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95)
절대회귀-195화(195/424)
제195회 흑도 사내가 촌스럽게 반성이라니?
야수파 수장 구야수(具冶洙)는 수하들이 돈을 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상납받은 은자였다.
“삼백 냥입니다.”
수하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하나 가져왔다.
“병신 새끼 하나 때문에 살림 거덜 나겠네. 공패 이 새끼 지금 어딨어?”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오른팔 양(梁)이 대답했다.
“무림맹 지부에서 풀려나서 어디서 술 처마시고 있을 겁니다.”
“들어오면 당장 내게 오라고 해.”
“네.”
이 삼백 냥은 무림맹 지부장에게 가는 뇌물이었다. 평소에도 매달 돈을 받아 챙겨줬으면 이럴 때 그냥 넘어가 줘야 하는데, 공패를 풀어주는 대가로 삼백 냥이나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고 공패를 그냥 뇌옥에 처박아 둘 수도 없었다. 공패는 야수파에 꼭 필요했다. 이런 개 같은 놈이 있어야 상인들이 겁을 먹고 순순히 돈을 내는 것이다.
“그 고발했다는 년은? 튄 거 아냐?”
“제 어미가 아파서 달아나지 못할 겁니다.”
“얼굴이 반반하다고 했나? 하긴. 그랬으니 공패 놈이 발정이 났겠지. 잠잠해지면 멀리 있는 기루에 팔아버려. 그년 때문에 나간 돈 반이라도 메꿔야지.”
“알겠습니다.”
“공패 이 병신이 못 건드리게 하고.”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장도파에서 또 우리 구역을 침범했습니다.”
“이 새끼들이!”
장도파는 야수파와 경쟁하는 인근 지역의 흑도방파였다. 이권 다툼을 하게 되면 항상 그들과 충돌했다.
“놈들이 고수를 영입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어떤 고수?”
“모르겠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고수라는데, 그자를 믿고 설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야수가 코웃음을 치던 그때였다. 밖에서 수하가 달려 들어와서 다급히 보고했다.
“침입자가 있습니다.”
침입자란 말에 구야수가 당장 한 사람을 부르게 했다.
“천 무인을 불러라.”
장도파가 새 고수를 영입해도 여유롭게 코웃음을 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천이라 불리는 고수 때문이었다. 천과 관련해서 구야수만 아는 비밀이 있었다. 바로 천이 마교 출신이란 점이었다.
마교 고수, 천!
그가 있었기에 야수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
구야수와 양이 밖으로 나왔을 때, 침입자들은 연무장을 가로질러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이들을 본 구야수가 흠칫 놀랐다.
“뭐야?”
침입자는 둘이었는데 엄청난 근육질의 남자와 호리호리한 청년이었다. 여유로운 걸음이 침입보다는 방문에 가까워 보였다. 물론 그들은 검무극과 권마였다.
양이 재빨리 말했다.
“장도파에서 보낸 자들 같습니다.”
“이번에 놈들이 뽑았다던 그 고수?”
“네. 그들이 아니라면 누구겠습니까?”
구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역에서 감히 자신들을 공격할 자들은 장도파밖에 없었다.
“천 무인은?”
“곧 나올 겁니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이십여 명의 야수파들이 병장기를 뽑아 들고 두 사람을 에워쌌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구야수의 물음에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밖은 지옥을 만들고 너흰 잘해놓고 사네.”
야수파 본거지는 새로 지은 장원이었다. 특히 자신이 기거하는 건물은 비싼 자재를 아낌없이 들여서 호화롭게 지었다.
“누구냐고 물었소.”
죽이든, 꿇리든. 평소였으면 나왔을 명령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청년 옆에 있는 근육질의 남자 때문이었다. 흑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구야수는 온갖 인상 나쁜 놈들을 봤지만, 이렇게 무섭게 생긴 사람은 처음이었다.
검무극이 구야수에게 말했다.
“왜 왔느냐고 묻지 않고, 자꾸 누구냐고 묻는 이유가 뭔지 아나? 이 새끼 죽여도 되는 놈인가 아닌가, 그거부터 결정 내리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래.”
말을 마친 검무극이 성큼성큼 구야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놀란 구야수가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죽여라!”
야수파들이 검무극에게 달려들었다.
검무극은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구야수가 볼 때는 전혀 위력적이지 않아 보였다. 그냥 가볍게 퍽. 또 가볍게 퍽.
피하기도 잘 피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공격을 가볍게 피하면서 한 방씩 날렸다. 어떤 놈은 얼굴에. 또 어떤 놈은 배에.
빠르긴 했지만 위력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공격에 구야수는 내심 안도했다.
‘별것 아니다!’
정말 그런 생각이 딱 들었다. 오히려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서 있는 저 근육질 사내가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 일어나서 합공을 해! 등을 찔러!”
하지만 한 대씩 맞고 쓰러진 수하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저 병신들이!”
이해는 갔다. 일어나면 근육질 사내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자신이라도 기절한 척했을 것 같으니까.
“어휴. 내가 저런 것들을 믿고.”
그러는 사이 나섰던 이십여 명이 모두 쓰러졌다.
양이 가까이에 쓰러진 수하를 발로 차서 깨웠다. 검무극은 그가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뒈지기 싫으면 어서 일어나!”
살살 툭 맞았는데 정신을 잃어? 이건 누가 봐도 기절한 척이었다.
발로 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느낌이 이상해진 양이 쓰러진 수하를 자세히 살폈다.
양이 흠칫 놀랐다. 수하는 죽어 있었다. 그 옆에 쓰러진 수하를 살폈는데 그도 죽어 있었다. 양은 알 수 있었다. 수하들이 전부 다 죽었다는 것을.
양이 천천히 검무극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차갑고 섬뜩했다.
‘진짜 고수다!’
양은 한마디라도 입을 잘못 놀리면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무극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누군가 살아남아 복수를 한답시고 석이 가족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천이 등장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지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깎지 않은 수염 때문인지 몹시 초췌해 보였다. 처음 야수파에 들어왔을 때보다 배도 많이 나오고. 그래도 구야수는 괜찮았다. 지금껏 이 천이 해치우지 못한 적은 없었으니까.
“저 두 놈 다 없애버리시오.”
천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쓰러진 야수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파락호 놈들 실력이야 뻔한 거고.
그는 공교롭게도 동권문의 철권 출신이었다. 청권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힘든 수련을 참지 못하고 마교를 달아났다.
그 후, 야수파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지금껏 온갖 놈들이 구야수를 노렸지만 다 자기 손에 죽었다. 자신은 대가로 향락을 즐길 수 있는 충분한 돈을 받았다. 어차피 이 삼류 흑도 세상에서는 청권 정도의 실력만으로도 자신은 권마였다.
휘이익.
검무극의 머리통을 부수려고 내지른 천의 주먹이 허공에 멈췄다.
자신의 공격을 너무 가볍게 피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검무극의 다음 말이 문제였다.
“이건 청권 무공이잖아?”
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 무공을 알아본 사람은 처음이었다.
바로 그때 비로소 천의 눈에 제대로 들어오는 한 사람. 등을 돌린 채 하늘을 보고 있던 덩치 큰 남자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으아아악!”
정말 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말 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종일 자신을 괴롭혔던 숙취가 일순간 사라졌다.
천의 등을 보고 있던 구야수는 보지 못했지만, 양은 볼 수 있었다.
천의 일그러진 얼굴을. 사람의 얼굴에 이렇게 깊은 절망과 공포가 깃들 수 있을까 싶었다.
권마가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내 무공으로 흑도 놈의 주먹 노릇을 했다고?”
권마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퍼억! 꽈직!
천은 스스로 자신의 천령개를 내리쳐서 자결했다. 그는 알았다. 달아날 수도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권마에게 죽으면 훨씬 더 고통스럽게 죽게 될 것임을.
그 모습에 구야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너무 이상한 일이 벌어지니까 오히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검무극이 양을 지나쳐 걸어가며 말했다.
“따라와.”
“네!”
양은 마치 수장이 검무극인 양 공손히 그 명령을 따랐다.
검무극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구야수는 정신을 차렸다. 이제 그가 믿을 것은 하나뿐이었다.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아시오? 우릴 건들면 후환이 있을 거요.”
“뒤에 누가 있는데.”
“무림맹이 있소.”
“무림맹이 다 네 거야?”
“이곳 지부장이 내 뒤를 봐주고 있소. 나를 건들면 그가 가만있지 않을 거요.”
검무극이 양에게 말했다.
“지부장 여기로 데려올 수 있지?”
쉽지 않은 일이었는지 양이 망설였다.
“그자를 여기까지 데려오기만 하면 이제 야수파 수장은 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겠습니다.”
양이 망설이지 않고 달려 나가는 모습을 구야수는 죽일 듯 노려보았다.
“망할 새끼.”
이렇게 쉽게 배신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명색이 오른팔이었는데.
양이 나가자 검무극이 말했다.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 수장시켜준다는 것 거짓말이었으니까.”
구야수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던 그때.
“흑도 생활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다 죽는다는 것 알잖아?”
다시 구야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검무극이 말한 전부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느낀 것이다.
“살려주십시오.”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지부장에게 뇌물 준 증거를 내놓으면.”
구야수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없으면 그냥 죽으시고.”
검무극이 주먹을 쥐는 순간, 구야수가 소리쳤다.
“있습니다! 금고 안에 있습니다.”
검무극이 그를 앞세워서 금고로 갔다. 금고를 여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지금 내가 뭐 하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뒤늦게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믿던 천이 자결해버린 것이 컸다.
“여기 있습니다.”
금고에서 장부를 꺼내주었다. 거기에 무림맹 지부장에게 뇌물을 준 내역과 지부장이 저지른 온갖 비리들이 적혀 있었다.
“넌 가서 시체나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
구야수가 시체 쪽으로 걸어갔다.
‘기회다!’
틈을 봐서 달아나려고 마음먹었는데 어느새 단전의 내공이 제압당해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대체 어느새?’
어쩔 수 없이 구야수는 시체를 치웠다. 내공 없이 이십여 구나 되는 시체를 치우려니 땀이 뻘뻘 흘렀다. 평생 손끝 까닥 안 하고 살다가 이것도 일이라고 죽을 맛이었다.
힘들게 시체를 다 치운 구야수가 검무극에게로 갔다.
“다 치웠습니다.”
“힘들지? 무기력하고?”
“……네.”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당했던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은 이 감정의 백 배, 천 배쯤 될 거다. 하나씩 떼놓고 보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너희들인데, 개떼처럼 몰려다니면서 사람 겁주고 뺏고 때리고 죽이고.”
“앞으로 개과천선하겠습니다.
“흑도 사내가 촌스럽게 반성이라니? 나쁜 짓 계속해. 대신 내가 소개해 준 곳에 가서 해. 동업자들도 많을 테니, 괜찮을 거다.”
“어딥니까?”
“여기.”
검무극의 주먹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제이권 벽력수라.
퍼퍼퍼퍼퍼퍼퍼퍼퍽!
벼락처럼 빠르게 수십 방의 주먹이 그에게 적중되었고, 그는 비명 한 번 내지를 틈도 없이 피떡이 되어 죽었다.
검무극은 그의 시체도 다른 시체가 있는 창고에 던져버렸다. 놈의 죽음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곳으로 무림맹 지부장 백출(伯出)이 왔다.
“뭔 피 냄새가 이리 나나? 이 새끼들아, 내가 사람들 좀 그만 죽이라고 했지?”
백출이 양에게 잔소리하면서 이곳으로 들어섰다. 얼마나 자주 들락거렸으면 제집처럼 편하게 여겼다.
“대체 뭔 중요한 일이라고 바쁜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
검무극과 권마를 본 그가 흠칫 놀랐다.
“누구?”
“이번에 새로 영입한 무인들입니다.”
양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백출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저런 덩치를 구했나? 그냥 세워만 둬도 밥값은 하겠네. 근데 자네 주인은 어딜 가고?”
양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잠깐 자리를 비우신 모양입니다.”
그때 검무극이 백출에게 말했다.
“여자애를 폭행하고 겁탈까지 한 자를 그냥 풀어주면 어떻게 하나?”
백출이 ‘이거 뭐야?’ 하는 눈빛으로 양을 돌아보았다. 새로 온 놈들이라서 날 몰라? 교육 제대로 안 해?
하지만 양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평소와 다른 양의 반응에 백출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백출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그 사건은 증거가 부족해서 풀어줬네.”
“여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공패는 그 일을 흑도 놈들에게 자랑하며 떠벌렸다는데, 무슨 증거 타령이야? 조사도 안 해봤지?”
백출은 내심 화가 치밀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네 가족이 당했어도 그냥 풀어줬을까?”
가족을 언급하자 백출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가족 이야기하니까 기분 나빠? 네게는 이렇게 소중한 가족이고, 다른 사람들은 당해도 싼 지긋지긋한 가족이냐?”
이 순간 백출은 검을 뽑을까 말까를 고민했지만, 일단 참았다.
‘나중에 싹 다 처넣어주마.’
이 자리를 모면하는 게 우선이었다. 백출이 미소를 지으며 좋게 말했다.
“이해해주게. 본맹에도 법이란 게 있어서.”
“누굴 위한 법인데? 너? 야수파? 대체 누구?”
검무극의 차가운 기세에 백출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네가 누군지 몰라도 나는 무림맹 지부장이다. 나를 건드리면 무림공적이 된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무림맹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네 죗값과 이곳 사정을 전서로 다 알릴 거거든.”
“누구에게?”
“저기 위에 높은 사람 있어. 날 사위 삼으려고 했던 분.”
백출은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일단은 꾹 참았다.
“내 죗값이라니? 증거가 있나?”
검무극이 야수파에서 받아온 장부를 꺼냈다.
“야수파에게 뇌물을 많이 받아 챙겼더군. 이권 때문에 야수파를 시켜 사람까지 죽인 적도 있었고.”
“무슨 소리냐? 나는 그런 적 없다.”
“잡아뗀다고 떼질 일인가? 놈들이 착실하게 다 기록해뒀던데.”
백출의 표정이 굳어졌다.
“놈이 누명을 씌우는 거다!”
“그렇지 않을 거야. 거짓말할 상황이 아니었거든.”
백출은 어떻게든 저 장부부터 얻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놈들을 없애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얼마면 되겠소? 얼마면 그 장부를…….”
휘이이이이잉.
꽝!
눈앞에서 백출이 사라졌다.
저 멀리 벽에 날아가 처박힌 백출은 온몸이 부서진 채 즉사했다.
이제 홀로 남은 양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야수파의 수장…….”
휘이이잉!
꽝!
양도 눈앞에서 사라졌다.
반대쪽으로 날아간 그도 피떡이 되어 뒹굴었다.
두 사람을 날려버린 사람은 권마였다. 한주먹에 그들을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가세.”
뭔 이딴 놈들하고 이야기를 섞고 있느냐는 권마의 눈빛이었다.
“장부 한 백만 냥쯤 부르려고 했는데.”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잠깐만요.”
검무극은 장부를 마당 구석에 묻어두었다.
거기에 묻어두었다고 전하면 맹주가 보낸 조사관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전서에 석이 가족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검무극의 모습을 보며 권마가 말했다.
“자넨 참 꼼꼼하군.”
“사람 도울 때는 꼼꼼해야죠. 남 돕는 것도 좋지만, 귀찮다고 마무리를 제대로 안 하면 결국 화를 입는 사람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 되더라고요. 기분은 내가 내고, 화는 그 사람이 당하고. 그럼 안 되지 않겠습니까?”
권마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자넨 천마가 되면 안 될 것 같네.”
“왜 그렇습니까?”
“천마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마음으로 자네가 버텨낼 수 있겠는가? 이렇게 꼼꼼하게 다 챙기다간 자네가 먼저 미쳐버리고 말 걸세.”
“듣고 보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천마 말고, 그냥 권마님 제자나 하겠습니다.”
권마가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옅게 웃었다.
“지금까지 시도 중에서 제일 좋았네.”
“넘어가실 뻔했는데, 아쉽네요.”
검무극과 권마가 장원을 나란히 걸어 나왔다. 들어갈 때처럼 나갈 때 권마의 등도 입구를 꽉 채웠다.
다행히 권마는 교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어딜 가냐는 그의 눈빛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저보다 권마님이 더 즐거워하실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