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77)
절대회귀-277화(277/424)
제277회 감당할 수 있어?
진하군은 일으켜 세우려던 인형에서 손을 뗐다.
사각사각.
다시 나무를 조각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인형을 세우든 눕히든 상관하지 않았을 사부였다.
이 인형이 누구길래?
진하군은 다시 쓰러진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갔다. 결국 진하군은 감히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지만, 등을 돌린 채 엎드려 있던 인형을 슬쩍 뒤집어보았다.
순간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그 나무 인형은 자신이었다. 손가락 크기였지만, 분명 자신임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옷도 그렇고 머리카락도 그렇고.
“접니까?”
나직한 물음에 나무 깎던 소리가 멈췄다.
“그래, 너다.”
진하군은 의아한 마음으로 사부를 쳐다보았다.
‘나라고 하시면서 그대로 눕혀두라고?’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사부가 호남에서의 일을 알고 있음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차라리 그냥 화를 내시지. 호통을 당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체 사부는 이 인형을 깎으면서, 그리고 이 앞에 눕혀두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섭섭함과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실 줄 알았는데.’
그래, 그날의 사정을 모르셔서 이러는 것이리라.
“천화문주 아들이 무고한 이들을 살해했습니다.”
사부는 말없이 조각에 열중했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하라는 뜻이었다.
진하군은 그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말할 수 없었다. 천화문을 포기하는 것이 할아버지의 시험임을 깨달았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애초에 사부가 할아버지의 시험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되지 않는가?
“검선께서 나서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핑계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사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안절부절못하며 사부에게 용서부터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하군은 가만히 사부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돌아오는 내내 검무극 생각을 해서 그랬을까? 정말 거짓말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활짝 웃으며 자신을 보던 그의 얼굴이.
―한잔합시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검무극이라면 이런 순간에도 웃으면서 대처했을 것이다.
그래, 흥분하면 지는 거다.
진하군이 차분히 말했다.
“실망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순간, 나무 깎던 소리가 멈췄다.
백천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예전이라면 심장이 터질 듯 뛰었을 텐데, 이상하게 겁나지 않았다.
백천경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제자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백천경이 들고 있던 인형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진하군에게 걸어왔다.
진하군은 가만히 사부를 쳐다보았다. 예전이라면 눈보다 머리가 먼저 움직였을 것이다.
사부님의 기분이 지금 이렇겠지. 뭐라고 해야 사부님의 화가 풀리실까?
하지만 지금의 진하군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음에 박혀버린 검무극의 그 말.
―지금껏 당신은 똑바로 보고 있었소?
진하군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사부를 쳐다보았다.
사부의 눈빛, 발걸음, 손의 움직임, 그리고 표정까지.
‘낯설다.’
제자를 응시하던 백천경의 시선이 장식대에 쓰러져 있던 인형을 향했다.
“네 인형이 쓰러져 있어서 섭섭했더냐?”
진하군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부께서 만들어주신 제 첫 인형이니까요.”
백천경이 인형을 제자리에 세웠다.
“됐느냐?”
진하군은 잠시 인형을 내려다보더니 그걸 다시 눕혔다.
“아뇨, 이번에는 검무극에게 패배했습니다. 쓰러져 있어야죠.”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백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떻게든 천화문을 네 손에 넣고, 그들을 살렸어야 했다.”
진하군은 말없이 백천경을 쳐다보았다. 역시 낯설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옆에서, 그것도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본 적이 없었구나. 사부를 볼 때도 슥, 할아버지를 볼 때도 슥. 그렇게 사람을 보고 살았구나.
“언젠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천화문에 의해 수백 명의 정파인이 죽게 될 수도 있겠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예전이었다면 곧장 엎드려서 사부에게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지금 사부가 하는 말이 와닿았을 테니까. 아니, 와닿지 않았어도 사부의 말씀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마음이 들었다.
‘왜 일어나지 않은 극단적인 예를 드는 걸까?’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과 저 천화문주를 연결해준 사람은 당신이 맹주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소.
그때는 헛소리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마음에 작은 의구심이 되어 자라나기 시작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 말에 백천경의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그래, 알면 됐다. 이제라도 천화문을 되찾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민해보겠습니다.”
백천경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조각을 다시 하기에 앞서 그가 한마디 내뱉었다.
“맹주께서도 그걸 바라셨을 거다.”
사각사각.
끝까지 진하군의 생각과는 어긋나고 있었다.
‘과연 그러셨을까요?’
할아버지는 자신이 천화문을 포기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할아버지를 똑똑히 보려 노력했기에 그 감정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지금 저 말에 고개를 숙이며 수긍했을 거다. 할아버지를 제대로 보지 않았으니까.
오늘 비로소 진하군은 검무극이 말한 똑똑히 보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우린 서청 같은 자를 용서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린 정파니까요. 정파 중에서도 무림맹주가 될 사람이고, 그 맹주의 사부니까요.’
검무극을 만나고 돌아오니 사부가 달리 보였다.
아니, 어쩌면 사부는 자신이 인지한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단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 * *
그날 밤 진하군은 악몽을 꾸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에게 밤새도록 쫓겨 다녔다. 아무리 도망가도 상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추적해왔다.
지금도 저 멀리 뒤에서 놈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너무 지쳐서 뛰기도 힘들었다.
자포자기 상태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데 길가에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 아는 얼굴도 있었다. 어려서 같이 무공수련을 했던 이들도 있었고, 시비도 있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사람들. 왜 하필 이들이 나오는 걸까? 악몽은 항상 잊고 있었던 이들을 불러낸다.
그들을 지나쳐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뒤쫓아 오는 그림자는 점점 더 가까이 왔다.
이제 죽겠구나 싶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진 대주!
고개를 들어보니 주점의 이 층 난간에서 기댄 채 검무극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올라와서 한잔합시다.
그는 마지막 헤어질 그때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홀린 듯 주점의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반가웠다.
이 층 난간에 검무극과 함께 섰다. 자신을 뒤쫓아 오던 시커먼 그림자는 주점 입구에서 자신을 올려다볼 뿐, 그곳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 무섭던 그림자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때 함께 서 있던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연회장에서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소?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저런 놈을 제지할 수 있겠소?
검무극을 쳐다보던 그 순간, 진하군은 꿈에서 깨어났다.
“후우.”
땀에 흠뻑 젖은 채 진하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검무극이 꿈에 나온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를 만난 후 지금까지 계속 그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꿈속에서 했던 선택들은 너무 어리석었다. 그저 무기력하게 쫓기기만 했다. 직접 싸우든, 멸마대를 이끌고 싸우든,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든. 적극적인 노력과 선택을 해야 했었는데. 그냥 쫓기기만 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점이었다. 자포자기한 채 터덜터덜 걸어가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악몽을 떨쳐내며 그가 벌떡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진하령은 진하군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안 하던 짓은 오라버니도 하네?”
근래 진하군이 자신의 처소를 찾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변하기도 하는 거지.”
“너무 바뀌지는 마, 무서우니까.”
방을 둘러보던 진하군이 자리에 앉았다. 오라버니가 그냥 자신을 찾아왔을 리 없었기에 진하령은 내심 긴장하며 물었다.
“갔던 일은?”
“실패했어.”
“그런 것 치고 얼굴이 좋은데?”
“절반의 실패와 절반의 성공이었거든.”
진하령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진하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지금 뭐가 맞는지, 뭐가 틀렸는지.
“검무극, 그 사람은 어땠어?”
“몰라.”
“그러지 말고 말해줘.”
“모르겠다고. 그 사람을 모르겠다고.”
진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봤네. 그 사람.”
그녀 역시 검무극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저 대답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진하군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하령아, 너는 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어봤어?”
진하령은 놀란 마음으로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지금.”
진하군이 옅게 웃었다.
“진지하게 묻는 거야.”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던가? 아, 있었다.
“검무극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그때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었어.”
“어떻게 넘겼지?”
“내가 넘긴 게 아니지. 검무극 그 사람에게 휩쓸려서 지나간 거지.”
이제는 진하군도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진하령은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의 인생에 변화의 물결이 들이닥쳤음을. 검무극 때문이냐고 묻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때 진하군이 뜻밖의 일에 대해 물었다.
“후기지수 모임 아직도 해?”
“하지.”
“많이들 오겠군.”
“어디 나 보러 오나? 할아버지에게 잘 보이려고 오는 거지.”
진하령은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돌아가면서 초대했다. 개인적인 모임이라기보다 맹 차원에서 후기지수들을 관리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 일을 그녀가 맡고 있었고.
“초대할 사람이 있다.”
“누구?”
그러자 진하군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사람이 나왔다.
“선입견 없이 봐야 하는 사람.”
진하령이 깜짝 놀랐다. 지금 검무극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왜?”
진하군이 대답했다.
“그 사람 도움이 필요해. 네 손님으로 부르고, 우연을 가장해서 나를 만나게 해줘.”
직접 그를 부를 수는 없었다. 무림맹주가 될 사람이 마교 소교주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으니까.
“진심이야?”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저렇게 놀랄만하다. 자신조차도 이건 미친 짓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사부에게서 느낀 이질감은 그의 위기 본능을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처럼 모르고 산다면 모를까, 마음에 피어난 의구심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다.
미룰 일도 아니고 자존심을 챙길 때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해관계가 얽힌 내부 사람이 아닌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외부 사람이 필요했다. 꿈속에서처럼 무기력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왜?”
“몰라도 돼.”
“다시 물어. 지금 멸마대주가 마교 소교주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야?”
진하군이 대답했다.
“네 오라버니가 네 친구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하자.”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본능이 꿈까지 동원하며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그가 필요하다고.
진하령은 망설였다. 철들고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하는 첫 부탁이었음에도 망설였다.
그녀에게도 검무극은 좋은 기억이었다. 이 핑계로 그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오라버니와 얽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무림맹 후계자가 될 사람과 마교 후계자의 관계였으니까.
그래서 불안했다. 오라버니의 일에 마인을 끌어들여도 되는지.
“감당할 수 있어?”
잠시 사이를 두고 진하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무극? 못 해. 감당 못 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 도움이 필요한 거고.”
정확하게 상대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진하령이 안도했다.
“그럼 됐어.”
* * *
나는 시공이환술 속에서 시천비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회귀한 후 지금까지 온갖 사람을 만나고 온갖 일들을 처리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공수련이란 것을 잊은 적은 없다. 나 혼자만의 시간이 되면 언제나 수련에 몰두했다.
시천비술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정말 거북이처럼 더뎠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확 경지가 올라가 버리는 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있어야 할 때면 잠시 눈을 감고 천마호신술을 연마했다. 대성을 한 단계 남겨뒀기에, 최선을 다해 수련했다.
구화마공은 틈이 날 때마다 제일초식만 반복해서 수련했다. 십이성 대성을 이룬 비천검법으로 죽이지 못할 상대도 거의 없겠지만, 만약 나타난다면 제일초식으로 죽일 작정이다. 그래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수련했다. 네 악귀들과는 이젠 친밀감이 들 정도로 보고 또 보았다. 그들이 머무는 시간도 미세하게 늘고 있었고.
그렇게 수련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데, 창밖으로 권마가 산책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권마는 마당 끝에 우뚝 서서 담장 너머 저 멀리 산을 바라보았다.
“사부님.”
나는 권마 옆에 나란히 섰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계셨는지 맞혀볼까요?”
그러자 권마가 흥미를 보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
“절벽 떠올리고 계셨죠?”
“누가 들으면 내가 절벽 부수는 데 미친 것으로 오해하겠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사부님 등이 그렇게 말했거든요.”
권마는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등으로 자신이 누군지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가 그렇고 권마가 그렇다.
그의 등을 볼 때 외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저 등이 얼마나 우직한 등인지 알기 때문이리라. 아버지의 명령이면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천, 수만의 적을 향해 홀로 걸어갈 등이기에.
“사부님, 절벽은 무너뜨리면 안 될 것 같아요.”
“왜?”
“그거 다 언제 치우겠어요? 그리고 거기 절벽이 있어야 멋있잖아요?”
권마가 나를 보며 웃었다. 이 남자의 웃음, 자주 보지 못하는 이 웃음을 나는 좋아한다.
그때 호남지단 무인이 와서 전서를 전했다. 뜻밖에도 진하령이 보낸 전서였다.
―살면서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말해 달라고 했지? 바로 지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