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84)
절대회귀-284화(284/424)
제284회 응수타진이 아니라 일격을.
깊은 밤, 백천경은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을 밝혀주는 것은 반딧불이였다. 반딧불이들은 그의 주위를 맴돌며 길을 인도했다.
그가 지날 때마다 나무와 풀들이 스스로 움직여서 길을 만들었다. 아무도 그곳에 길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한 곳에 길이 생겨났다. 그가 지나가자 풀과 나무들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백천경은 숲속 깊숙한 곳에 멈춰 섰다.
스스스스슷.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 풀들이 흔들렸고, 나뭇가지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풀숲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다. 옷 색깔은 물론이고 피부색까지 숲과 하나가 된 듯한 이들이었다.
그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풀처럼 느껴지는 이 남자의 이름은 초림(草林), 백천경의 진짜 제자였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목왕의 제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하군이 검술을 배웠다면, 초림은 백천경의 진짜 독문무공인 목형천혼술을 익혔으니까.
백천경이 초림에게 말했다.
“때가 되었다.”
그러자 초림의 눈빛에서 은은한 녹광이 흘러나왔다.
“원래 계획보다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변수가 생겼다.”
“저흰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
“어쩔 수 없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백천경은 지난 사흘 동안 자신을 방문했던 검무극을 떠올렸다.
검무극은 옆에 앉아서 나무 깎는 것을 흉내 내었다.
실없는 소리를 하며, 진하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술과 안주를 사 와서 함께 먹자고 조르기도 했고, 가늘고 긴 눈이 너무 매력적이라면서 뜬금없이 외모를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다 무림에서 있었던 여러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아는 것도 많았고, 재치와 통찰력도 있었다. 녀석의 입은 쉬지 않았다. 검무극과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흘째 되던 날 문득 이런 재미난 놈이 수하나 제자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백천경은 깨달았다.
‘이놈은 독이구나.’
그냥 독이 아니었다. 독인지도 모르게 서서히 중독되어 어느새 죽음에 이르게 되는, 어쩌면 단숨에 상대를 죽이는 맹독보다 더 무서운 독이었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게 되는 독이었으니까.
그의 본능이 이렇게 말했다.
‘이자는 뭔가 알고 있다.’
어떻게? 나는 잘 숨어 있었는데? 그 긴 세월 맹주까지 속였는데?
하지만 그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고 가정하자, 검무극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었다.
본능이 다시 말했다.
‘실실 웃고 있는 저자는 널 잡아먹기 위해 온 사신이다.’
백천경은 그때 결심했다.
‘운명이 이자를 내게 보냈다면,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래, 장장 십 년을 기다렸으면 됐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다.
백천경은 초림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주었다.
앞서 만들었던 여인 인형이었다.
* * *
이안과 진하령이 들판에 마주 서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리했다. 세 번째 만남에서 그녀들은 비무를 하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만남에서 친구가 되자고 한 것도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세 번째 만남에서 비무는 더욱 평범하지 않았다.
처음에 이안은 진하령의 의도를 의심했다. 무림맹주 손녀가 뭐가 아쉬워서 굳이 자신과 친해지려고 할까?
‘도련님 때문이겠지.’
검무극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 혹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
하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 이안은 느꼈다. 진하령이 진심으로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 세 번째 만남에서의 비무는 그런 마음을 알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라면 비무를 통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했을 테니까.
두 여인이 검을 뽑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둘의 실력 차이는 명백했다.
채 이십 수가 지나기도 전에 진하령의 손에서 검이 날아갔다.
놀란 진하령이 물었다.
“무슨 무공이야?”
묻고서 진하령은 아차 했다. 비무에 졌다고 대뜸 네 무공이 뭐냐고 묻는 것은 더없이 실례였으니까.
“아, 미안.”
그녀가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한 수 잘 배웠어.”
이안은 미안한 표정으로 함께 포권했다.
검술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이 비천검술을 전수받은 사실은, 설령 천마가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되도록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될 일이었으니까.
“나보다 강한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강한 줄은 몰랐어.”
“친구라면 실력을 숨기지 않는 게 예의라 생각했어.”
무공만큼은 반드시 이기고 싶었는데.
예전 소룡전에서 서대룡에게 지고, 오늘 또 이안에게 졌다. 젊은 마인들에게 계속 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이었다면 나는 죽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그들 두 사람 모두 검무극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점. 그랬기에 서대룡도 이안도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녀는 애써 패배감을 떨쳐내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서 검집에 넣었다. 쓸데없는 질투로 그 검을 주워서 자신의 자존심을 찌르지 않았다. 그래, 검은 검집에 넣는 거고, 자존심은 남이 지켜주는 거고.
“얼굴 예뻐, 성격도 좋아, 무공도 강해. 이거 반칙 아니야?”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하령의 진담이었다.
그러자 이안이 그 말을 되돌려주었다.
“너야말로 평생 들어온 이야기잖아?”
이안은 진심으로 진하령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자신이 본 여인 중에서 진하령이 제일 예뻤으니까.
진하령은 이안의 말이 승자의 위로가 아니라, 진심임을 느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더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랬기에 돌아오는 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 이 길 정말 예쁘다.”
“가끔 답답할 때 오는 곳이야. 내 비밀 산책로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돌아오다가 진하령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솔직히 오라버니가 걱정돼.”
“걱정하지 마. 도련님을 부른 것,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저 말이 듣고 싶어서 꺼낸 말이기는 했지만.
“너는 네 소교주를 정말 믿는구나.”
“나보다도 더 믿지.”
“살면서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정말 큰 축복이야.”
“너도 믿으면 되잖아?”
“뭐?”
“도련님하고도 친구하기로 했다면서? 그럼 믿어.”
진하령이 오라버니에게 했던 말이었다.
검무극을 어중간하게 믿지 말고 확 믿으라고. 그 말을 이안에게 듣고 있다.
그녀의 머릿속에 믿음이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차례대로 잡아먹는 그런 엉뚱한 상상이 스쳤다.
이안의 믿음에 진하령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만약 이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 마인들에게 당하는 것이라면, 남녀 사기꾼에게 당하는 꼴이 될 거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직 완전히 다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나중에 당해도 싸다.
“내일 또 보자. 너 돌아가면 언제 또 보게 될지 모르잖아?”
“좋아, 내일 봐.”
이안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쩌면 평생 못 볼 수도 있을 거다. 아니면 서로 죽여야 할 전장에서 만나야 할 수도 있고. 진하령과의 관계는 그런 관계였으니까.
“같은 시각, 같은 장소.”
“좋아.”
검무극은 알았을까? 친구하라고 소개해 주면서, 진짜 이런 친구가 될 줄.
진하령과 헤어지고 얼마나 걸었을까? 이안은 왠지 모를 서늘함에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어느새 진하령은 아름다운 오솔길에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조금 전과 변함없는 그 길을 잠시 쳐다보던 이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오늘도 어김없이 백천경을 찾아갔다.
한데 그는 공방에 없었다. 지난 며칠 매번 있었는데, 어딜 간 것일까?
암튼 그 덕분에 오늘은 종일 수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주된 수련은 시천비술.
목왕의 등장 때문이었을까?
집중력이 평소와 달랐고 그 결과 시천비술 역시 평소 수련의 효과보다 더 나은 결과를 보였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지겨워서 온몸이 거부해도 하고 또 했다.
수련한다는 것은 커다란 통에 매일 물을 한 방울씩 넣어서 통을 가득 채워야 하는 과정과도 같다.
지겨워도 참아야 한다. 표가 나지도 않는 그곳에 종일 힘들게 만들어낸 물 한 방울을 채워 넣어야 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아무 변화가 없는 그 큰 통을 들여다보며 한숨 쉬지 말아야 하고, 이거 채우다 인생을 끝낼 거냐고, 이제 그만하고 다른 즐거움을 찾자는 유혹도 참아야 한다.
참아내야만 그 수많은 한 방울 중에서 특별한 한 방울을 만날 수 있으니까.
오늘 그 특별한 한 방울은 바로 무아지경으로 찾아왔다.
지금 수련 중이라는 것조차 잊은 채, 온전한 나의 모든 정신이 시천비술에 빠져든 것이다.
무아지경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선물.
이번 무아지경의 계기는 화무기였다. 그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의 집중력을 더욱 높였고, 그것이 무아지경으로 이끈 것이다. 물통에 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갔다.
그렇게 일각 같았던 열 시진이 지났을 때.
‘드디어!’
시천비술은 현실에서의 무공 수련보다 더 효과적인 단계에 올라섰다.
소모된 내공을 회복하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이제는 시천비술 속에서 무공 수련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난 드디어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해냈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정말 날아갈 듯 기뻤다. 아버지에게 구화마공을 전수받을 때만큼이나 기뻤다. 너무 기뻐서 시공이환술 속을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이제 본격적인 수련의 시작이었다. 내 시간은 점점 많아질 거다. 난 시천비술 안에서 시천비술을 익히고 있었으니까.
* * *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에서 나와서 잠시 쉬고 있는데 이안이 방으로 들어왔다.
“어? 언제 돌아오셨어요?”
검무극은 내내 시공이환술 속에서 수련 중이었기에 외출했다가 돌아온 줄 알았던 모양이다.
“도련님. 혹시 진 소저 만나셨어요?”
“아니. 왜?”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나오지 않았더라고요.”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닌데.”
“따로 사람을 보내 기별도 안 했고?”
“네. 그래서 좀 걱정되고 신경이 쓰이네요.”
백천경이 공방을 비운 사실을 떠올렸다.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고, 공방을 비울 상황이 아니고. 공교롭게도 두 상황이 동시에 일어났다.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지?”
“어제 낮에요.”
“어디서?”
“서쪽에 있는 들판에서 만나서 비무했어요.”
“그리고는 헤어졌어?”
“오솔길을 같이 산책하다가 헤어졌죠.”
“그때 이상한 점은 없었고?”
그러자 이안이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마음에 걸렸던 점을 전했다.
“돌아오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돌아보긴 했어요.”
의심스러운 상황이 한 가지 더 보태어졌다. 이안의 경지에서 뭔가를 느꼈다면, 분명 어떤 일이 있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이 불안의 마지막을 완성할 일이 벌어졌다.
멀리서부터 안가 주위로 수많은 무인이 포위하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이런 대규모 인원이 안가를 포위한다면 무림맹 무인들일 테고. 검무극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솔길이었다면 주위에 나무들이 많았겠지?”
숲에서 백천경이라면 이안의 눈을 속이고 그녀를 납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를 납치할 사람은 오직 백천경뿐이었으니까.
‘응수타진 정도가 아니라 일격을 날렸다.’
검무극의 심각한 표정에 이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진 소저, 괜찮겠죠?”
“아직은.”
무림맹주 손녀를 납치한 후, 이 일을 원만하게 끝낼 방법은 없다. 그렇다는 말은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겠다는 의미.
그나마 다행은 백천경이 신중한 자라는 점이다. 그녀를 죽일 때 죽이더라도, 시작부터 죽일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때 구해내지 못하면 그녀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다.
‘놈이 원하는 것이 뭐지? 나를 죽이려고? 아니면?’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곧 무림맹 무인들이 들이닥칠 거다.”
“저도 방금 느꼈어요.”
검무극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이안이 복면을 올려 얼굴을 가린 후, 죽립을 눌러쓰고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사방에서 수십 명의 고수가 그곳을 겹겹이 에워쌌다. 느껴지는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중원에 나온 이안이 처음으로 맞는 위기였지만 그녀는 침착했다. 검무극과 함께 있으니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안정되었다.
잠시 후, 마당으로 일단의 무인들이 들어섰다.
선두에 선 사람은 무림맹주 진패천이었다. 그의 주위로 무림맹주를 호위하는 고수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자 진패천은 인사 대신 대뜸 물었다.
“하령이 지금 어디에 있나?”
언제 왔고, 왜 왔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진패천은 진하령이 우선이었다.
“저도 모릅니다.”
“다시 묻겠네. 하령이 지금 어디에 있나?”
금방이라도 진패천의 분노한 기도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예전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이미 출수해서 검무극을 제압하려 들었을 것이다.
검무극은 진패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맹주님.
―왜 말로 하지 않고 전음을 보내는 건가?
―이곳에 그자의 눈과 귀가 있을지도 몰라서입니다.
―누구?
―백천경입니다.
순간 진패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누군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네, 진 공자가 십 년을 배운 사부죠. 그 사부에게 진 공자는 위험을 느끼고 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진패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찌 믿겠는가? 자신의 손자가 사부에게 위험을 느끼고, 마교의 소교주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지금 진 공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멸마대 일을 처리하러 외부에 나가 있네.
―진 공자가 자리를 비운 시기까지 맞췄군요. 이 자리에서 맹주님과 저와 충돌이 벌어지기를 바랐을 겁니다.
―하령이가 사라졌을 시간, 백천경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있었네.
왜 그가 공방에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 사건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람과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를 납치할 실력을 지닌 수하가 있다는 의미.
―제법 계획을 잘 세웠지만, 백천경은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놓쳤습니다.
―어떤 것을?
―맹주님이 저를 믿고 계신다는 점 말이죠.
진패천이 차갑게 물었다.
―왜 내가 자네를 믿는다고 생각하나?
―제가 일을 꾸몄다면 절대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을 것임을 맹주님께서는 알고 계시니까요.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믿어주셔야 합니다.
검무극은 더없이 맑은 눈빛으로 진패천을 바라보며 차분히 덧붙였다.
―이번에도 오직 저만이 진 소저를 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