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15)
절대회귀-215화(215/424)
제215회 시작부터 참여하십시오.
극악소마는 오늘도 하얀 방에 홀로 앉아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하얀 벽이 그의 무공 수련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혹시라도 그가 미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사라졌다.
그의 방에 들어간 내 첫 마디는 이거였다.
“소마님, 싸우러 가시죠.”
내가 허락을 받아냈다는 사실에 가면 속 소마의 눈이 활짝 웃었다. 나를 돕기 위해 불사귀면까지 쓰고 아버지를 만났던 극악소마였다.
“좋습니다.”
극악소마는 흔쾌히 대답했다. 상대가 야율한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나와 함께 싸우러 가는 것을 기뻐할 뿐이었다.
“야율한뿐만 아니라 그가 거느린 수하 사인방들도 함께 처리할 겁니다.”
가면의 눈구멍 속 극악소마의 눈이 웃었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기뻐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만에 빠져 있거나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야율한은 강한 자입니다. 우리가 앞서 싸웠던 싸움보다 더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극악소마는 결코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이번 일의 위험성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고맙다. 이런 일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나서줬던 것이니까.
“문제는 우리가 죽였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고 해치워야 합니다.”
“이공자는 똑똑하니까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소마님이 도와주셔야죠.”
“저는 죽이는 것만 맡죠.”
말은 쉽게 했지만 극악소마의 눈빛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대다. 극악소마가 담담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싸우다 보면 내가 누군지를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가장 위험할 때죠. 내가 본 이공자는 자신이 누군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전 소마님이 계셔서 걱정 안 되는데.”
우린 마주 보며 웃었다. 좋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고, 상대의 호의에 고마워하고.
그에게 막 너스레를 떨고 싶어진다. 농담도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참았다. 실수는 딱 이럴 때 나오는 법이니까. 가깝기에 지켜야 하는데 가까울수록 못 지키게 되는 것이 예의이기에, 나는 예전보다 더 깊은 존경심으로 그를 대했다.
“참, 그리고 이번 일에 다른 마존이 한 분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누굽니까?”
“아버지 명령으로 독왕께서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독왕이란 말에 극악소마는 살짝 난처한 눈빛을 보냈다.
“그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데.”
누군들 있겠는가? 그건 독왕도, 극악소마에게도 다 해당하는 말이었다.
“이번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독왕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극악소마는 여전히 껄끄러운 모양이다. 나를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마존들과의 관계는 또 별개였으니까.
극악소마가 반대쪽 벽으로 걸어가서 그어둔 선 앞에 섰다.
“독왕 그 사람과는 이쯤에 있을 겁니다.”
극악소마는 줄의 시작 지점을 가리켰다.
“그래도 줄 위에 있긴 하네요.”
내 말에 극악소마가 웃었다. 어차피 정해진 일, 그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독왕의 독이 실수로 우릴 죽이지 않길 바라야죠.”
나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마존들의 조합은 여간해서는 맞추기 어렵다. 어느 둘이 있을 때 가장 잘 어울릴까?
“언제 출발이 가능하십니까?”
“전 언제라도 좋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시죠.”
“좋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다가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소마님 덕분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덕분이란 말 대신에 책임이란 말을 써야 할 겁니다. 인사는 일이 끝나고 하시죠.”
말을 마친 소마는 다시 벽을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그 하얀 벽을 함께 쳐다보다가 작별을 고하고 방을 나섰다.
악인곡을 걸어 나오는데 마주치는 무면객들의 눈빛에 이전보다 더 큰 호의가 담겼다. 아까 좋았다면서 허리 숙여 인사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연무장에서 짖고 난 후, 인기가 더욱 올라간 것이다. 하여튼 이상한 짓을 더 좋아하는 그들이었다.
* * *
악인곡을 나온 후 곧장 천독림으로 갔다.
독왕은 한창 짐을 싸고 있었다. 내일 아침 출발이라고 알려주러 왔는데, 이미 예상했는지 이것저것 챙기느라 분주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일 아침 출발이란 것.”
“그 난리를 치고 얻어낸 기회인데, 당연히 바로 출발하겠지.”
“역시 똑똑하십니다.”
“똑똑했음 이 위기에 빠졌겠어?”
그에게 위기는 야율한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천독림을 나가는 일이 위기인 것이다.
독왕은 어깨에 멜 수 있는 가방에 독을 챙겼다. 주머니에 든 것, 통에 든 것, 병에 든 것. 다양한 독들을 모두 챙겼다.
“독을 이렇게 많이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독왕이 몸에 지닌 독만 해도 엄청난 수의 무인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한데 독왕은 예비 독을 많다 싶을 정도로 챙겼다.
“무슨 일이 있을지 알고.”
죽어도 가기 싫은 것과 별개로 준비성은 철저했다. 그의 성격이었다. 이런 철두철미한 성격이 아니면, 그 많은 독과 해약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독왕은 허리에 찬 독주머니를 감출 수 있도록 얇은 장삼을 입었다. 그 장삼 안쪽에도 주머니가 여러 개 달렸는데, 거기에도 독을 챙겨 넣었다.
“제가 혁낭을 하나 메고 갈 텐데, 챙겨주시면 저도 들겠습니다.”
“사도맹 멸망시킬 일 있냐? 됐다.”
“지금도 충분히 그럴 기세입니다만.”
그는 못 들은 척 또 다른 것을 챙겼다. 이번에는 독이 발린 비수가 이십여 개나 꽂힌 가죽 띠를 둘렀다.
“비수도 던지십니까?”
“너보단 잘 던질 거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독왕이 비수를 사용한다는 것에 놀랐다.
거기에 독왕이 부채도 챙겼다.
무간선(無間扇)이라 불리는 독왕의 독문병기로 하독할 때 주로 사용했다. 독을 뿌려 모두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십 명이 있는 방에서 딱 한 명만 독으로 죽이는 것이 어렵지.
독왕이 무간선을 살랑살랑 흔들 때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지옥으로 이끌 바람이 어디를 향할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훗날 차기 독왕은 자신의 사부인 지금의 이 독왕을 이렇게 평가했다.
삼백 년 이내 최고의 독공 고수라고.
“나는 미리 말하지만 야율한 안 죽여. 난 그냥 따라만 가는 거야. 구경만 할 거야!”
“구경만 하신다면서 무슨 독을 이렇게 많이 챙겨가십니까?”
“마음 편히 구경하려고 그런다.”
이건 그의 성격이다. 철두철미한 것도, 이 불안증도.
“얼마나 걸릴까?”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고는 하지만 갔을 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돌아오자. 알지?”
“도와주시면 더 빠르겠지요.”
“다른 건 몰라도 진독거사 그놈은 내가 손 좀 봐야겠다.”
독왕은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짜증이 난 듯 보였다.
“약을 팔아먹으려면 제대로 만들고서 팔든지. 이러니 우리가 욕을 먹는 거다. 교주가 날 싫어하는 이유고.”
“한데 독왕님이 독공을 쓰신 것을 남기면 안 됩니다.”
“시체 남겨서 전시할 일 있나?”
시체조차 흔적도 없이 녹여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독왕이 진독거사를 처리해준다면 내가 만독불침인 것을 드러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빠뜨린 독을 챙긴다고 바쁜 그를 뒤로하고 천독림을 나섰다.
나를 데리고 천독림 밖으로 나가면서 상선이 말했다.
“독왕님을 잘 부탁하네.”
상선이 독왕을 얼마나 걱정하고 아끼는지 잘 안다. 오랜만의 출교니 더욱 신경이 쓰일 테고.
“제가 독왕님께 드려야 하는 부탁인 것 같습니다만, 네. 잘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안내네. 앞으로는 혼자 오시게.”
항상 다른 길, 헷갈리는 길로 안내하던 그는 오늘은 가장 편하고 좋은 길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 * *
천독문을 나온 후 들른 곳은 의방이었다.
나는 드디어 마의에게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일 야율한을 죽이러 떠납니다.”
충격을 받은 마의가 멍하게 서 있다가 몸을 휘청거렸다. 내가 내력을 발출해서 그의 몸을 감쌌다. 그를 자리에 앉히고 물을 가져다주었다.
마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자인 걸 알았지?”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직 그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마의는 ‘아!’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예전에 이 일을 아버지에게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으니, 당연히 아버지에게 들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교주가 허락한 건가?”
“네. 여섯 마존들이 이번 일을 위해 저를 도왔습니다. 이번에 독왕에게 갔던 것도 그 일을 허락받기 위해서였고요.”
“왜 말하지 않았나?”
“허락을 받고 말씀드리려고 그랬습니다.”
마의의 얼굴에 격정이 차올랐다.
“나는 오직 이날만을 위해 살아왔었다네.”
눈앞에서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괴로움에, 복수를 꿈꾸며 자신을 학대하듯 환자를 치료하면서 살아온 그의 인생이었다. 평생 편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식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만약 눈앞에서 자식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 슬픔과 원한이 얼마나 크고 깊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놈을 죽이고 돌아와서 결과를 알려드려도 되겠지만, 떠날 때 알려드리는 이유는 이 일이 마의님께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작부터 알려드리는 겁니다. 이제 시작한다고요. 이 시작부터 마의님도 참여하시라고요.”
마의는 내가 돌아오는 날까지 떨리고 긴장되고 걱정될 것이다.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알리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의가 너무나 잊고 싶은,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이었지. 내가 위중한 환자를 치료하고 있을 때 야율한이 들이닥쳤다네. 당장 자기가 데려온 사람을 치료하라고 했지. 나는 안 된다고 했네. 지금 치료를 중단하면 이 사람 죽는다고. 목에 칼을 들이댔어도 의원으로서 내 신념을 지켰다네. 그리고 그날 난 두 사람을 다 살렸다네. 치료하고 있던 사람도 살렸고, 놈이 데려온 사람도 살렸지.”
“한데 왜?”
“놈은 자기 명령을 거역한 사람을 살려둔 적이 없다고 하더군. 그게 자신만의 원칙이라고. 앞으로도 꼭 지킬 거라고. 내가 자기 수하를 살려줬으니, 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대신에…….”
마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후회하네. 그냥 그자가 시키는 대로 할걸.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후회한다네.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그자의 말을 따를 거네. 내가 치료하던 환자가 죽더라도 나는 그자의 말을 따를 거라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로도 그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의방에 있는 자신의 침소로 데려갔다. 마의의 방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은 좁고 초라했다. 딱딱한 침상 하나. 작은 책상과 의자 하나가 전부인 방이었다. 책상에 놓인 몇 권의 책과 낡은 등잔 하나가 그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 방에 비밀문이 있었다. 벽에 숨겨진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숨겨진 공간에는 예전 마의의 집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그의 아내가 요리를 하던 곳도, 아들이 뛰어놀던 곳도, 세 식구가 잠을 자던 방도.
그는 아직도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그곳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어린 아들놈은 항상 나와 놀고 싶어 했지. 그때마다 아빠가 바빠서. 아빠가 환자를 구해야 해서. 아빠가 약초를 사러 가야 해서. 그렇게 미루고 또 미뤘지. 그런데도 아들놈은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네. 그 어린놈이 내게 그러더군. 안 바빠지면 나랑 놀아줄 거잖아? 그치? 우릴 위해서 이렇게 일하는 거지? 그날 나를 보던 그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그럴 때면 아내가 말했지.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고. 당신 건강부터 챙기시라고. 내 자식, 내 아내도 살리지 못한 주제에 내가 무슨 의원이라고!”
결국 마의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눈물은 더 많이 흘러내렸다. 처음 보는 마의의 눈물이었다.
나는 다가가서 마의를 안아주었다. 꼭 안고 그의 삐쩍 마른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숨죽여 울었다. 이공자로 안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오랜 세월을 살았던 회귀 전의 내가, 이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동생을 안아주는 거였다. 마의야, 이제 그만 힘들어해라. 내가 끝내주마.
잠시 후, 마의가 마음을 진정했다.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는 한편으로 후련한 얼굴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서만 삭혀온 아픔이었기에.
“……자네에게 미안하네. 내 복수를 위해 그 위험한 일을 하게 해서.”
나는 그에게 단호히 말했다.
“제가 반드시 죽이고 돌아오겠습니다.”
눈물 젖은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놈은 나의 존재조차 잊었을 거네.”
그 사실이 그를 더 미치도록 화나게 할 것이다.
“제가 기억나게 해주겠습니다.”
난 악인의 죽음에 어떤 의미도 두려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그래서 죽어가는 놈의 귓가에 말하겠습니다. 이 죽음이 너의 그 같잖은 원칙에 대한 마의님의 대답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