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68)
절대회귀-268화(268/424)
제268회 다들 잘 모르더라고요.
비무를 하자는 말에도 서청은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자존심에 살고 자존심에 죽는 성격이었다. 석풍이 보고 있고, 다른 녀석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과 같이 무릎을 꿇고 싶지 않았다.
검무극은 처음 만났을 때 서청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자존심이 강하시다? 하긴 무인에겐 자존심이 생명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청은 살심이 솟구쳤다. 눈앞의 검무극을 검으로 찔러 죽이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달려드는 마인들까지 모두 베어버리는 상상이었다. 모두가 놀라고 감탄하는 가운데 피를 뒤집어쓴 채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그런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은 검무극의 저 맑고도 깊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어찌 감히 마교의 소교주와 검을 나누겠소?”
그는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마교의 소교주에게 달려들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누군가 이렇게 애원했을 때, 그의 부탁은 들어줬나?”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서청은 기억해냈다. 얼마 전, 비무를 시켜 박살 낸 놈이 똑같이 애원했음을. 자신은 상대가 안 된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요?”
“이유는 아까 저 친구가 다 말하지 않았나?”
“저놈 말은 다 거짓이오!”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석풍이 소리쳤다.
“시체를 어디 묻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같이 죽자고 달려드는 그를 보며 서청은 이를 갈았다.
“저 머저리 새끼가!”
두 사람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서청의 시선이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그냥 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소. 하급 무인이었고, 지나가던 행인이었소. 내가 다 보상하겠소.”
검무극이 기도를 개방하며 마기를 발출했다.
그 순간 서청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물 속에 풍덩 빠져들었다.
순식간에 온몸을 죄어오는 압박에 서청은 숨이 막혔다.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려서부터 익힌 내공심법도, 검법도,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도, 그 무엇도 소용없었다.
그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압살당해 죽거나,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 새끼야! 대체 나한테 왜 지랄이냐고! 너도 온갖 것들 다 죽였을 거잖아!’
서청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제발 그만!”
그러자 거짓말처럼 자신을 짓누르던 마기가 사라졌다.
서청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앞에 검무극의 다리가 보였다. 마기를 버티는 중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그가 벌떡 일어났다.
솔직히 서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억울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마교 소교주라면 오히려 자신을 더 이해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에게는 더 하찮은 것들일 텐데.
“보상하겠다니까. 그 가족들이 평생 만져보지 못할 돈으로 보상하겠소. 그럼 그들의 죽음이 오히려 더 값진 것이 되지 않겠소?”
검무극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기에 당연히 서청은 그 웃음을 오해했다. 자신의 운명이 이미 죽음으로, 혹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으로 결정지어졌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 이거지. 아무리 마교라 해도, 우리 천화문은 못 건들지.’
언젠가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있었다. 우리 천화문은 마교에서도 사도맹에서도, 그리고 무림맹조차도 원하는 자랑스러운 문파라고.
“아버지를 불러주시오.”
“그래, 불러주지.”
흔쾌한 검무극의 대답에 서청은 안도했다.
‘됐다, 난 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 하찮은 것들 몇 죽였다고 내가 어떻게 되진 않을 거야. 마인 놈 역시 하급 무인이었으니까.’
중요 인물을 죽이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서청은 두려움을 떨쳐냈다. 언제나 그랬듯 아버지가 오시기만 하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다음으로 검무극은 석풍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석풍은 검무극이 다가가자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이 소교주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아니면 서청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소교주 때문에 넘기게 된 것인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넌 가서 아까 말한 그대로 진술하면 돼.”
그러자 석풍의 시선이 저 앞에 서 있는 서청을 향했다.
검무극은 석풍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그래, 천화문이 겁나서 진술을 번복할 수도 있겠지. 자, 그때부터는 누굴 겁내야 할까?”
검무극이 그의 얼굴 앞에서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주먹이 꽉 쥐어지는 순간!
콰쾅!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눈앞에서 터진 천둥소리에 석풍은 혼비백산했다. 진짜 천둥소리였다.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난다고? 저 주먹에 맞으면 온몸이 가루가 될 것이다.
“아닙니다, 솔직히 다 말하겠습니다. 놈이 저지른 악행이 더 있습니다.”
그는 서청의 죄를 다 일러바치면 자신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체를 같이 묻고, 이곳에서 일하던 청년을 일방적으로 패서 불구로 만들뻔하고. 이런 일 정도는 죄로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다. 검무극은 굳이 그 착각을 깨지 않았다.
“역시. 너는 처음 볼 때부터 똑똑해 보였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청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봤자 나는 못 건든다. 건드릴 수 있었다면 벌써 건드렸지.’
겁주고 건들 수 있는 것은 소야방 같은 곳이다. 천둥소리에 그는 더 확신을 가졌다.
검무극이 신호를 보내자 호남지단 마인들이 와서 그곳에 있던 서청과 석풍, 다른 녀석들까지 모두 내공을 제압한 후 데리고 나갔다.
서청이 자신의 양팔을 붙잡으려는 무인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내 발로 걷겠다!”
서청은 끝까지 당당했다.
그가 너무 당당하니까 함께 끌려가던 녀석들의 표정도 다소 풀어졌다. 잔뜩 겁을 먹었다가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끌려가게 되니까 ‘이거 별것 아니잖아?’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텅 빈 연회장에 또 검무극과 호위무인들만 남았다.
적연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해결하셨군요.”
“내가 말했잖아? 이 일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
“비무를 해서 서청을 박살 내버리실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보러 올 텐데, 그러면 쓰나?”
검무극은 이 순간 두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 일은 이곳에서 폭행을 당한 해진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그를 폭행한 서청의 아버지로 끝나게 될 것이다.
“이 아버지는 어떻게 나오나 보자고.”
* * *
천화문주 서백중(徐伯仲)은 한창 회의 중이었다.
강렬한 눈빛과 차가운 인상을 지닌 그는 호남의 작은 문파에 불과했던 천화문을 호남제일문파로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평생을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그는 오늘도 천화문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 수족인 유맹(柳孟)이 급하게 들어와서 전음으로 보고했다.
―공자께서 천마신교 호남지단에 붙잡혀 가셨습니다.
유맹의 보고에 서백중은 아무 동요도 하지 않았다.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서백중은 아들이 붙잡혀 갔다는 보고에도 차분했다. 그는 하던 회의를 끝까지 마쳤다. 유맹의 보고를 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함께 있던 이들을 모두 내보낸 후, 비로소 그가 물었다.
“소교주가 잡아간 거냐?”
“네, 그렇다고 합니다.”
여소광이 죽고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지단에 와 있다는 소문이 호남지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내 자식인 것을 알고 잡아갔느냐?”
“그렇습니다.”
순간, 서백중의 눈가에 감출 수 없는 언짢음이 스쳤다.
“어쩌다가?”
유맹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공자께서 살인을 저지른 모양입니다.”
서백중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미리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깟 일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누굴 죽였나?”
“여럿인데, 문제는 그중 마교 호남지단 무인도 포함된 모양입니다.”
“멍청한!”
죽여서 멍청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죽이고 확실하게 뒤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모두가 있는 곳에서 밝혀진 사실이라 이번 일을 무마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데 왜 마교에 붙잡혀 간 건가?”
“그 자리에 소교주가 있었답니다.”
“우리 애가 초대한 건가?”
“거기까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인된 바로는 연회에서 소야방의 석 공자와 싸움이 났는데, 그 과정에서 석 공자가 다 누설해 버린 모양입니다.”
유맹은 서백중의 평정심에 언제나 놀라곤 한다. 자식이 마교에 붙잡혀 간 상황에서도 그는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석풍에 대한 분노와 살기를 드러낼 법도 한데,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이 평정심 속에 파묻혀 잊힐 것 같은 일들을 반드시 기억해서 보복한다는 점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석풍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마차 준비하게.”
* * *
“소교주를 뵙습니다.”
서백중은 정중히 검무극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문주님.”
검무극의 외모에 서백중은 내심 놀랐다. 우선 이렇게 젊다는 사실에 놀랐고,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을 외모에도 놀랐다.
“소교주께서 이렇게 미남이신지 몰랐습니다.”
“다행히 아버지를 닮지 않는 덕분에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천마를 언급하자 서백중은 내심 긴장했다.
“교주께서 들으시면 섭섭하다 하시겠습니다.”
“사실 아버지를 닮았으면 살기에는 더 편할 겁니다. 우리 문주께서 이렇게 편하게 저를 대하지도 못할 테고요.”
“제가 초면에 무례를 범했나 봅니다.”
“아닙니다, 오해 마십시오. 저는 편한 것 좋아합니다.”
검무극이 활짝 웃었다.
서백중은 내심 소교주가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대화에 앞서 저런 말을 던지면 상대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고, 그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채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제법이군.’
하긴 아무리 젊다고 마교의 소교주를 쉽게 생각해선 안 될 일이지.
“제 자식놈이 사고를 쳤다고 들었습니다.”
“더 좋은 일로 우리 문주님을 뵈었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일이 바빠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서백중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히 포권했다.
같이 일어나서 괜찮다고, 젊을 때 그럴 수 있다고 해주기를 바라는 사과였는데, 검무극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그렇더군요.”
서백중이 다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요놈 봐라.’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말투는 더욱 공손해졌다.
“아시겠지만 우리 천화문은 호남에서 제일가는 문파입니다. 문도의 숫자도 제일 많고, 지닌 고수도 가장 많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세를 과시한 후,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집안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고 선처를 바랍니다.”
“저도 그러면 좋겠지만 지은 죄가 너무 커서 곤란합니다.”
“본문에서 귀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겁니다. 그 일을 해나가면서 평생 죗값을 갚겠습니다.”
돌려 말했지만, 돈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있었던 심각한 문제들은 대부분 돈과 칼로 해결했기에, 이번 역시 돈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마교 소교주를 칼로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결국 원하는 게 돈 아니냐? 얼마를 원하는 거냐? 이십만 냥? 삼십만 냥?’
그러자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그 일은 여 단주와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죽은 여소광이 언급되자 서백중은 흠칫 놀랐다.
‘이거였구나.’
이제 서백중은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죄지은 놈이 어디 자기 자식뿐이겠는가? 그럼에도 굳이 자기 아들을 붙잡은 것은 여소광과 벌인 일을 밝히라는 압박이었다.
‘십만 냥, 이십만 냥이 아니라 수백만 냥을 뱉어내란 말이구나!’
그는 검무극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말해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회장에 술을 나르는 아이를 위해서 시작된 일이고, 여소광과 관련한 일은 천마신교 지단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본보기라는 것을. 설령 말해준다고 하더라도 다른 속뜻이 있을 거로 의심할 것이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한결같이…….”
검무극은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다들 잘 모르더라고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백중은 이렇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상대는 자신이 내어줄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바쁘신 분 시간을 제가 너무 뺏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서백중이 정중히 포권한 후,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그곳에 적연이 들어왔다.
검무극이 적연에게 말했다.
“서청 그놈, 흠씬 패 버릴 걸 그랬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들 얼굴도 안 보고 돌아가잖아?”
“화가 나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아니. 아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아무리 화가 나고 미워도, 마교에 붙잡혀 왔다면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얼굴 정도는 보고 가야 마땅한 일이다.
한데 지금 서백중은 이제부터 나를 어떻게 상대할지에 모든 정신이 팔려 있다. 당신들도 서로를 안 보고 있구나. 정말 지독하게도 안 보고 있구나.
저 멀리 걸어가는 서백중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로 왔으면 내 싸움은 더 힘들었을 텐데.”
그때 잠시 발걸음을 멈춘 서백중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검무극이 창가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서백중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이 의미 없는 인사 대신 아들을 만났어야지.”
야단을 치든 두들겨 패든, 구해주겠다고 약속을 하든. 아들을 만났어야지.
하긴 그런 부자지간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 * *
늦은 밤 서백중은 홀로 강가에 앉아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일정한 보폭으로, 마치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렇게 걸을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누군가 다가왔다.
한 남자가 안개를 걷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삿갓을 깊게 눌러써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묘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낚싯대가 드리워진 호수를 바라보며 서백중이 말했다.
“아들이 마교의 소교주에게 잡혀갔소.”
마교란 말이 나왔고 소교주란 말이 나왔다. 두 단어가 합쳐져서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말이 되었음에도 삿갓을 쓴 남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해결해 주겠소.”
남자는 왔을 때와 똑같은 발걸음 소리를 내며 안갯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