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00)
절대회귀-200화(200/424)
제200회 돈 빌릴 준비 되셨습니까?
신선채.
악덕 고리대금인 염왕채(閻王債)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긴 말이다. 이자를 받지 않고 빌려주는 돈, 신선이 주는 돈이라 해서 신선채라 불렸다.
회귀 전, 신선채와 관련한 일대 사건이 발생했기에 나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심 생각했다. 그놈들이 이때부터 움직이고 있었구나. 신선채 사건이 세상에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으니까.
고월이 신선채에 관해 설명했다.
“요즘에 새로 등장한 말로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로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 은밀히 퍼져나가는 말이지요.”
신선채.
악마도 고개 젓게 하는 악행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기도 했다.
“젊은 무인들에게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준다는 말을 귀주에서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돈 많은 거부가 선의를 베푼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이후에 중경에서도 들었고, 호북에서도 들었습니다. 아, 물론 제가 정보를 다루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겁니다. 꽤 은밀하게 퍼지고 있거든요.”
그리고 고월의 의심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했다.
“대체 누가 이자도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는 걸까요? 그것도 하필 젊은 무인들에게만?”
이미 고월은 이번 일에 무언가 있음을 느낀 것 같았다.
“알아보니 협계(協契)라는 이름의 신비 조직이 돈을 빌려주고 있었습니다.”
함께 돕는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지만 나중에 밝혀진 그들의 실제 이름은 암흑상계(暗黑商界)다.
“결정적으로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뭔가?”
“차용증에 상환 날짜가 없다고 합니다.”
“이자도 없고 상환 날짜도 없다? 그럼 빌려 간 사람은 책임감이 떨어져서 갚을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맞습니다. 그래서 갚지 않고 또 빌리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상대에게 계속 돈을 더 빌리게 만드는 수법이었다. 다들 젊고 똑똑한 젊은이들이겠지만, 작정하며 설계한 소리장도(笑裏藏刀)의 비열함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그들은 착각했겠군. 상환 날짜가 없다는 것은 영원히 미룰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언제라도 와서 원금을 갚으라고 할 수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갑자기 찾아와서 그동안 쌓인 차용증을 내놓으며 한 번에 원금을 다 갚으라고 한다면?
못 갚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안면몰수가 시작될 것이다. 대상의 성향이나 성격에 따라 무력 행사를 하거나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할 것이다. 양심의 가책에 호소할 수도 있고, 좋은 말로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약점이란 약점은 다 조사한 상태인데다 이자도 주지 않는 돈을 마음껏 빌렸기에 세상의 명분도 저쪽에 있었다.
“돈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완벽하게 휘어잡는 거지. 애초에 돈을 회수할 생각으로 빌려준 것이 아닐 거다. 그 돈을 빌미로 다른 일을 시키겠지. 돈을 탕감해준다는 조건에 단 한 번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순간, 평생 놈들의 노예가 되는 거지.”
고월이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감탄할 필요 없다. 내가 똑똑해서 알아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까. 이번 음모를 놓치지 않고 잡아낸 네가 대단한 거지.
흑계 놈들은 빚진 젊은이들을 이용해서 숱한 악행을 저지른다. 그로 인해 많은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결한 젊은이도 많았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암흑상계가 있다는 사실은 한참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밝혀졌다. 돈으로 사람들을 철저히 농락했던 그들의 악랄한 만행이.
차라리 염왕채를 쓰는 자들을 상대할 땐, 애초에 조심이라도 할 수 있지. 이 자들은 웃는 얼굴로 다가서서 젊은이들의 골수까지 빨아먹었다.
이후 놈들이 무림공적으로 몰렸을 때는 흑계의 수장을 비롯한 수뇌부는 막대한 돈을 벌고 잠적한 후였다. 결국 붙잡지도 못했다.
“돈이 얼마나 많아서 이 수작인지,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나는 고월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 이 악당 놈들을 처리하고 돈을 회수하자는 뜻이었다. 조직을 만든다고 직접 돈을 쓰는 입장이었으니, 내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테고.
“돈도 모자라는 데 신선들 도움 좀 받아볼까?”
내가 기꺼이 동조하자 고월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보조직을 가동해도 되겠습니까?”
“이 조직은 내 조직이 아니라 자네 조직이야. 자네가 판단해서 먼저 움직이고 보고는 나중에 하면 돼.”
나는 그에게 일에 있어서 전권과 무한한 신뢰를 주었다.
고월이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실력 발휘 한 번 해봐.”
“네!”
고월이 처음으로 외부의 적을 상대로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이후 계획은 고월이 알아서 세울 것이다. 나야 고월이 만들어둔 판에서 주먹만 휘두르면 될 뿐. 이렇게 마음 편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유능한 군사를 둔 수장의 특권 아니겠는가?
대화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니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권마와 풍천교주는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숨 막히는 어색함이란.
“무슨 말씀들을 나누고 계셨습니까?”
내 물음에 풍천교주가 대답했다.
“우리 이공자 잘 부탁한다고 했지.”
“만날 뒤에서 욕하시면서요?”
“자네가 승승장구해야 욕도 계속할 수 있지 않겠나?”
“맞는 말씀입니다.”
풍천교주는 기분이 한결 좋아진 것 같았다. 그의 밝은 모습에 나는 고월을 쳐다보았다. 고월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이유는 그날 밤에 밝혀졌다.
나는 풍천교주가 만든 시공이환술 속에 들어와 있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자니까 그가 시공이환술을 펼친 것이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들판, 너무나 아름답고 시원한 풍경이었다.
“스승님!”
“스승님이라니?”
“잊으셨습니까? 이 안에서만큼은 교주님을 스승님으로 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내게 시공이환술을 전수해준 사람이 바로 풍천교주였다. 그래서 이 안에서만큼은 스승으로 삼겠다고 예전에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 그랬었지.”
풍천교주는 기뻐하는 대신 탄식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니 내 솔직히 말하겠네. 권마가 자네 사부가 되었다고 했을 때, 나는 정말 기뻤네. 둘이 사제지간이 되어서 기뻐한 것이 아니라, 권마 역시 자네에게 탈탈 털렸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네. 나만 자네에게 다 털린 것 같아서 우울했었거든.”
정말 이런 말을 이렇게 대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풍천교주 밖에 없을 것이다.
“한데 생각해 보니 나도 자네 스승이잖나? 먼저 탈탈 털린 것은 권마가 아니라 바로 나였네, 나였다고.”
그의 자책에 나는 웃고 말았다.
“비웃는 건가?”
“비웃다니요? 제 스승님이신데요.”
“그래, 마음껏 비웃게.”
“교주님.”
“왜 그러나?”
잠시 그를 응시하던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습니다.”
“뭐가?”
“제 옆에 계셔 주셔서요. 고월 옆에 계셔 주셔서요.”
“갑자기 왜 이러나? 나 돈 없어!”
왜 이러냐고? 요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사람을 똑바로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
말하기.
아껴두지 말고 말하자. 생각났을 때 미루지 말고 말하자. 그걸 지금 실천하는 중이다.
“정말 고맙습니다.”
한 번 더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자 풍천교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나는 잘 있으니, 이렇게 안 챙겨도 되네.”
“아뇨, 챙길 겁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실수할 겁니다. 혹시라도 제가 소홀하면 계속 욕해주십시오. 그때 그 교주 취급하지 마라! 잡은 물고기 취급하지 마라! 계속 욕해주십시오.”
불어온 바람이 우리의 옷자락을 펄럭였다.
바람에 항복해서 일제히 드러눕는 풀들을 바라보며 풍천교주가 물었다.
“고월이 나 챙기라지?”
“네.”
“젊은것들이 나이 든 사람을 왜 이렇게 챙기나? 자존심 상하게.”
“고 군사가 그러더군요. 아직도 족쇄에 묶여 있던 그때 꿈을 꾼다고요. 누군가 과거로부터 벗어 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 같다고. 교주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요.”
“저나 챙길 것이지. 이보게 이공자. 나 말고 자네 군사나 챙기게. 요즘 많이 힘들어하네.”
“직접 챙겨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풍천교주가 불쑥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여긴 고월이 가장 좋아하던 곳이었네. 이곳의 들판과 하늘을 정말 좋아했지. 한데 군사가 되고 나서 난 그를 데리고 이곳에 오는 것이 꺼려졌네.”
“왜 그렇습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풍천교주가 말했다.
“두렵네. 여기 와서 그가 이런 생각 할까 봐 두렵네. 난 그때 이 가짜 세상을 그리워할 정도로 억압당하고 있었었지?”
풍천교주의 걱정을 이해했다. 그래, 과거는 징글맞게도 떨쳐 지지 않는 법이다.
“고 군사를 여기 데려오십시오.”
“데려오라고?”
“안 온다고 여기에서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 머리 좋은 사람이 여기 오지 않는다고 이곳을 잊었겠습니까?”
“!”
“오히려 잊으려면 이곳에서 잊어야 할 겁니다.”
휘이이잉.
풍천교주의 마음을 반영해서였을까? 더욱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가 나간 후에도 풍천교주는 한참을 시공이환술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 * *
다음 날에도 풍천교주는 시공이환술 속에 있었다. 똑같은 장소에 다른 사람과. 검무극 있던 자리에 고월이 서 있었다.
“여기 오랜만이지?”
풍천교주의 말에 고월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월의 눈치를 살피며 풍천교주가 물었다.
“왜 그래?”
“왜긴. 여기 오니까 옛날 생각나서 그렇지. 좋은 추억은 하나도 없잖아?”
막상 그 말을 고월에게 들으니까 풍천교주의 마음이 아팠다.
“왜 날 여기 데려온 거지? 여전히 너는 보이지 않는 내 족쇄를 차고 있다! 이걸 말하려고?”
고월의 차가운 반응에 풍천교주가 당황했다.
“아니다. 난 그냥 오랜만에…….”
“내보내 줘.”
“그래.”
시공이환술을 풀려던 풍천교주가 발끈했다. 생각해 보니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야! 뭘 이렇게까지 정색하고 화내는 거야? 우리 옛 추억은 아무것도 아니냐? 그때 일은 잘못했다고 몇 번이나 사과했잖아? 굳이 이렇게 날 선 반응을 보여야 해? 난 그냥 너와…….”
말을 하던 풍천교주는 말문이 막혔다. 대체 그와 뭘 하려는 걸까?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서? 검무극이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 아니면 고월의 입에서 이제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젠장! 열지 말았어야 했던 곳이다.
그때였다. 고월의 부드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교주야. 내가 아까처럼 굴까 봐 걱정했지?”
깜짝 놀란 풍천교주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화를 냈던 고월은 사라지고, 그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풍천교주는 알 수 있었다. 고월이 일부러 연기했다는 것을.
“날 어떻게 보고 그런 걱정을 해? 사람을 그렇게 오래 보고도 몰라?”
“솔직히 볼수록 더 모르겠다. 너도 모르겠고, 나도 모르겠고.”
고월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오고 싶었어. 이곳에 있을 때만큼 행복했을 때가 없었거든. 지금 중원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나는 여기서 교주와 서 있을 때가 더 좋았다. 그래서 교주가 언제쯤 여길 오자고 할까,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자 풍천교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무슨 미친 소리냐? 그 말 당장 취소해! 이깟 만들어진 세상이 더 좋다고? 너 미쳤어? 여기는 그냥…… 잊어! 잊으라고! 그 괴롭던 삶에서 겨우 숨구멍에 불과했던 이 거지 같은 곳이 더 좋으면 어쩌자는 거야? 지금 네 인생이 그것밖에 안 돼? 네가 그렇게 불행한데 무슨 정보조직이냐고. 이공자고 뭐고 다 때려치워!”
풍천교주의 열기에 찬 눈빛에 고월은 뜨거운 격정이 북받쳐 올랐다. 살면서 이런 사람 한 명 있다는 것,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아아아아! 좋다!”
고월이 옛날처럼 들판을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들판에 대자로 누웠다.
“좋네.”
“좋긴 뭐가 좋아?”
“이제 그 지랄맞던 교주 같아서. 오늘 화가 좀 풀렸지?”
“풀리긴. 풀렸던 울화가 다시 쌓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풍천교주의 표정은 시공이환술에 들어오기 전보다 편안해져 있었다.
누워있던 고월이 몸을 일으켰다.
“교주야, 나가자. 나 바쁘다.”
“더 있다가. 조금 더 쉬어. 그깟 일은 좀 잊고. 이공자도 잊고.”
그러자 고월의 시선이 다시 하늘을 향했다.
“확실히 더 좋네, 여기 하늘이 더.”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같은 마음이었지만, 풍천교주는 마음과는 다른 말을 했다.
“다신 안 열 거다. 실컷 보고 뒹굴어라.”
* * *
고월이 협계와 관련해서 판을 짜는 동안 난 권마와 함께 무공수련을 했다.
이 시간이 정말 소중했다. 우린 비로소 권법으로 비무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벽력수라권 대 벽력수라권.
권마는 이제 몸으로 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가 정식으로 사부가 된 이상, 그냥 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대신 벽력수라권으로는 얼마든지 비무를 할 수 있었다.
설령 나중에 내가 이기게 되더라도, 그의 무공으로 그를 이기는 셈이니 크게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고월은 생각보다 빨리 성과를 보였다. 협계 쪽과 선을 잇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신선들에게 돈 빌릴 준비 되셨습니까?”
난 고월을 보며 활짝 웃었다. 놈들이 청년들에게 한 짓, 그대로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악귀 같은 놈들, 하나도 남김없이 싹 발라버릴 것이다.
“우리 신선님들이 얼마나 돈이 많으신지, 어디 한 번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