 잡혀간 후 형인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으리라 추측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태를 미연에 방지한 것이고.
“왜 그러셨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어린 제게 붙잡힌다는 것이 스스로 용납 안 되셨을지도요.”
잠시 나를 응시하던 혈천도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시신을 보고 왔네. 일격에 찔렀던데?”
“네.”
나는 싸움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불리한 상황에서 말이 길어지면 실수나 허점이 나오게 되는 법, 지금은 도마의 상상력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최선이다.
그는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는 이곳에서 싸움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지 못했다. 등을 찔려 죽든, 발바닥을 찔려 죽든, 죽은 놈이 하수고 병신이란 생각이 본교 마인들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으니까.
“이공자의 무공실력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출중했군.”
“아무래도 제가 아버지 덕을 본 모양입니다. 흥분한 상태였지만 마군주께서 제게 전력을 다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랬나 보군.”
혈천도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네.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네.”
“별말씀을요.”
제자가 죽고 동생까지 죽었으니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우린 철천지원수가 되었지만, 혈천도마는 아주 작은 분노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자기감정을 잘 조절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천마전을 떠나기 전 혈천도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 날 찾아왔을 때 두 번이나 내 머리통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아버지와의 관계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는데.
그렇다면 이 순간 혈천도마는 이런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교주, 내게 이러실 수 있소? 동생을 잡을 거면 날 먼저 불러서 해결했어야지요. 섭섭하외다, 정말 섭섭하외다!
하지만 혈천도마의 눈빛 어디에도 섭섭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를 향한 아버지의 눈빛 역시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장례 준비를 해야 할 테니 가서 쉬게.”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주님.”
혈천도마가 정중히 인사한 후 돌아섰다. 그는 붉은 융단을 걸어가면서 내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가 물러나자 사마명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공자가 모은 증거가 확실해서, 아무런 문제 없이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사마명 역시 이 뜻밖의 결과에 궁금한 점이 많을 텐데, 내게 묻지 않았다. 이번 사건조사를 맡긴 것이 아버지였을 테니, 결국 아버지와 나와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큰 공을 세운 이공자에게 교주님께서 상을 내리셨습니다.”
천마전 마인 하나가 기다란 목곽을 가져왔다. 조심스러운 걸음걸이에 그 안에 든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뚜껑을 열자, 안에는 검이 한 자루 들어 있었다.
그것이 흑마검임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천마검 다음으로 귀한 검을 하사하는 것이다.
“교주님께서 이공자께 흑마검을 하사하셨습니다.”
너무 기뻐서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기쁨에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주시려면 제 성정에 어울리는 고고한 백화검을 주셔야죠.”
그럴 리가 하는 표정으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네게 어울리는 검은 흑마검이다.”
“아들을 너무 모르시네요. 검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나는 천천히 흑마검을 뽑았다.
검에서 뻗쳐나간 차가운 한기가 장내를 장악했다. 아무런 내력도 주입하지 않았으니 순수하게 검에서 나온 기운이었다.
검을 딱 뽑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검이 내 검이라는, 내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검이라는 것을.
“너무 과분한 상 아닙니까?”
내 겸손에 사마명이 아버지를 대변했다.
“과하지 않습니다. 마군주 문제는 본교에서 가장 까다로운 문제였거든요.”
“그 골칫거리를 제게 떠넘긴 거군요.”
“이공자께서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할 줄은 몰랐지만요.”
사마명은 다시 한번 감탄하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교주님께서는 이렇게 될 줄 예상하셨습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까불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를 믿었기에 보냈을 것이다.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룬 것도 아셨고, 소천동에서 마정단까지 복용했으니 쉽게 당하지는 않으리란 믿음이 있으셨겠지. 물론 마군주의 죽음이라는 결과까지는 예상치 못했겠지만.
그리고 난 아버지가 왜 검을 내려주셨는지도 안다. 혈천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공을 인정하니 적어도 이번 일로는 내 아들을 건들지 마라.
무언의 경고인 셈이다. 눈치 빠른 혈천도마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할 리 없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검을 받쳐 들고 제대로 감사의 예를 올린 후에 천마전을 나왔다.
거처로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나를 불렀다.
“이공자, 볕도 좋은데 잠깐 쉬었다 가게.”
혈천도마가 화원 앞 공터에 앉아 있었다.
그래, 이 늙은이가 그냥 갈 리가 없지.
난 천천히 걸어가서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의 시선이 내 허리에 찬 흑마검을 향했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이 느껴졌다. 원한이 깊겠지만, 감히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울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혈천도마가 버럭 소리쳤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새끼가! 감히 내 동생을 기습해서 죽여? 오늘 네 놈을 오체분시(五體分屍)해서 내 동생의 무덤에 뿌려줄 테다.”
혈천도마가 뿜어낸 마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화원의 꽃들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깡마른 저 몸 어디에 이런 기운을 감추고 있었을까?
내공을 끌어올려 마기에 대항하면서도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마기가 사라졌고 혈천도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원래라면 이렇게 말했어야지?”
그는 멸천대도 손잡이 끝으로 또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파고드는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슬쩍 막으며 나도 소리쳤다.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은 빌어먹을 늙은이야! 네까짓 것들이 뭐라고 감히 본교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거냐? 그깟 부패한 동생을 위한답시고 나선다면, 깡마른 네 몸을 수수깡 부러뜨리듯 다 부러뜨려줄 테다!”
나 역시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랬다면 저도 이렇게 말했겠지요?”
잠시 어안이 벙벙하던 혈천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저 멀리 경계를 서던 마인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혈천도마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쳤다. 언제 웃었냐는 듯 무뚝뚝한 얼굴, 그야말로 그는 감정변화가 변화무쌍했다.
“그래도 내 얼굴을 봐서 좀 봐주지 그랬나?”
“어지간하면 좋게 처리했을 겁니다. 직위에서 물러나는 정도로 마무리 지으려 했죠. 한데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더군요. 아니, 선 자체가 아예 없는 상태였습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일인데 어찌 그 사정을 모르고 있었겠는가? 교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마군 내 부정을 알고 계셨죠?”
“알고 있었네.”
“왜 그냥 두셨습니까?”
“내 말을 듣지 않았네. 뭐, 알고 보면 나도 그리 깨끗한 사람은 아니고.”
나는 혈천도마가 동생과의 관계에 대해 솔직히 말해주는 것에 놀랐다.
‘이럴 때 조심해야 한다.’
혈천도마는 분명 감정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이용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안도했지. 이제 저놈이 내 앞길을 막지는 않겠구나.”
“그 심정, 저는 이해합니다.”
혈천도마가 그 작고 찢어진 눈을 크게 뜨자 ‘정말? 네가 어떻게?’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제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내 손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저도 안도할 겁니다.”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다시 그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보였다.
그가 보는 내 눈동자에는 뭐가 있을까? 당신은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소?
혈천도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말한 안도감과는 별개로, 어쨌든 형제를 죽인 원수니 나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지난 일은 저 구름에 실어 멀리 흘려보냈을 수도 있고.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팔마존 당신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내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하다면, 어차피 화무기에게 죽을 테니까. 난 당신들 정도는 사뿐히 즈려밟고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산다.
혈천도마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맨 처음 내가 건넸던 인사를 이제서야 받았다.
“그래, 올해는 덥겠구먼.”
혈천도마는 벌써 덥다며 멸천대도의 큰 날로 살랑살랑 부채질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올여름 우리가 뜨거워지는 이유가 단지 저 태양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것.
난 이마에 손 그늘을 만들며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저는 더위를 안 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