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29)
절대회귀-229화(229/424)
제229회 목숨빚 받으러 왔소?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잘 빠진 몸매에 차가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라는 표현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무표정한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는 섬뜩하면서도 정갈했다.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활짝 열린 장원으로 들어섰다. 장원의 입구에는 대야방(大夜幇)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펼쳐진 참혹한 광경.
백여 구가 넘는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대야방의 방도들이 몰살당한 모습이었다. 시체들 사이사이에 붉은 무복으로 통일한 무인들이 살아남은 이들을 찾아서 죽이고 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남자는 눈도 까닥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바닥을 흐르는 피가 튀어서 그의 신발과 바지를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피바다를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는 걸음에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냈다. 스스로 멈추지 않는 한 누구도 앞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무서운 존재감이었다.
남자는 바로 사도맹 이인자 야율한이었다.
이곳을 몰살한 붉은 무복의 무인들은 바로 극도병단의 무인들이었다.
극도병단. 야율한이 이끄는 사도맹 최정예 조직.
극도병단 무인들은 야율한이 지나갈 때마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 하나하나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야율한이 대청으로 들어섰다.
가운데 큰 의자에 대야방주 종심(從審)이 비스듬히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큰 부상을 당한 그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주위에는 극도병단 무인들의 시체도 널려 있었다.
“네 이놈!”
대야방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내부가 진탕하며 왈칵 피를 토했다.
“네가 어찌! 네가 어찌 이런 짓을!”
흥분한 대야방주에 반해 야율한은 너무나 차분했다.
그가 어디론가 걸어갔다. 구석 자리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극도병단의 무인이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부상이 너무 심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야율한은 망설이지 않고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이내 무인은 잠이 들 듯 숨을 거뒀다. 뒤에서 대야방주의 말이 들려왔다.
“이제와서 말하지만 네 얼굴을 보면 항상 소름 끼치고 기분이 나빴다.”
야율한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넌 항상 감정을 숨겼지.”
대야방주는 한 번도 야율한에게서 어떤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기뻐한 적도, 슬퍼한 적도, 화를 내는 것을 본 적도 없다.
“그 몸 안에 인간의 감정이 들어있기는 한가?”
그러자 야율한이 차분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있어야 하오?”
굵직하면서도 듣기 좋은 그의 목소리가 대청에 울려 퍼졌다.
“뭐?”
“당신이 말한 그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 꼭 있어야 하냐고.”
너무 당당하게 묻자 대야방주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좀 당혹스럽소. 당신도 그리 인간답게 살아오진 않았던 사람인데.”
“닥쳐라!”
노인이 버럭 소리를 쳤다가 또다시 피를 토했다. 검붉은 피가 그의 옷을 적셨다.
“그렇다고 누명을 씌워 한 방파를 몰살시키는 삶을 살진 않았다.”
무림맹과 결탁해 반란을 도모한 죄로 오늘 멸문을 당한 것이다. 증거는 명백했다. 대야방주 자신이 쓰지도 않은 서찰이 나왔는데, 자신과 필체가 같았다. 무림맹에서 받은 자신도 모르는 거액이 전장에 보관되어 있었다. 사도맹의 기밀을 빼돌린 정황도 있었고, 증언도 나왔으며 무림맹 쪽 사람들과의 밀담을 목격한 증인도 있었다. 자신이 봐도 명백한 배신자였다.
“이유나 알자. 왜냐?”
대야방주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자가 야율한이란 것을 확신했다.
“당신은 잊어버렸군.”
야율한의 말에 대야방주는 흠칫 놀랐다. 마치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듯한 말이었다.
“뭘 말이냐?”
“예전에 당신이 내게 그랬소. 사람이 너무 그러면 상대방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고.”
대야방주는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없었다. 내가 그랬던가? 가물가물했다.
“당신은 하고 싶은 말을 참지를 못하더군. 무림을 살아가면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사람은 혐오하오.”
“그래서?”
야율한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순간 대야방주는 충격을 받았다.
“그 이유가 전부란 말이냐?”
“혐오하는 사람을 죽인다, 이보다 더 확실한 이유가 필요하오?”
대야방주가 버럭 소리쳤다.
“이 미친놈아!”
흥분한 대야방주에 비해 야율한은 차분했다.
“세상에 사람들은 모래알처럼 많은데, 굳이 싫은 사람과 같이 갈 필요가 있겠소?”
그래, 대야방주는 거기까진 이해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해한다고 치자. 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나만 죽였어야지!”
“그러기에는 내 기분이 너무 나빴소.”
“아무리 그랬어도…… 고작 그런 일에 죄 없는 사람들까지 다 죽인단 말이냐?”
대야방주가 괴로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대단한 원한으로 이런 일을 당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식구들에게, 방파의 무인들에게 덜 미안했을 것이다. 기억나지도 않는 말 한마디 때문에 가문이 멸문을 당한다고?
대야방주가 자조적인 어조로 말했다.
“이게 다 운명이겠지.”
“운명 탓을 하고 싶겠지만, 이건 당신 탓이오. 남의 감정에 ‘고작’이란 말이나 붙이는 무신경한 당신 때문이지.”
대야방주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죽기 전에 자네에게 꼭 할 말이 있네.”
죽음을 느꼈을까? 대야방주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야율한이 그에게 다가갔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대야방주가 힘겹게 손짓했다.
야율한은 순순히 마지막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쉬이이익!
대야방주가 마지막 남은 모든 내력을 동원해서 일장을 내질렀다. 조금 전 그 힘겹던 손짓은 이 한 수를 위한 연기였다.
번쩍! 서걱!
하지만 그보다 야율한의 검이 먼저였다. 그의 검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데루르르르.
목이 잘린 대야방주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야율한이 머리통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 늙은이야, 내가 설마 그런 이유로 이랬겠나?”
대야방주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말을 남긴 후, 야율한이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바깥으로 나왔을 때,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야율한은 잠시 처마 아래에 서서 쏟아지는 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으로 한 남자가 비를 맞으며 뛰어와서 피풍의를 건넸다. 그는 온몸에 용문신을 한 차환(車煥)이었다. 사인방 중 살아있는 마지막 사내.
그는 온몸 가득 용문신을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연상되는 동물은 흑표범이었다. 까만 피부에 날렵한 몸매. 검은 피부 때문에 유난히 드러나는 하얀 눈자위까지.
하지만 그는 표범보다는 한 마리의 용이 되고 싶은 남자였다. 그는 사인방 중 자신의 충성심이 가장 높다고 자부했다. 야율한이 자신만을 곁에 두는 이유 또한 그러한 자신의 충성심을 알아주기 때문이라 믿었고.
“됐다. 오랜만에 비 좀 맞자.”
야율한이 빗속을 걸어갔고, 차환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다시 그 뒤를 극도병단의 무인들이 늘어서서 뒤따라 걸었다.
* * *
나는 극악소마와 안가에 도착했다.
고월은 새로운 소식으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사도맹 내부에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최근에 대야방이 멸문당했습니다.”
“누구에게?”
“대야방이 무림맹과 결탁하는 반란죄를 저질렀습니다. 증거는 명백했고 그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야율한이 이끄는 극도병단에게 전멸했지요. 저는 이 일이 야율한의 소행이라 생각합니다.”
고월은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야율한에 의해 대야방이 멸문을 당했으니까. 한데 그 시기가 달라졌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만, 시기나 원인이 미묘하게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선 제가 파악하고 있는 대야방주는 결코 사도맹주를 배신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고월이 의심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시기가 공교롭습니다. 이번 일의 제보를 받고 사도맹이 대야방을 조사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언제인가?”
“애차가 죽었을 때입니다.”
정말 공교로운 시점이었다.
그에 대해 고월은 이렇게 판단했다.
“사인방 중 두 수족이 죽었을 때 야율한은 누군가 개입했다고 확신한 것 같습니다.”
“설마?”
“네, 그 일의 배후에 사도맹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복수로 대야방을 쳤다?”
“대야방주는 친맹주파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야율한이 자기를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경고한 거죠.”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야율한이 맹주 자리를 욕심내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지금은 사도맹주가 강력해서 감히 그 자리를 탐내지 못하지만, 비사인이 그 자리에 앉으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사도맹주가 비사인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면 야율한을 죽여야 한다는 공공연한 말들이 세간을 떠돌기까지 했다.
서로를 견제하는 팽팽한 권력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야율한은 사도맹주가 비사인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 자신의 손발을 자르기 시작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 우리 움직임 때문에 일찍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건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상황을 잘 이용할 수만 있다면, 우린 야율한을 죽인 후의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야율한을 죽이고, 그를 죽인 사람이 비사인이 되게 하자는 말이지?”
“맞습니다. 비사인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후계자로 확실히 자리 잡을 거고, 우린 이번 작전을 성공하게 되겠죠.”
나는 함께 듣고 있던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극악소마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내 뜻에 따르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해야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우선은 친구부터 만나봐야겠군. 아직 나를 친구로 여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 * *
비사인은 자주 가는 고급 객잔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흉측했다. 베이고 뭉개지고 일그러지고.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섬뜩해지는 외모. 하지만 후계자가 되기 전의 그 어둡고 무거운 기운보다는 좀 밝아진 느낌이었다.
그의 주위로 사도십삼랑들이 함께 밥을 먹으며 호위하고 있었다.
비사인에게 한줄기 전음이 날아들었다.
―잘 지냈소?
비사인의 젓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다시 움직였다.
―정말 당신은 겁이 없군. 본맹의 본단까지 찾아오다니.
말의 내용은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어조는 부드러웠다. 그는 내게 목숨 빚을 지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후계자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당신과 조용히 만나서 얘기할 것이 있소.
―여기서 하시오. 사도맹 후계자가 혼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하는 말이오?
―나중에는 말만 하면 그게 다 이뤄지는 삶을 살 거요. 그러니 지금은 어려운 일도 좀 하시오. 자정에 사도맹 뒷산 정상에서 봅시다.
객잔을 나서기 전 나는 보았다. 비사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음을. 친구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적은 아닌 미소였다.
* * *
나는 사도맹 본단이 내려다보이는 산의 정상에 서 있었다.
회귀 전 대법재료를 찾아 헤매던 과정에서 이곳에 서서 저 사도맹을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회귀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때 뒤에서 비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 중요한 얘기가 있어 이 밤에 사람을 불러내는 거요? 객잔에서 전음으로 하면 되지.”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밥상을 엎을까 봐 그랬지.”
“내 성질 더러운지 모두가 아니까 괜찮았을 거요.”
비사인이 내 옆에 섰다.
“뒤에서 밀면 어쩌려고 돌아보지도 않소?”
“우린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 정도로 친해진 것 아니었소?”
내가 그를 쳐다보자 비사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아니겠지. 떨어져도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내려설 수 있으니까 여유를 부리는 거겠지.”
“그것도 맞소.”
내가 웃는 얼굴로 그를 보자 비사인은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사도맹 건물을 바라보았다.
“목숨빚 받으러 왔소?”
“어디 목숨빚 뿐이겠소? 후계자빚도 받아야지.”
“원하는게 뭐요?”
“뭐든 들어줄 거요?”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비사인도 나를 보았다.
“우리 야율한 죽입시다.”
갑작스러운 내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
“당신이 이상한 사람인 것은 진작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미친놈인 줄은 몰랐소.”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가 물었다.
“우리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그랬다면 당신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겠지. 난 야율한을 죽이러 왔소.”
“왜 그를 죽이려는 거요?”
“그가 핏물을 부어 키운 은원이 돌고 돌아 내게로 왔소.”
야율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기에 비사인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와 원수진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당신이 맹주 자리에 오르면 야율한은 반드시 당신 자리를 노릴 거요. 그래서 지금 사도맹주는 고민 중일 테고. 언제 야율한을 없앨지. 만약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사도맹주는 후계자를 야율한으로 삼은 거요. 당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맹주 자리를 물려주는 셈이니까.”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야율한은 맹주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죽여야 하는 적이지만, 동시에 사도맹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으니까.
“이번에 대야방을 친 것은 당신을 치기에 앞선 전초전에 불과하오.”
비사인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대야방주의 죽음은 사도맹주나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테니까.
“기억나시오? 언젠가 내가 천마가 되고, 당신이 사도맹주가 되어 다시 만났을 때, 그때를 추억하며 악수나 한 번 하자고 했던 일.”
나는 갈등에 휩싸인 비사인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일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일에 내 성패도 달려 있다.
“나는 야율한이 아니라 당신과 악수하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