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60)
절대회귀-260화(260/424)
제260회 너희들의 이름은.
오랜만에 아버지와 식사를 했다.
이 시간이 너무 좋다. 바둑을 두거나 식사를 하거나. 조용히 아버지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 말이다.
평소 너스레를 많이 떨지만, 사실은 이 순간이야말로 나의 본질과 가장 닿아있기 때문일 거다. 거의 한평생을 조용히 살아왔었으니까.
“수련은 힘들지 않았냐?”
“몸은 힘들지 않았는데, 반복의 지겨움을 참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어찌 참았느냐?”
“나중에는 마음을 비웠습니다. 이 반복은 평생 나의 과제일 텐데, 이 지겨움을 벗어나면 어차피 또 다른 지겨움이 기다릴 텐데, 그냥 하자. 그러다 보니 반복도 지겨움도 저와 하나가 된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조소가 아니었다. 길을 잘 찾아냈다는,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웃음이었다.
아버지에게 내가 제일초식을 어떻게 해석했고, 또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어떻게 반복해서 수련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신나서 자랑하듯이 말했지만, 사실은 아버지에게 정보를 주고 있었다.
참고하시라고.
아버지는 내 해석과 아버지의 해석을 비교해서 더 나은 초식을 만들어내려 노력하실 것이다. 제발 해내시기를.
나는 아버지보다 강해지려고, 혹은 아버지를 이기려고 회귀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온 것이다.
“밥 다 먹었으면 소화나 시키러 가자.”
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저 멀리 보이는 대천산 꼭대기를 보며 말씀하셨다.
“저기까지 누가 먼저 가는지 시합하자.”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버지가 경공 시합을 제안했다.
“제가 쾌속보 대성을 이루면 한판 붙자고 했던 것을 잊지 않고 계셨군요.”
“어떠냐? 자신 있느냐?”
“당연히 자신 있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마존들도 제게 다 나가떨어졌습니다.”
“먼저 출발해라!”
“그럼 제 등만 보고 달리셔야 할 텐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먼저 달려 나갔다. 이렇게 해야 혹시라도 내가 이겨도 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이 있을 테니까.
쾌속보로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대성을 이룬 쾌속보는 과연 아버지라도 이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빨랐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렸을 때 옆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허공에 꼿꼿이 선 채 옷자락을 펄럭이며 날아가고 있었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멋있다!’
나는 죽을 둥 살 둥 달리고 있었다면 아버지는 도도하고 고고하게 날고 계셨다. 대성을 이룬 천마비행술은 마치 아버지를 위한 경공인 것처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래, 멋도 없는데 속도까지 느리면 안 되지.
나는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정말 빛처럼 빠르게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정상에 먼저 도착한 것은 아버지였다.
“졌습니다. 멋에도 지고, 속도도 지고. 바람의 신도 천마에게는 안 되는군요.”
고개를 푹 숙이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쾌속보도 빠르구나.”
다른 무공을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풍신사보만큼은 아버지도 인정하는 무공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천마비행술의 대성을 이루면 마찬가지 결과를 낼 것이다.”
나를 인정하는 말씀이었는데, 아버지가 경공 시합을 하자고 한 것도 방금 저 말씀을 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네게 천마비행술을 전수하겠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앞서 제일초식에 관해 말해준 것 때문이었다. 하나 배웠으니 나도 하나 알려줘야지. 이런 마음이시다. 아버지는 절대 그냥 받는 법이 없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나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경공술의 극의를 깨달은 지금의 네 수준이라면 어렵지 않게 익히고, 대성 역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자, 지금부터 잘 들어라.”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천마비행술의 구결을 전수했다. 내가 잘 외웠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구결 전수가 끝났다.
나는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너무 기쁩니다, 아버지.”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가 천마비행술이 무림 최고의 경공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천마비행술과 풍신사보를 결합해서 좀 더 빠른 경공술을 펼칠 가능성 때문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독문무공을 모두 이어받는 순간이라서 기뻤다. 구화마공과 천마호신공, 그리고 천마비행술까지. 아버지가 익힌 핵심 무공을 모두 배우는 순간인 것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만 일어나거라.”
“네.”
아버지와 함께 대천산 꼭대기 절벽에 나란히 섰다.
저 멀리 천마신교의 전경이 보였다.
“내가 소교주가 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올라왔었다.”
옆에 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고, 그 옆에 할아버지가 서 계신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버지의 꿈은 무림일통이셨지.”
그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안다.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꿈꾸고 계신다는 것을. 아버지도 아신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꺼내기 어려운 말을 꺼냈다. 언젠가 한 번은 해야 할 말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무림일통이라는 대업을 이루셔서 세상 사람 모두의 칭송과 존경을 받게 되더라도…… 제 존경은 받지 못할 겁니다.”
버럭 화를 내실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이제는 잘 알고 계셨으니까.
우린 말없이 저 멀리 있는 천마신교를, 다시 그 너머 펼쳐진 지평선과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 제 친구들 이름 좀 지어주십시오. 저도 멋진 이름 뭐 없나 고민을 좀 해봤는데요. 귀신을 주제로 해서 야귀(夜鬼), 혈귀(血鬼), 백귀(白鬼), 천귀(天鬼) 이렇게 지을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음침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좀 고상하게 달을 주제로 해서 명월(明月), 잔월(殘月), 은월(隱月), 혜월(暳月)로 하거나, 그게 아니면 색을 주제로 해서…….”
바로 그때였다.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동서남북.”
순간 움찔했다.
“농담이시죠?”
아버지는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다못해 매란국죽도 아니고, 청풍명월도 아니고, 동서남북이라고요?
악귀에 쓸데없이 이름 짓지 말란 뜻인지, 아까 무림일통에 대해 말씀드린 것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동서남북이 좋다고 생각해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동서남북!”
다시 한번 확정 짓듯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이렇게 나오시는데 어쩌겠는가?
아, 미안하다. 나의 악귀들아!
“오, 듣고 보니 좋습니다. 동귀, 서귀, 남귀, 북귀. 외우기도 쉽고. 딱 좋네요. 누가 물으면 우리 아버지가 지어주셨습니다! 자랑도 하고요.”
아버지 작명인 것, 다 까발린다니까요! 그럼에도 아버지는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
결국 네 악귀의 이름은 동서남북으로 확정!
* * *
대천산을 내려 온 나는 곧장 통천각으로 향했다.
총군사 사마명에게 이후 내가 해야 할 일을 듣기 위해서였다.
통천각에 들어서는데 마주친 군사들이 정중히 인사를 건네왔다.
호의적인 눈빛들이다. 일의 성격상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니, 이들의 눈빛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엄중한 경계를 몇 차례나 거쳐 통천각 작전실에 들어섰을 때, 사마명은 회의실에서 군사들과 회의 중이었다.
나를 맞은 군사가 사마명에게 기별하겠다는 것을 그냥 두라고 한 후, 나는 작전실에서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곳은 정말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쪽 벽에 설치된 지역별로 나뉜 십여 개의 구멍을 통해 계속 전서가 도착하고 있었고, 군사들은 그것을 사안에 따라 분류했다.
어떤 군사는 서류를 들고 이리저리 뛰고 있었고, 어떤 군사는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또 다른 군사는 중원지형도에 꽂혀 있는 수십 가지 색의 깃발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안 바쁜 사람이 없었다.
무림은 평화로웠지만, 이곳은 전쟁터였다. 아니, 이곳이 전쟁터이기에 무림이 평화로운 것이겠지.
잠시 후 회의를 마치고 나온 사마명이 날 보고 깜짝 놀랐다.
“소교주님,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왔습니다. 제가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릴 테니 방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 집무실로 가시죠.”
“여기서 말씀하시죠. 군사들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습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폐관 수련에서 막 나오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십니다. 이제 좀 쉬십시오.”
“제게 내릴 임무를 한가득 가지고 계신 분이 하실 말씀도 아니시지요.”
사마명과 마주 보며 웃었다.
“수련은 어떠셨습니까?”
“나오자마자 수염도 안 깎고 아버지께 자랑하러 달려갔습니다.”
자랑이란 말에 모든 결과가 다 담겨 있었다.
“감축드립니다.”
“군사님께서 외부 일정들을 조율해주신 덕분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밀렸을 텐데, 무슨 일부터 해야 합니까?”
“우선 하셔야 할 일이 호남지단과 강서지단을 방문하셔야 합니다. 호남지단은 무림맹과 전쟁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충돌하는 곳이고, 강서는 사도맹을 상대하는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두 지단을 방문하셔서 그곳 지단주를 만나고 오시는 것이 첫 번째로 소교주께서 하셔야 할 일이십니다.”
“알겠습니다.”
“공식 임무서는 내일 아침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사마명이 말했다.
“앞으로 소교주께서 본교의 운명에 많은 영향을 끼치실 겁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군사님을 자주 찾아뵈려고요.”
* * *
통천각에서 나와서 거처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한적한 길에서 복면을 쓴 남자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천마전 호위대주 휘였다.
“아저씨!”
“소교주님.”
“그냥 어려서 부르시던 것처럼 극아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지요.”
오랜만에 보는 그가 감격스러웠다.
“이게 얼마 만에 뵙는 겁니까? 아저씨 머리에 흰머리가 많아지셨습니다.”
“저도 나이 먹는 거죠.”
“우리 아버지 모시느라 힘들어서 그렇죠. 엄청 까다롭게 굴죠? 아저씨 막 괴롭히죠?”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입니다.”
정말 내가 아는 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직 호위 임무가 전부인 사람. 아버지가 전부인 사람.
“눈 오는 날 저 업어주셨었는데.”
휘가 웃자 복면 속 두 눈이 달처럼 휘었다.
“그걸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그때 얼마나 좋았는데요.”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휘가 나를 찾은 이유를 밝혔다.
“이번에 출교하실 때 호위들을 데려가십시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원래 혼자 다녀오려고 했었다. 그럴 줄 예상하고 그가 내게 온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교주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호위가 오히려 짐이 될 정도의 실력이라는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휘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제 후배들을 위해섭니다. 그 아이들 소교주님과 함께 있으면 훌륭한 호위로 성장할 겁니다. 근래 소교주님의 행보를 지켜봤습니다. 제가 본 소교주님은 바다였습니다. 제 후배들을 전부 품어주실 수 있을 만큼 큰 바다였지요.”
그의 성격상 내게 와서 이런 말 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천마호위대를, 그리고 후배들을 아꼈다.
그날 이들은 우리와 함께 모두 죽었다.
평생 아버지를 위해 헌신한 휘의 부탁이라면 그래, 열둘이 아니라 천이백 명이라도 데려가야지.
“함께 가겠습니다.”
휘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아저씨.”
나도 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휘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말로 신세를 갚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언젠가 오늘의 신세를 갚으려 들 것이다.
휘 아저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저씨와 후배분들은 이미 목숨으로 갚았습니다.
* * *
내 호위들은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었다.
잠시 그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수련을 멈추고 일제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우렁찬 인사에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지난 백 일 동안 계속 수련한 건가?”
적연이 나서서 대답했다.
“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련했습니다.”
“한데 왜 여섯 명뿐인가?”
“언제 호위 임무에 투입될지 모르니, 주간조와 야간조로 나눠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주야를 바꿉니다.”
다시 말해서 야간조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수련한다는 뜻이었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봤기에 적연의 눈부터 봐주었다.
거절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적연이 순순히 안대를 벗었다.
새빨간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귀안술의 경지가 한 단계 올라갔군.”
그러자 적연이 깜짝 놀랐다.
“맞습니다. 설마 제 눈 색깔만 보고 그걸 알아보신 겁니까?”
“색이 이전과 달라졌어.”
“정작 저는 매일 동경을 봐도 못 알아봤습니다.”
신안술로 차이를 구분해낸 것이다.
그의 눈에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은 신안술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신안술을 익혔는데,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귀안술을 익혔다. 그 다른 사람은 결국 내가 되었고.
그 모든 게 자신의 선택이고 운명이라지만, 남을 위해 눈을 희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의 눈에 진기를 투입해서 다스려주었다.
“느낌이 다릅니다.”
“어떻게?”
“훨씬 더 고통이 줄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공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훨씬 웅혼하고 정순해졌으니까.
“내일 나와 함께 출교한다. 아침 일찍 통천각에서 공식 임무서가 올 거야.”
적연과 호위 무인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드디어 첫 임무를 하게 된 것이다.
감출 수 없는 흥분과 기쁨이 전해져왔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두고 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저희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부터 나 잘 지켜줘. 자네들만 믿고 간다.”
우렁찬 대답과 함께 적연과 호위 무인들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기왕 나가는 것 더 성장해서 돌아오자.
다음 날 아침 두 대의 마차가 교를 나섰다.
정식으로 호위까지 거느린 소교주로서의 첫 출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