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79)
절대회귀-279화(279/424)
제279회 세상일 모르는 거죠.
이안은 면사가 달린 죽립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다가오자 진하령의 두 눈은 점점 커졌다. 늘씬하면서도 관능적인, 정말이지 쉽게 볼 수 없는 몸매였다.
그래도 아직까진 여유가 있었다.
두 사람 앞까지 걸어온 이안이 천천히 죽립을 벗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진하령은 충격을 받았다.
외모라면 자신 있는 그녀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해도 자신 앞에 오면 평범해지기 마련이었다.
한데 이 상대는 다르다. 또렷하고 시원한 이목구비에, 맑은 눈빛, 탄력 있는 피부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매력적으로 아름다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놀라고 감탄한 이유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만큼은 진하령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비교도 많이 당해보고 예쁜 여자도 많이 만나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다. 저렇게 아름답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거기에 한 가지 더.
이안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안의 기도였다. 기도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마치 눈 내리는 날 핀 한 송이 매화꽃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수다!’
지금껏 봐온 어떤 후기지수도 이런 기도를 보여주진 못했다. 그들은 물론이고 자신마저 압도하는 기도였다.
‘나보다 더 고수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무공까지 강하다고? 설마 성격까지 좋진 않겠지? 목소리가 이상하겠지? 정말이지 이런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어요. 이안이에요.”
쟁반 위에서 옥구슬이 굴렀다. 성격은 아직 알 수 없으니, 일단 외적인 요소만 따졌을 때는 완벽했다.
“진하령이에요.”
진하령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까 그 많은 후기지수 앞에서 연설해도 떨지 않았는데, 이 순간만큼은 떨렸다.
반면 이안은 무림맹주의 손녀를 대하고 있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감이 넘쳤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귀한 분을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 뵈어요.”
진하령의 마음에 떠오른 한 마디!
‘누가 할 소리!’
자신이 외모에서 밀리는 날이 올 줄이야?
그녀의 놀란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검무극이 얄밉도록 뿌듯한 표정으로 으스댔다.
“나 이런 사람이야.”
진하령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재차 확인했다.
“정말 당신 여자친구야?”
여자친구란 말에 이번에는 이안이 놀라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여자친구가 없다고 무시해서, 있다고 했거든.”
진하령은 진하령대로, 이안은 이안대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여자친구 맞냐고.”
검무극이 뭐라 대답하려던 그때, 이안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진하령이 뜻 모를 안도감을 느끼던 바로 그때.
“여자친구보다 훨씬 더 가까운 사이에요.”
진하령이 흠칫 놀랐다.
짧은 반응이지만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진 소저가 도련님을 좋아하고 있구나.’
같은 여자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이었다.
마교의 소교주와 무림맹주의 손녀라.
‘세상 남자 모두가 바라는 조건이 적어도 도련님과의 만남에서는 최악의 조건이 되었겠군요.’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려서부터 제가 호위로 모셨어요. 오랜 시간 뵈어서 드린 말씀이었죠.”
그러자 진하령이 검무극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힘들었겠어요, 저 사람 모시는 일.”
“쉽진 않았죠.”
두 여인이 동시에 쳐다보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공동의 적이 있으면 더 빨리 친해지는 법이지.”
그러자 진하령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공동의 적이긴 해?”
“무슨 뜻이야?”
진하령이 이안에게 말했다.
“그대를 수하로 여겼다면 저 사람 입에서 절대 여자친구란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괜히 떠보는 그 말에 이안은 단호히 말했다.
“오해세요. 제겐 존귀하신 소교주님이시고, 언감생심 그런 마음 가진 적은 없어요.”
검무극을 좋아하는 마음이야 누구보다 깊은 그녀였다. 하지만 자신은 일개 호위였고, 검무극은 천마의 혈육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부모조차 누군지 모르는 혈혈단신이다.
“세상일 모르는 거죠.”
진하령의 그 말은 이안에게 한 말이기도 했고, 또 어쩌면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이안이 검무극에 대한 진하령의 호감을 느꼈듯, 진하령 역시 이안이 검무극을 좋아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주 잠깐 두 여인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진하령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아무튼 허풍쟁이 취급한 것 취소할게.”
“그럼 됐어. 나의 신뢰도 회복 끝.”
이윽고 검무극은 이안을 데려온 이유를 밝혔다.
“이안을 데려온 건, 둘이 미모 싸움을 시키려는 게 아니야.”
“그러면?”
이유는 아주 뜻밖이었다.
“내 친구를 또 다른 친구에게 소개해 주려고 데려온 거지. 둘이 잘 맞을 것 같아서.”
‘또 다른 친구’란 말이 진하령의 마음에 날아들었다.
‘정말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기분이 좋으면서도 조금은 섭섭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두 여인을 서로에게 소개한 후 검무극이 본론을 꺼냈다.
“진 대주는 어디에 있어?”
“오라버니는 왜?”
“진 대주 때문에 부른 것 아니었어?”
“어떻게 알았어?”
하여튼 이 사람, 이젠 놀랍지도 않다.
“네 오라버니가 우연히 만나게 해달라고 네게 부탁했겠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고? 설마? 우리 감시해? 내 주위에 사람 심었어?”
농담이 아닌 진심이기에 오히려 검무극을 웃긴 말이었다.
“정말 그 정도로 뛰어난 세작들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세작을 안 하는 게 문제지.”
그렇다는 말은 검무극이 추측으로 알아냈다는 의미. 그래, 이런 사람이니 오라버니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겠지.
“나 친구로 생각해?”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약속 하나 해. 우리 오라버니 해치면 안 돼. 그럴 거면 차라리 날 죽여. 알았지?”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들었어? 내가 진 대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면, 여기 이 사람 죽이면 돼.”
“친구하라고 소개해 주고선 너무 가혹한 명령 아니세요?”
이안의 말에 진하령이 옅게 웃었다.
“오라버니는 저기 후원 끝에 있는 객방에 있어. 내가 기별하면 당신을 만나러 나오려고 대기 중이지.”
“내가 가서 만날게.”
“오라버니가 자존심 상해할 텐데.”
“자존심 지키려고 했으면 애초에 날 부르지도 않았을 거다. 그럼 나중에 봐.”
말을 마친 검무극이 진하령이 알려준 곳을 향해 걸어갔다.
둘만 남자 그녀들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진하령이 이안에게 물었다.
“연회에 같이 갈래요?”
아름다운 두 여인이 함께 연회장으로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난리가 날 것이다.
이안이 정중히 거절했다.
“다음에 초대해 주세요. 오늘은 제가 갈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네, 그럼 다음에 봬요.”
서로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몇 걸음 걸어가던 진하령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우리 또 볼 수 있을까요?”
진하령은 이안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어떤 여인인지 궁금했고, 그녀가 아는 검무극과 자신이 아는 검무극이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했다. 이안이 아름다워서 더 끌리기도 했고.
“물론이죠. 저는 도련님과 항상 함께 있을 겁니다. 저를 보고 싶으시면 도련님을 찾아주세요.”
“그러죠.”
진하령은 연회장으로 돌아갔고, 이안은 조용히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 *
진하군은 객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이 연락을 주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가서 검무극을 만날 작정이다. 후기지수 모임에 자신이 참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미친 짓이야.’
사부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될 것이다. 할아버지가 아시면? 역시 크게 실망하시겠지. 문제가 생겼는데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마인을 끌어들였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자신은 검무극을 끌어들였다. 그만큼 큰 위기의식을 느꼈던 거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창가를 지나다 발걸음을 멈추고 안을 쳐다보았다.
진하군과 눈이 마주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진 대주! 당신 왜 여기 있소? 난 그대 동생이 초청해서 회합에 참석한 길이었소. 뒷간이 어디 있나 찾던 중이었는데, 이런 우연이 있소? 역시 우린 운명이 이어진 관계인가 봅니다.”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던 진하군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안 되는 연기 그만하고, 들어오시오.”
검무극이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소?”
“그야 동생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당신과 여기서 만날 리가 없으니까. 당신 뒷간 못 찾아서 헤매고 다니는 사람 아니잖소?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사람은 더욱 아니고.”
“역시! 우리 진 대주, 똑똑하시오. 나중에 무림맹 치려면 우리도 머리 엄청나게 굴려야겠소.”
“지금 당신 장난 받아줄 마음 아니오. 그러니 그만하시오.”
진하군은 이 순간이 자기 인생에서 어떻게 회고될지 걱정되었다. 정말 멍청한 선택이었다로 시작될지, 아니면 그때 그 선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로 시작될지, 그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내가 부른 것은 어떻게 알았소?”
“당신에게 무림맹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까.”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맹주가 되기 위해 천화문도 포기한 당신이지 않소? 그 사실 하나만 봐도 당신이 얼마나 무림맹주가 되고 싶은지 알 수 있지.”
진하군은 침묵으로 그 말을 수긍했다.
“혹시 나를 부른 것이 마음에 걸리시오? 그 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진하군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검무극에게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아직 후계자가 아니지 않소? 후계자가 후계자를 불렀다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멸마대주가 동생 친구를 부른 거요. 도움을 바라서 부른 것이 아니라, 조사할 것이 있어서 부른 거요.”
“그럼 당신은 후계자도 아닌 일개 무림맹 대주가 불러서 온 것이지 않소? 마교 소교주가 말이오.”
“나는 괜찮소. 나는 통이 큰 사람이니까.”
“그걸 잘도 자기 입으로 말하는군.”
“말 안 해주면 당신은 내가 통이 이렇게 큰 걸 모를 거 아니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세상 이목을 걱정하느라 말이오.”
“정말이지 당신은…….”
“자기 자랑과 상대방 욕을 동시에 할 줄 아는 사람이지.”
어떻게 말로 검무극을 상대하겠는가? 결국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진하군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검무극이 일어나 구석 탁자에 놓인 주전자에서 차를 부으며 물었다.
“나는 왜 부른 거요?”
막상 대답하려니 진하군은 망설여졌다. 사부에 관한 이야기를 정말 해야 하나. 다른 사람도 아닌 사부에 관한 이야기를.
검무극이 차를 두 잔 가져왔다. 그 모습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검무극이 진하군을 맞이하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왜 나를 불렀는지 내가 알아맞혀 보겠소.”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던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당신은 그 사람을 당신 손으로 죽이게 될까 봐 두려운 거요.”
“!”
순간 진하군은 두 눈을 부릅떴다.
“차마 당신이 죽이지 못해서 나를 부른 거요. 당신의 칼로 쓰기 위해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지만, 동시에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진하군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음을 인정했다. 결국 사부를 죽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번 떠오른 그 예감은 내내 자신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맹주께 말하지 않은 거요?”
검무극의 진지한 눈빛에 진하군은 이제 모든 것을 밝혀야 할 때임을 느꼈다.
“믿지 않으실 테니까. 설령 믿으셔도 이번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먼저 알아차릴 거로 생각했소. 맹 내부에 그의 눈과 귀가 되는 사람이 여럿 있을 테니까.”
“그 사람이 누구요?”
진하군은 드디어 그 존재를 밝혔다.
“내 사부요.”
사부의 존재는 검무극도 처음 알았다.
“당신에게 사부가 있었소?”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아서 모를 거요. 사부는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화무기에게 무림맹 맹주전이 밀리고 무림맹주와 그의 혈육이 모두 죽었을 때, 그의 사부는 그 희생자들 속에 없었다. 적어도 제자를 지켜주다 죽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이번 일을 통해 알았소. 우리 사부가 이상하다는 걸.”
“맞소. 사부들은 항상 이상하오. 내 사부는 절벽을 주먹으로 무너뜨리려 하고 있으니까.”
검무극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이런 심정이었다.
“차라리 그런 쪽으로 이상한 사부였으면 좋겠소.”
“어떻게 이상했소? 자세히 말해보시오.”
“확실한 증거가 없소. 그냥 느낌이오. 그런데도 당신을 불렀으니…… 정작 이상한 사람은 나일지도 모르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 똑똑해서 그렇소.”
검무극의 말에 진하군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오?”
“이번 일은 내가 봐도 확실히 이상했소. 애초에 천화문주가 당신네 쪽에 도움을 바란 것부터 이상했지.”
“우리 사부가 천화문주와 친한 사이였을 수도 있지 않소?”
“그럼 하나 묻겠소? 당신 사부가 복수를 언급했소?”
진하군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사부의 위화감에 집중하느라 그 점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진하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놓치고 있었던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화문주의 죽음을 애도했소? 아니, 누가 죽였는지 묻기는 했소?”
애도도 없었고, 누가 죽였는지 묻지도 않았다.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지? 정말이지 너무나 기본적인 생각이었는데.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까운 사람이라서 오히려 더 못 보지 않냐는 말이오.
어떤 일이 벌어지면 이런 객관적인 판단보단 수많은 지난 추억들과 그와의 관계부터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당신 사부가 뭐라고 했소?”
“천화문을 되찾자고 했소. 나보고 방법을 찾아내라고.”
“고작 이런 사이인데 천화문주는 왜 당신 사부에게 도움을 청했을까? 대체 어떤 사이이기에? 객관적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소? 무림맹주 손자의 사부가, 천마신교의 세력에 있는 천화문주와 이해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당신 본능은 잘 작동했소. 나를 부른 선택도 아주 훌륭했고.”
검무극의 칭찬 공세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맹주가 되었을 때가 기대되오. 당신 같은 현명한 사람과 함께 하고 싶소.”
검무극은 끝없이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긴 이렇게 사람을 뒤흔드는 사람이었으니, 위기의 순간 그가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겠지. 꿈속까지 찾아와 자신에게 믿음을 줬던 것이리라.
진하군은 더는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소?”
마지막까지 검무극은 진하군의 마음속 대변인이었다.
“저쪽이 당신을 가지고 놀려고 했으니, 위험한 장난감이 되어줘야 하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