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40)
절대회귀-240화(240/424)
제240회 드디어 눈을 떴다.
눈을 떴다.
낯선 곳에서 깨어났음에도 몸이 너무 개운해서 잠시 침상에 누운 채로 그대로 있었다. 보통 오래 자면 온갖 꿈을 다 꾸었는데, 이번에는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얼마나 잔 것일까?
하루? 이틀? 배가 이렇게나 고픈 걸 보니 어쩌면 내리 열흘을 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한 사람이 생각나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소마님!”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의방이 아니었다.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낯선 침소. 깨끗한 침구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고, 침상이나 가구들은 낡았다는 느낌 대신 고가구의 품격이 느껴졌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저것은…!
놀랍게도 이곳은 아버지의 침소였다.
마지막 기억이 의방이었는데, 왜 여기서 자고 있었던 걸까?
침상 옆에 깨끗한 무복 한 벌이 놓여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침소를 둘러보았다. 아들이지만 처음 들어와 보는 방.
‘아버지가 내게 방을 내주셨다고?’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격스러웠다. 나는 다시 아버지의 침상에 누웠다.
아버지가 여기서 주무신다고 생각하니 괜히 더 누워있고 싶었다. 다시 없을 기회일 수도 있다.
그때, 창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으면 나오너라.”
나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마당에 돌로 만들어진 다탁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계셨다.
“천마의 침소인 것을 알아차리려면 보통 천마혼의 상징을 보거나, 천마검을 보거나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한데 꽃무늬 잠옷으로 알아내다니요!”
벽에 걸려 있던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꽃무늬 잠옷이었다.
내 너스레에 아버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살만한가 보구나.”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도 몸은 멀쩡히 치료되어 있었다.
“제가 왜 아버지 침소에 있는 겁니까?”
“내가 데려왔으니까.”
“의방에 오셨습니까?”
깜짝 놀란 내 물음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간 것이 아니다. 몇 되지 않는 네 인맥들이 다 왔더구나.”
대충 누가 왔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 몇 사람이 결국 일당백 아니겠습니까?”
어디 일당백만 되겠는가? 일당천이고 일당만이지.
“소마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며 ‘소마는 죽었다’라고 할 수 있는 분이셨으니까.
“마의가 계속 치료 중이다.”
그 말에 안도했다. ‘마의’라는 한마디 말이 주는 힘이 이렇게나 크다.
그때, 천마전 시비들이 와서 내게 죽을 가져다주었다. 며칠을 굶었다가 먹는 식사니, 가볍게 먹으라는 의미였다. 이건 아버지의 배려다.
“식사하셨습니까?”
“난 했으니 들 거라.”
“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죽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그렇게 깨끗하게 그릇을 비우고 차까지 한잔 마시고 나자, 여전히 배는 고팠지만 좀 살 것 같았다.
“만년설삼은 어디서 난 거냐?”
“야율한이 오뢰신검의 구십 세 생일선물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들 뒤처리는?”
“비사인이 알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
“네, 저는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너는 그 아이를 차기 사도맹주로 낙점했구나.”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천마전 무인이 뭔가를 가져와서 내 앞에 내려놓고 갔다.
“이게 뭡니까?”
“열어봐라.”
상자를 열어보니 만년설삼이 들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디서 난 겁니까?”
“왜? 소마의 배라도 갈라서 꺼내 온 것 같으냐?”
천마보고(天魔寶庫)에 있던 영약을 가져온 것이리라.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오직 천마만이 알지만, 나도 대충은 알고 있다.
“저 주시는 겁니까?”
“그래.”
“이 귀한 것을 왜 주시는 겁니까?”
“내 마존을 위해 기꺼이 만년설삼을 내어주었으니, 당연히 돌려줘야지.”
내 마존이란 말을 강조했다. 아직은 네 마존이 아니라는 뜻.
“혹시 극악소마를 제게 빼앗길까 봐 겁나십니까?”
그러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정이 지어졌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지어지는 그 특유의 비웃음 말이다.
“먹기 싫으냐? 싫으면 말고.”
“그럴 리가요!”
도로 가져가시려는 것을 재빨리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지금껏 먹은 어떤 영약보다 향긋하고 맛이 좋았다.
진기를 일주천하고 만년설삼의 기운을 완전히 녹여 내공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단계에 오른 내공 경지에 만년설삼의 내공이 더해지자, 내공은 더욱 정순해지고 웅혼해졌다.
내가 운기하던 사이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 저 멀리 대천산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 옆에 가서 나란히 섰다. 감사 인사 대신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먼저 드렸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위험에 빠지는 아들은 그것만으로도 불효자니까.
“알면 됐다.”
“만년설삼을 내려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어디 극악소마에게 양보해 줬다고 이 귀한 것을 내게 줬겠는가? 아버지가 만년설삼을 내려준 데에는 다른 뜻이 있다. 그리고 그 뜻은 내가 짐작한 것이었다.
“네가 말했지. 피를 흘리지 않는 후계싸움을 하겠다고.”
“네.”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느냐?”
“변함없습니다.”
아버지는 더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조만간에 아버지는 후계자를 결정하실 것임을. 만년설삼은 그 후계싸움을 잘 마무리하라는 뜻에서 내리는 선물이었다. 그런 사실을 짐작했기에 만년설삼을 씹을 때마다 귓가에 이런 말이 들렸다.
‘이거 먹고 잘해라!’
아버지가 결정을 내리시겠다면, 나 역시 형과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야 한다.
“형제끼리 손잡고 조만간에 찾아뵙겠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원하는 바였다. 후계자 선정의 마지막 시험.
형 성격을 잘 알았기에, 어쩌면 이 일은 야율한을 죽이는 일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공으론 이제 내 상대가 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마존들이 내 사람이 되었기에, 그래서 오히려 더 힘든 일이었다. 형이 어떤 무리수를 두려 할지 모를 일이었기에.
“밥 다 먹었으면 이만 가거라.”
“침소에 들어가서 아버지 잠옷 입고 딱 한 시진만 더 자고 가도 됩니까? 너무 푹신푹신하고 좋아서 가기가 싫습니다.”
아버지가 한마디 하시려던 그때, 천마전 무인이 와서 보고했다.
“독왕이 돌아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넙죽 인사하고 달려갔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계실 아버지의 시선이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후계싸움은 이번에 끝내겠습니다. 저도 가야 할 길이 머니까요.
* * *
독왕과 천화루주가 탄 마차가 천마신교로 들어섰다.
“저길 보십시오!”
서대룡이 가리킨 곳에 거대한 악귀상이 서 있었다.
“저기 반대쪽을 보십시오.”
반대쪽에도 석상들이 서로 검과 도를 겨누고 있었다. 역대 천마를 재현한 석상도 있었고, 천마혼의 모습을 한 석상도 있었다.
“대단하네요.”
감탄한 듯 대답했지만 지금 천화루주 눈에는 석상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이제 곧 극악소마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극악소마에 대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독왕은 극악소마의 생사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괜찮을 거라 위로도 하지 않았다.
서대룡은 독왕의 그런 모습에서 그가 보기와는 참 다른 사람이란 것을 느꼈다.
어려 보이는 저 풋풋한 외모로 판단해선 안 될 사람이다. 멍하게 독초를 바라보고 있거나, 흙이나 파는 모습은 그의 일부분일 뿐이다.
삼엄한 경계 속에 외원을 통과한 마차가 내원으로 들어섰다. 경계는 몇 배로 더 삼엄해졌다.
이제 일행들이 모두 마차에서 내렸다.
천화루주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딱 멈췄다.
저 멀리서 검무극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천화루주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과연 검무극이 무슨 소식을 전할지. 제발 극악소마가 무사하기를.
가까이 다가온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소마님은 아직 치료 중이십니다.”
검무극은 솔직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본교의 신의께서도 최선을 다하셨고요. 이제 소마님에게 달렸습니다.”
그러자 천화루주가 활짝 웃었다.
“그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극악소마를 하늘처럼 믿고 있는 그녀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검무극이 말해주니까 안심되었다. 검무극이 최선을 다했다면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일 테니까.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우선 좀 쉬십시오. 소마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본교의 귀빈으로 모시겠습니다.”
천화루주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함께 따라왔던 시비들이 그녀를 별채로 안내했다.
그녀가 떠나자 서대룡이 달려가 검무극에게 안기려 했다.
“징그럽게 왜 이래?”
“반가워서 그러는데, 이게 보법까지 써서 피할 일이냐고요. 이 무인이 달려왔어도 이랬겠냐고요.”
서대룡이 다시 달려들었다. 검무극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순순히 안겨주었다.
“이번에는 정말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럼 그때 달려왔어야지. 야율한이 분신술로 나를 포위했을 때 네가 와서 분신 셋은 맡아줬어야지.”
“헛! 놈이 분신술도 썼나요?”
“어디 그뿐이겠어? 악귀 모양의 검기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지.”
서대룡이 슬그머니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아시다시피 저는 조사관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수석 입학을 엉뚱한 데 쓰지 마십시오!”
그런 말을 하려거든 그 눈이 그렇게 이글거리면 안 되지.
“저는 사부님께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서대룡마저 그곳을 떠나자 이제 남은 사람은 독왕이었다. 둘이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어 일부러 나서지 않은 그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독왕님.”
“나야 고생이랄 게 있나? 자네들이 고생했지.”
독왕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번 싸움으로 자네가 얻고자 한 것을 얻었나?”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네, 얻은 것 같습니다.”
더욱 깊어진 검무극의 눈빛을 빤히 쳐다보던 독왕이 천독림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시간 날 때 천독림에 놀러 와.”
걸어가는 그의 허리춤엔 검무극이 선물로 준 피독천잠사 장갑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 *
드디어 극악소마가 눈을 떴다.
특유의 약향이 코를 찔러오는 것으로 자신이 의방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기억은 검무극의 등이었다. 정말 무섭게 내달리는 데 왜 이리 몸이 편하지, 그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몸속을 살피자 전쟁터 같았던 몸속이 평온했다. 종전은 아니었어도 적어도 휴전 상태는 되어 있었다.
몸 상태로 알 수 있었다. 본교에 무사히 도착했고 마의가 자신을 치료했다는 것을. 그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의밖에 없을 테니까.
극악소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상에 걸터앉아 동경을 쳐다보았다. 백색 가면엔 싸웠을 때 묻었던 피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치료하면서도 가면은 손도 대지 않은 것이다.
극악소마는 문득 한순간을 떠올렸다.
죽음을 예감하고 가면을 벗으려고 했을 때, 검무극이 자신의 팔을 잡던 그 순간을.
―나보다 더 잘 생겼을 것 같아서 그 얼굴 안 봅니다!
가면 속 극악소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누군가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깨어나셨소?”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마의였다.
그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극악소마는 인사를 생략하고 검무극에 대해서 먼저 물었다.
“이공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원으로 살면서 그렇게 탈진한 상태는 처음이었지요. 그 상태로 마존을 업고 왔으니…….”
극악소마의 눈빛에 살짝 걱정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마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되오. 지금은 마존을 다시 업고 왔던 길을 더 빨리 돌아갈 거요.”
그제야 극악소마가 안도했다.
“이공자도 며칠 내내 잠만 잤다고 들었소. 하긴, 전서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지칠 만도 했지요.”
전서보다 빨랐다고? 그래, 기억난다. 검무극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달렸는지. 그 와중에도 기운을 나눠 자신의 몸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게 얼마나 심력 소모가 큰일인지는 극악소마는 잘 알고 있다.
검무극 소식을 듣고 나서야 극악소마는 마의에게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마의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감사를 표할 사람은 나외다.”
마의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 평생의 한을 풀어 주셔서 감사하오.”
마의의 마음속에 있던 아들은 이제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자, 우선 몸에 있던 만년설삼의 기운부터 녹이시오. 이공자가 그걸 복용시키지 않았다면, 마존께서는 지금까지 살아계시지 못했을 거요.”
이번에는 극악소마는 검무극이 만년설삼을 자신에게 복용시키던 순간이 기억났다. 자신이 죽을까 봐 오열하던 검무극의 모습도 떠올랐다.
검무극에게 고마워할 일이 너무 많음을 느끼며 극악소마는 눈을 감고 만년설삼의 기운을 녹이기 시작했다.
극악소마가 운기 하는 동안 마의는 사람을 보내 검무극에게 극악소마가 깨어났음을 알렸다.
극악소마가 내력을 모두 녹였을 때, 가면 속 그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깊어졌다.
잠시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섰다.
검무극이 가면을 쓰고 있는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오늘따라 얼굴에 화색이 더 좋아 보이십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검무극의 너스레였던가? 가면에 묻은 피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얼굴에 홍조까지 띠셨습니다.”
극악소마가 소리 내서 웃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죽다 막 살아난 극악소마의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나중에 또 싸우러 가시죠.”
“좋습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참, 본교에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검무극이 문을 열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천화루주였다. 극악소마가 너무 걱정돼서 천마신교 본단까지 왔지만 와서는 안 될 곳을 온 것은 아닌가, 내내 걱정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극악소마를 보는 순간, 그런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그를 봐서 이렇게 기쁜데.
더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극악소마가 화를 내더라도 잘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극악소마는 너무나도 잘 그녀의 마음에 부응했다.
“예전부터 내 방 구경하고 싶다고 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