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46)
절대회귀-246화(246/424)
제246회 이제 그만 그 좁고 답답한 곳에서.
“저는 더 놀고 싶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노세.”
마불은 검무극의 마음을 바꾸는 것에 모든 기대를 걸었다.
“대신 여기선 나가세.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독왕 없이 돌아다니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시죠.”
검무극과 마불이 왔던 길을 돌아갔다.
독왕이 가고 나자 마불은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마불도 독왕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뭐가?”
“저를 찾아 이곳까지 와주셨잖습니까?”
“자네가 요즘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오랜만에 헤엄도 치고, 산책도 하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마불님은 어떠십니까?”
“나도 좋았네.”
하지만 마불의 기분은 그렇게 좋진 않았다. 독왕까지 검무극을 지지한다고 밝히자 마음이 더 급해진 것이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당사자인 검무극의 마음을 바꾸는 것.
“놀아본 놈이 논다고, 오늘 마불님과 신나게 놀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검무극의 솔직한 말에 마불이 대답했다.
“자네야 젊어서 뭘 해야 노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나이 들면 쉬는 게 노는 거라네.”
마불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쉬어본 적도 오랜만이네.”
마불이 항상 긴장한 채 사는 사람이란 것은 이 잠깐 하늘을 보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었다. 깊은 바다에서 올라와 잠시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형 옆에서 악담을 내뱉을 때는 그저 그런 악독한 마존으로만 보였는데…….
“도마님이 항상 제게 말씀하십니다. 힘들면 쉬었다 가라고요.”
마불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힘들어 보이나?”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마불님을 볼 때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부신공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고생하셨습니다.”
마불은 아부로 여기겠지만 말이다.
검무극이 요즘 지키려고 애쓰는 게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으면 미루지 않고 말해주는 것.
마불도 자신의 고생을 누군가 진정으로 알아주길 바랄 테니, 검무극이 이렇게 표현해준 것이다.
고생이 많다, 마불아.
마불은 느꼈다. 검무극의 눈빛에 담긴 것이 진심임을.
마불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눈빛에 격정이 스쳤다.
‘젠장!’
어떻게 저리 젊은데 저런 깊은 눈빛으로 사람을 쳐다볼 수 있지?
마불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검무극은 조용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걷다 경치 좋은 곳에 잠시 멈췄다.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 가시죠.”
“그러세.”
검무극이 흐르는 맑은 냇물에 발을 담갔다.
“시원하니 너무 좋습니다. 마불님도 발 담가보시지요.”
“자넨 겁나지도 않나?”
“뭐가요?”
“천독림에는 온갖 독물이 다 있다지 않은가? 그 냇물에 어떤 독물이 있을 줄 알고?”
“예전에 독왕님께 들었습니다. 흐르는 냇물에는 독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난 됐네.”
“냇물에 마지막으로 발 담그신 게 언제십니까?”
마불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주 어려서 말고는 언제 발을 담갔지? 설마 한 번도 없었나?
“제 소원입니다! 한 번만 같이 담가 보시죠.”
“소원 빌 것이 그렇게 없나?”
“나중에 자랑하려고 그럽니다. 내가 소싯적에 말이야 마불님과 냇가에서 발도 담그고, 산책도 하고, 독초 찾는 내기도 하고. 다 했어.”
마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피가 흐르는 곳이나 첨벙거리던 발인데, 가끔은 이런 호강도 해야죠.”
검무극이 억지로 잡아끌자 그가 못 이기는 척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갔다. 작고 빛나는 발이었다.
“살면서 별일 다 해보네.”
그건 독왕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왕님은 별일 중의 별일이라 하셨죠.
“시원하니 좋죠?”
마불이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이럴 때 보면 젊은이 안 같아서.”
“어려서부터 아버지 눈치만 보고 자라서 그렇습니다. 아시잖아요? 우리 아버지 어떤 분인지.”
“쉽지 않으신 분이지.”
아버지가 만병통치약이긴 하다. 설명하기 어려우면 아버지 핑계를 대면 어느 정도는 이해하니까.
“마불님은 살면서 언제가 제일 즐거우셨습니까?”
검무극의 질문에 마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제였더라?
마불의 머릿속에 지난 세월이 발을 담그고 있는 냇물처럼 흘렀다. 하지만 즐거웠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있었을 텐데.
마불이 대답 대신 검무극에게 되물었다.
“자네는?”
“저는 최근에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워낙 설치고 다녔으니까요. 그중에서 하나만 고르라면 아버지와 사냥 갔을 때가 즐거웠습니다.”
어디 즐거웠던 적이 그뿐이겠는가? 다만 마불에게 마존들과의 일은 전하지 않았다.
“사냥 갔을 때 교주님이 뭐라고 하시던가?”
“제가 이야기만 하면 만날 비웃으시죠. 아시잖아요?”
검무극이 아버지 비웃는 모습을 흉내 냈다. 그러자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네.”
“워낙 많이 당해서 이제 흉내 잘 냅니다.”
여전히 마불은 자신이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지 못했기에 검무극이 또 다른 즐거움들을 생각해 냈다.
“출교해서 다른 사람 행세할 때도 즐거웠고. 아, 제 오른팔인 서 조사관이라고 있습니다. 그 사람 놀릴 때도 즐겁죠.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놀리면 다 받아주는 사람. 바보라서 받아주는 게 아니라 마음이 커서 받아주는 사람. 아, 또 있습니다. 이안이라고 중원에서 제일 예쁜 수하가 있습니다. 얼굴도 예쁜데 똑똑하고 심성까지 착하죠. 그 친구는 생각만 해도 즐겁죠. 또… 혼자 조용히 있을 때도 즐겁고.”
그러는 사이에도 마불은 생각해 내지 못했다.
“마불님은요?”
“난 됐네.”
“아무리 행복했어도 기억 못 하면 그냥 지나가 버리는 거잖아요? 너무 아깝잖아요? 그러니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만 생각해 보시죠.”
검무극은 집요했다.
“저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아무것이나 하나 대답해주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마불이 불쑥 내뱉었다.
“동굴.”
마불은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려서 자주 올라가던 뒷산이 있었다네. 거기 작은 동굴이 있었지. 그 동굴에 들어가 있을 때 기분이 좋았다네.”
마불의 눈빛이 깊어졌다.
어려서부터 작았던 그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친구들이 놀리고 따돌리는 것까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나 형제들조차 남들과 다르지 않게 자신을 대했다는 것은 마불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처음 동굴을 발견했던 그날은 처음으로 동생에게 맞은 날이었다. 몸집이 너무 작아서 몇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도 힘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두들겨 맞은 것보다 더 화나고 억울했던 것은 지켜보던 형들이 말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울면서 혼자 산을 헤매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그 동굴이었다. 작은 몸집이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가 너무 좁아서 아이들도 들어가기 힘들었지만, 마불은 들어갈 수 있었다. 좁은 입구를 통과하자 안에는 어린 마불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틈이 있어서 바깥이 보였다.
그곳에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안심이 되었다.
그날부터 그곳은 마불의 은신처가 되었다.
“그 동굴에 있을 때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네.”
검무극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즐거웠던 순간을 물었는데, 그 어린 시절까지 가야 한다고?
“그 동굴이랑 주위 경관 자세히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건 왜?”
“그냥요.”
마불이 대충 설명하자, 검무극은 묻고 또 물어서 자세한 내용을 들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듣고 난 다음에야 질문을 그쳤다.
“대체 왜 물은 건가?”
“놀라지 마십시오.”
딱!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두 사람은 동굴 앞에 서 있었다.
마불이 깜짝 놀랐다. 어려서의 그 동굴이었다. 자신이 기어들어 가서 세상으로부터 숨었던, 자신만의 안식처였다.
“환술인가?”
마불의 목소리가 떨렸다. 검무극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았지만 환술까지 부릴 줄은 몰랐다.
“시공이환술이라는 무공입니다.”
검무극이 솔직히 대답하자 마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풍천교주의 무공인가?”
“그렇습니다.”
“아!”
한때 풍천교주와 가장 가까운 그였으니, 무공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이걸 자네에게 전수해줬다고?”
“네, 제가 환술을 배운 것은 풍천교주님 이외에는 딱 한 분의 마존만이 알고 계십니다. 아버지도 모르는 비밀이죠.”
“!”
마불은 깜짝 놀랐다.
“이런 비밀을 왜 내게 알려주나?”
“마불님을 이 동굴로 데리고 오려면 알려드려야 하니까요.”
그러자 마불이 냇물에서 발을 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공자!”
그는 정말 화가 나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이 이것이네. 자네의 이런 감정적인 모습! 적인 나에게 이런 비밀을 알려주는 자네의 이 즉흥적인 감정 말이야!”
검무극이 여전히 냇물을 응시하며 말했다.
“마불님이 왜 적입니까?”
“!”
“마불님은 제 마존이 될 겁니다. 다른 마존과 마찬가지로.”
검무극의 시선이 천천히 마불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앉아 있는 검무극과 서 있는 그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그래서 마불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검무극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렬하다는 것을. 너스레를 떠는 검무극은 사라지고, 차기 천마가 되려는 검무극이 있었다.
“제 마존이 되어 주십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불의 가슴이 울컥했다. 벅차오르는 감정과 저 말을 부정하는 감정이 뒤섞였다.
검무극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제가 더 좋아하는 마존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사부님처럼 따르고, 형이나 친구처럼 여겨지는 분들입니다. 당장 아까 독왕님만 해도 개가 되어 함께 짖어도 좋았던 분이죠.”
“그래, 그런데 왜? 자네 말대로 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네가 아끼는 마존들 중에 내가 마지막 줄에 서 있을 텐데. 왜 내게 비밀을 알려준 건가?”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냇물에 잠겨 있는 두 발을 향했다.
참방, 참방.
물장구를 치듯 발을 놀리던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마불님께 ‘이건 제 승부수입니다!’라고 멋지게 말해야 하는 건지, 마불님이 말씀하신 대로 즉흥적인 감정에 불과한지, 아니면 형을 향한 마불님의 그 충성심에 대한 존경인지.”
검무극의 발장구가 멈췄다.
“아니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불이 나직이 말했다.
“언젠가 이런 감정 때문에 큰 실수를 하게 될 거네.”
“그럼 그때 마불님이 저를 말려주십시오.”
“!”
“마불님과 그런 사이가 되기 위해서 저도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독왕님의 거처를 청소했다니까 일을 가려서 하라고 하셨습니까? 아뇨, 저는 천마가 되어서도 필요하다면 마존들의 방을 치워줄 겁니다. 저는 그런 천마가 될 겁니다. 그런 감정적인 천마 옆에서 말려주십시오. 그러면 안 된다, 이 감정적인 천마 놈아! 하고요.”
잠시 사이를 두고 마불이 거절했다.
“싫네.”
여전히 일편단심 대공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그였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마불이 불쑥 말했다.
“동굴 입구를 키워주게. 한 번 들어가 보게. 참, 그리고 동굴 앞에 작은 틈이 있어서 저 아래 마을이 보였지.”
검무극은 마불이 말한 대로 동굴을 바꿨다.
마불이 그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좋으십니까?”
“별로다. 좁고 답답해서 숨이 턱턱 막혀.”
이런 답답한 동굴이 뭐가 좋아서 매일 와서 여기 있었을까?
잠시 그곳에서 마을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어찌나 세심하게 만들었는지 저 멀리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러고 있다가 동굴을 나가 지금 검무극이 서 있는 저곳에서 이곳으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곤 했다. 혹시라도 엄마나 형이 밥 먹으라고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말이다. 물론, 단 한 번도 그 기대감이 충족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을 내려가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하산한 후 고향을 떠났다. 이후로 고향은 가본 적이 없다.
마불이 좁은 틈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돌아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시면 즐거웠던 적 많을 겁니다. 이런 옛 추억이 제일 좋아서 되겠습니까? 처음 무공을 배웠을 때라든지, 마존이 되던 날이라든지. 누군가 마불님을 진짜 인정해 주던 날도 있었을 거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더 행복했던 날이 많았을 겁니다. 오늘은 어떠셨습니까? 즐겁지 않으셨습니까?”
동굴의 좁은 틈 사이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자네는 대체 누군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검무극이 말했다.
“그대의 천마가 될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그 좁고 답답한 곳에서 나오십시오.”
‘에끼, 이공자야!’로 시작하는 말이 나올 법도 했는데, 마불은 말없이 그곳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검무극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잠시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그때 그 새입니다. 이놈아, 이제는 하나도 안 부럽다!”
검무극의 외침에 마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미친놈 말고 표현할 거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고.
검무극이 벌러덩 뒤로 누웠다.
“저는 좀 눕겠습니다.”
파란 하늘에 커다란 뭉게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 구름 좀 보십시오. 제가 만든 거지만 정말 끝내주지 않습니까? 아, 좋다.”
최근에 마불과 여러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바로 지금이 제일 여유롭게 느껴졌다. 항상 팽팽하게 느껴지는 마불의 긴장감이 느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이거면 됐다. 그 느슨함이면 됐다.
검무극은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마불 역시 자신의 마존이 될 사람이기에 아끼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바로 그때였다.
마불도 천천히 뒤로 누웠다.
두 팔로 머리를 받친 후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눈을 감았다.
어려서 이곳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등을 간질이던 풀들의 감촉, 그때 들었던 새 소리, 시냇물 소리. 발을 간질이던 개미. 그 기억들이 현재의 감각과 합쳐지면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검무극도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잠이 솔솔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