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99)
절대회귀-199화(199/424)
제199회 내가 뭐 빼앗길 사람처럼 보이시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던 고월은 여전히 시선을 아래에 둔 채 물었다.
“교주야, 요즘 고민 있어?”
풍천교주는 창가에 기댄 채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민은 무슨? 갑자기 왜?”
두 사람은 중원 곳곳을 옮겨 다니며 정보조직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고월은 항상 바빴고 풍천교주는 호위 겸 보좌 역할이기에 상대적으로 한가했다.
“고민 있는 것 같아서.”
“나처럼 한가한 인생이 어디 있다고? 고민 없다.”
“원래 바쁜 사람이 고민이 없는 법이야.”
“없다니까.”
단호한 대답에 고월이 서류에서 눈을 떼서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없긴. 창밖을 쳐다보는 풍천교주는 확실히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고 요즘 뭔가 고민이 있는 눈치였다.
“힘들어?”
“힘들긴.”
“나는 힘든데.”
고월의 말에 풍천교주가 그를 돌아보았다. 고월은 진심이라는 듯 덧붙여 말했다.
“힘들다. 교주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못 견뎠을 거야.”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래? 언제부터 그렇게 충성심이 넘쳤다고.”
“이제부터라도 대충할까?”
“잘도 대충하겠다.”
풍천교주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래 힘들다, 죽겠다는 교주가 할 말인데. 교주답지 않아.”
“나다운 게 뭔데? 아니다. 또 나 무시하는 말만 늘어놓을 텐데. 하지 마!”
그런다고 안 할 고월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쪼잔해 보여도 속으로는 바다 같은 마음이 있고, 대충 사는 것 같지만 마음에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 떽떽거리지만 속은 깊은 사람. 이런 사람이 교주지.”
“흥! 반대로 말한 거지? 쪼잔하고 대충 살고, 떽떽거린다는 거지?”
“그리고 누구보다 눈치도 빠른 사람!”
풍천교주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말이 쏟아져 나왔을 텐데. 풍천교주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고월이 의자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혹시 향수병이라도 걸린 거야?”
“향수병 이야기를 하니까 하는 말인데, 내가 고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 고향 생각 전혀 안 난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전혀 안 들고. 죽기 전에나 한번 갈까, 앞으로 갈 일 없을 것 같다.”
“향수병도 아니고. 그럼 뭐 때문일까?”
풍천교주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인데, 풍천교주가 화제를 돌렸다.
“이공자는 왜 안 와? 제대로 연락한 거 맞아?”
“바쁘시잖아?”
“바쁘긴. 우리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거지. 제 할 것 다 하고, 어? 그때 그 족쇄가 보자고 기별을 했네. 한 번 만나줄까? 말까?”
“만약 그렇다면 그때 그 족쇄에 돈을 너무 많이 투자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번 일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있었다. 아직 중원 전체에 정보망이 다 깔리지 않았는데, 또 자금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돈이 썩어나나 보지.”
“교주. 뭐 때문에 화난 거야? 살이 안 빠져서 우울해?”
“흥! 마음만 먹으면 한 달이면 다 빼지.”
“한 달 전에도 그 말 했잖아?”
“나이 먹고 너무 마르면 사람이 없어 보여.”
“교주는 너무 있어 보여.”
풍천교주가 홱 돌아보며 인상을 썼고, 고월이 장난이었다는 시늉을 했다.
“고민이 뭔데?”
잠시 사이를 두고 풍천교주가 말했다.
“이유 말해주면 또 나 놀릴 거지?”
“들어보고.”
“절대 안 놀린다는 말은 안 하지.”
결국 풍천교주가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만났던 석충 기억나?”
“기억하지.”
중원에 정보조직을 구축하는 과정은 정말 일이 많았다. 정말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러다 보면 석충 같은 사람도 만나게 된다.
“그놈, 그날 내게 말실수도 하고, 무례하게도 굴었지.”
고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풍천교주의 진짜 신분이나 실력을 알았다면 그리했겠는가? 그저 돈 많은 부자쯤으로 소개가 되니, 알량한 무공을 믿고 거드름을 피우고 무례를 떨었다.
“교주가 잘 참았지.”
“계속 그놈 생각이 나. 그때 그놈을 박살 낼걸. 아니, 하다못해 그러면 안 된다고 훈계라도 할걸. 그때는 일이 무난하게 처리되라는 마음에 참았거든. 근데 이제 와서 자꾸 생각이 나.”
풍천교주는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놈을 죽였는지 모른다. 사실 죽일 정도까지의 실수도 아닌데, 죽여버리고 싶다는 분노가 자꾸 치밀었다.
“전에 그 인상 더러웠던 놈 있잖아? 그땐 잘 참았거든. 한데 이번에는 잘 안 참아지네. 아, 알아. 말하지 마. 내가 얼마나 속 좁은 놈인지 잘 아니까. 한데 자꾸 생각나는 걸 어떻게 해?”
“이해해.”
“이해한다고?”
“병신 같은 놈이었어. 교주가 두들겨 팼어도 안 말렸을 거야.”
“그래?”
풍천교주가 기뻐했다.
“그럼 패버릴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패버릴까?”
고월은 말없이 풍천교주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제야 풍천교주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하고 싶은 말, 어서 해.”
“없어.”
“하라니까!”
“다들 이렇게 산다고. 교주니까 지금까지 더러운 꼴 안 보고 살아온 거고. 다들 이렇게 참아가면서 산다고. 성질난다고 패고, 기분 나쁘다고 패고, 예의 없다고 패고. 그런 인생 살 수 있는 사람 몇 사람 없다.”
“이공자 같은 사람이나 그렇게 산다는 말 하고 싶은 거지?”
“교주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살았었고. 평생 편하게 살다가 참고 산 지 얼마 안 됐잖아?”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인정한다는 듯 풍천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월은 풍천교주가 힘들어하는 것을 이해했다. 얼마나 힘들겠는가? 누구 하나 부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시종 하나 없이 자신을 따라다니며 호위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그래서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전생에 교주가 내게 큰 죄를 지었나 봅니다.’
고월이 풍천교주 옆으로 걸어가서 나란히 바깥을 쳐다보았다.
“속이 좁아서 자꾸 생각나는 게 아니라 교주 가슴에 울화가 쌓여서 그래.”
“울화가?”
“중원을 돌며 이 일을 하는 거, 교주가 처음 하는 일이잖아? 사람 만나고, 또 만나고.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화가 많이 쌓이는 일이야. 지금까지 교주가 날 위해서 참아준 거지.”
“알아주면 다행이고.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속이 좀 풀린다.”
“앞으로는 참지 말고 패버려.”
“싫다. 그래도 참을 거다. 속이 좁게 태어났으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어차피 죽을 인생, 한심하게 끝내진 않을 거다.”
고월이 그를 쳐다보았다. 풍천교주는 진심이었다.
“속이 뻥 뚫리게 시원하게 이공자 욕 한번 할래?”
“해도 돼?”
“오랜만에 한번 해!”
풍천교주가 기다렸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이 게으름뱅이 이공자야! 오라면 후딱 올 것이지 뭐 한다고 이리 늦는 거냐? 우릴 잊었냐? 잊기만 해! 어장 속 물고기한테 잡아먹혀 본 적 없지? 그냥 콱! 머리부터 삼켜 버릴 거다! 네가 아무리 그때 그 교주, 그때 그 족쇄 취급해도, 우린 이렇게 잘살고 있다! 이 나쁜 이공자야! 이 못생긴 이공자야! 경공으로 사기 치는 이공자야! 아! 이렇게라도 고함을 지르니 속이 풀린다. 고 군사야, 너도 해! 쌓였던 체증이 싹 가실 거다. 역시 욕은 이공자 욕이 제일 후련하다.”
그러자 고월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주님, 무엄하게 이 무슨 망발이십니까?”
“응?”
돌변한 고월의 모습에 풍천교주가 뭐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눈을 껌벅이다가, 이내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풍천교주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사이에 왔는지 검무극이 뒤에 서 있었다.
“또 제 욕하고 계셨군요.”
왜 하필 지금! 전에도 욕하다가 걸렸었는데. 풍천교주는 당황했지만, 그냥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이공자! 욕할 때 등장하는 것부터 고쳐! 물론 내가 이공자 있다고 할 말 안 할 사람은 아니지만…….”
바로 그때 뒤이어 권마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보는 순간 풍천교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지면서 그는 풍천교주로 돌아왔다. 그가 목소리를 깔고 권마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소.”
“반갑소이다.”
두 사람이 서로 포권하며 인사했다. 권마 역시 검무극과 단둘이 있을 때와는 다른 기도를 드러냈다. 그들은 지금 교주와 마존이었다. 원래 이런 사람들이었는데, 검무극을 만나면서 다들 변하고 있는 것이고.
검무극이 고월을 권마에게 소개했다.
“여긴 바둑만 잘 두면 완벽해질 제 군사 고월입니다.”
고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총군사님과 벌써 충돌하고 싶지 않아서 배우는 것을 참고 있습니다.”
천마에게 바둑 가르치는 사람이 총군사였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은 곧 자신이 배워서 검무극을 가르치면 교주를 이기게 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자, 들어오시지요.”
검무극과 권마가 들어와서 앉았다.
고월이 차를 내왔다.
“내드릴 것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멀리까지 와서 일하느라 고생이 많네.”
“중원 유람한다 생각하고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검무극이 풍천교주에게 정중히 말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교주님이 지켜주셔서 고 군사는 아예 걱정을 안 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네.”
고월이 풍천교주의 노고에 공을 보탰다.
“교주님이 아니시라면 벌써 몇 번은 죽었을 겁니다.”
실제로도 몇 차례 위험이 닥쳤지만 풍천교주 덕분에 위기를 넘기기도 했었다.
검무극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그가 얼마나 큰 희생을 하고 자신에게 왔는지 잘 안다. 물론 그 이유가 고월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과실을 따 먹는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매번 그는 그때 그 교주라고 하지만, 그렇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풍천교주가 권마에게 말했다.
“이공자와 함께 출교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풍천교주가 넌지시 물었다.
“혹 이공자에게 빼앗긴 것 없으십니까?”
“빼앗긴 것요?”
“잠깐만 방심하면 제 것이 이공자에게 가 있거든요. 혹 우리 권마께서도 그런 일을 겪으셨나 해서요.”
풍천교주의 눈빛이 마치 ‘너도 빼앗겼을 텐데?’였기에 권마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일은 없었소.”
그러면서 권마가 ‘내가 뭐 빼앗길 사람처럼 보이시오?’라는 눈빛을 보냈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 속에서 풍천교주는 내심 속상했다.
‘나만 이공자에게 다 빼앗긴 건가?’
그는 아직도 가끔 검무극에게 준 신물 생각이 난다. 어차피 교를 떠난 마당에 신물 자체에 미련이 남거나 욕심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어리석어 주지 않아도 될 걸 다 주고 사는 사람은 아닌가, 혼자만 손해 보고 사는 사람은 아닌가, 그런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요즘 드는 우울감에 그런 감정들도 한몫하고 있다.
그때 검무극이 말했다.
“참, 권마님을 사부님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풍천교주가 깜짝 놀랐다.
“정말인가?”
“네, 이제 권마님께서는 제 사부님이십니다.”
풍천교주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내 권마를 쳐다보는 그의 기분이 좋아졌다.
‘당신도 빼앗겼네! 당신은 당신 자체를 다 빼앗겼구나!’
결정적으로 풍천교주를 기쁘게 한 것은 이것이었다.
‘나만 당하고 사는 게 아니었어!’
그에게 정말 큰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물론 권마는 전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고월이 포권을 취하며 축하했다.
“사제지연을 맺으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풍천교주도 권마에게 축하했다.
“축하드리오.”
“고맙소.”
풍천교주는 입이 근질근질했다.
‘당신도 그때 그 사부가 안 되길 바라겠소.’
정말 권마와 조금만 더 친했어도 결국 하고 말았을 말이었다.
“저는 잠시 고 군사와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검무극과 고월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곳에는 권마와 풍천교주만이 남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건넨 것은 풍천교주였다.
“큰 결심을 하셨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소.”
암. 정신 차리고 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 풍천교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번에는 권마가 물었다.
“교주야말로 큰 결심 하셨소.”
“마존께서 보면 내 꼴이 좀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소.”
“우습다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풍천교를 버리고 중원에 들어와서 혼자 이러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오.”
원래라면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았을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이란 구심점으로 인해, 이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대화가 오갔다.
“왜 당신이 혼자요? 아까 군사도 있고. 내 제자도 있지 않소?”
“고 군사 말로는 당신은 대공자를 지지한다고 들었는데.”
“맞소.”
풍천교주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제자라고 함부로 대하지 마시오.”
풍천교주는 권마에게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당신은 반만 걸었지만, 우린 당신 제자에게 모든 것을 다 걸었으니까.”
권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차를 마셨다.
한편 검무극과 고월은 마당으로 나왔다. 둘만 있게 되자 검무극이 그의 노고를 위로했다.
“고생이 많네.”
“권마님의 제자가 되는 것보다는 덜 고생했을 겁니다.”
검무극은 부정하지 않고 웃었다.
“공자님을 뵙자고 기별을 남긴 이유를 말씀드리기 전에, 한가지 따로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교주가 요즘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무슨 이유로? 얼마나?
검무극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고월이 이렇게 따로 이야기할 정도라는 점으로 그 모든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아직도 족쇄에 묶여 있던 그때 꿈을 꿉니다. 때론 음뢰종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요. 한 사람이 과거로부터 벗어 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교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검무극이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따로 이야기해 보겠네.”
“감사합니다.”
검무극에게 말한 이상, 고월은 더는 그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그러자 고월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혹시 신선채(神仙債)라고 들어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