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90)
절대회귀-290화(290/424)
제290회 마교가 우리보다 멋있으면.
진패천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울림이 있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무림맹주로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갖 경험을 다 한 그였다.
그리고 이제 화석처럼 메마른 감정은 습관적으로 작동할 뿐이다. 습관적으로 웃고, 습관적으로 화내고, 습관적으로 슬퍼하고.
하지만 지금 이 감정의 울림은 진짜였다.
깊게 상처 난 그곳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다. 상처를 도려내고 싶었지만, 도려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상처가 남았다. 그래서 덮고 살았다. 안에서 곪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어차피 그 정도 상처는 누구나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했으니까. 해야 할 일이 많은 자신이었으니까. 자신은 무림맹주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진패천은 느꼈다. 상처의 고름이 씻겨 내려가며 아물기 시작했다는 것을.
스스로 수십, 수백 번 같은 말을 했었다.
나는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한데 남이 그 말을 해주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이제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고작 말 몇 마디에 이런 느낌을 받다니.
원래라면 자존심이 상했을 거다. 애써 부정했을 거다.
한데 맑고 깊은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검무극을 보고 있자니 꿈틀대며 깨어나려던 자존심은 다시 조용히 잠들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검무극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맹주는 이 순간 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저 말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정말 중요하다. 상처의 마지막 치료는 언제나 당사자의 몫이었으니까. 맹주는 지금 상처에 마지막 붕대까지 잘 감았다.
“맹주님과는 달리 백천경은 마지막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죠.”
검무극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하던 이야기로 돌렸다.
“나는 지금껏 그들을 멸문시킨 자가 목천가 문주의 동생이라 생각하고 있었네. 그날 멸문했을 때 그는 그곳에 없었고, 얼마 후 자결한 시체로 발견되었으니까.”
“결론적으로 그 시체는 그가 아니었습니다.”
목천가와 관련된 일이니, 당시 진패천은 얼마나 신경 써서 그 일을 조사했겠는가? 한데도 속아 넘어갔다.
“그럼 누가 그들을 멸문한 건가?”
“누군가 백천경의 복수심을 이용한 자가 있습니다. 그의 죽음을 위장하는 것을 도왔고, 새 신분으로 무림맹에 잠입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아마 그가 목천가를 멸문시켰다고 짐작합니다.”
진패천은 생각이 깊어졌다. 시체를 조작하고, 맹에 잠입하고. 이건 단순한 사적인 적의(敵意)나 악의(惡意)가 아니다. 이건 전쟁이었다.
상대는 계략만 부리는 인물이 아니다. 목천가를 멸문시킨 것으로 자신의 무력까지 증명했으니까.
“누군가 무림맹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혹여라도 마교 쪽 인물이 아닐까 괜한 심력 소모는 피하도록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 저까지 죽여 본교와의 전쟁까지 획책하려 했습니다. 그러니 놈은 본교의 적이기도 합니다.”
검무극은 애초에 맹주의 아들 내외를 죽인 것부터 그자의 음모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거기까진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배후를 찾아내기 위해 철저히 조사하겠네.”
“저도 놈을 찾아낼 겁니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적어도 이 배후 놈을 잡는 일만큼은 저도 돕고 싶습니다.”
검무극은 천마신교의 도움 대신 자신으로 한정했다. 마교와 손을 잡을 필요까진 없고, 자신과 손을 잡자는 말로 맹주의 부담을 줄여준 것이다.
진패천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지.”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진 공자와 진 소저만 만나고 곧장 떠날 겁니다.”
“잠깐.”
돌아서 나가려는 검무극을 불러세우더니 진패천이 천천히 다가왔다.
진패천과 같은 고수가 다가서자 검무극의 천마호신공이 스스로 발동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 순간만은 천마호신공이 헛수고를 했다.
진패천은 검무극을 와락 안았다.
“무림맹주가 아니라 하령이 할아비로서 자네에게 정말 고맙네.”
검무극도 함께 그를 안아주었다.
“다시 뵐 때까지 보중하십시오.”
물론 한마디 너스레도 잊지 않았다.
“무림맹주가 안아준 마교 소교주 있었으면 나와보라고 하십시오!”
진패천이 호탕하게 웃은 후 솔직히 말했다.
“안아주는 걸로 때운 거네. 마음 같아선 자네에게 뭔가 거창하게 보답해주고 싶었지. 본맹 보물창고에는 온갖 영약과 신병이기들이 쌓여 있거든.”
“그럼 주십시오. 제발 주십시오!”
검무극이 사양하지 않고 말하자 진패천은 웃었다.
“미안하지만 거절해야겠네. 그랬다가 그 힘까지 보태서 우릴 칠까 봐 두렵다네.”
“마음의 빚을 남겨놓는 것이 더 두렵지 않으시고요?”
“!”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물질적인 보상은 제가 사양합니다.”
정중히 예를 표하고 돌아서 나가는 검무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패천은 정말 아깝다고 생각했다.
마교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예전에 진하령이 시종과 혼인하겠다고 검무극을 데려왔을 때가 떠올랐다.
‘차라리 시종이었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진패천의 진심이었다.
* * *
진하령이 비명을 지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의방이었다.
“괜찮아?”
놀라 뛰어 들어온 진하군이었다.
“죽는 꿈 꿨어.”
초림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마존들이 도착하는 꿈이었다.
대성통곡까진 아니더라도 한 방울 눈물은 흘려주리라 여겼는데, 이안은 마존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자신이 죽은 것에는 신경도 안 썼다. 죽은 것보다 그게 더 악몽이었다.
제대로 본 건 이제 겨우 세 번인데 뭐가 섭섭하냐고?
그게 어디 보통 세 번인가? 첫 번째는 친구하고, 두 번째는 비무하고, 마지막은 구출하고. 정말 이런 인연도 쉽지 않다.
“이제 그럴 일 없다.”
“어떻게 장담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건 내가 만들어야지.”
웃고 있었지만 진하령의 눈빛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진하군은 이번 일을 통해 동생이 성장했음을 느꼈다.
“내가 얼마나 잤어?”
“반 시진쯤.”
진하령이 몸을 일으켰다. 혹시나 자고 있을 때 검무극이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인사는 하고 보내야지.
“검무극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너 깨면 인사하고 간다고.”
검무극이 기다려줬다는 말에 진하령은 내심 감격했다.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에게 진하군이 말했다.
“알지?”
“뭘?”
“안 되는 것. 애초에 마음 주지 마.”
“왜? 걱정돼? 하나 있는 동생이 마교 소교주에게 마음이라도 빼앗길까 봐?”
그러자 놀랍게도 진하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까 걱정돼.”
“이럴 때는 내 동생 믿는다, 그런 걱정 안 해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걱정돼.”
상대가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기분 나빴겠지만, 진하령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적어도 검무극과 짝을 짓느냐 마느냐의 일이었으니까.
“오라버니, 나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만큼 순진하지 않아.”
“그럼 됐어.”
밖으로 나가려던 진하령은 오히려 진하군을 걱정했다.
“오라버니야말로 괜찮아?”
“무슨 뜻이야?”
“그 사람에게 말려들지 말라고.”
그러자 진하군은 뜻밖의 생각을 밝혔다.
“억지로 말려들지 않으려 하는 게 더 안 좋다. 말려들어도 이기적으로 말려들면 돼.”
“이기적으로?”
“그가 주는 좋은 영향은 다 받아먹고, 내 심지는 안 흔들리고.”
진하령은 과연 그게 잘될까 싶었다. 인간관계가 그의 말처럼 무 자르듯 할 수만 있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순진하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정도로 검무극을 버텨낼 수 있을까?
“우리가 피가 같긴 한가 보네. 오라버니도 순진과는 거리가 멀어.”
그렇게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검무극은 의원의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하령이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뭘 그렇게 봐?”
“저기 저 하늘색 보여? 내 검강 색이다.”
“칙칙한 색보단 좋겠네. 저렇게 아름다운 색에 맞아 죽으면.”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몸은 괜찮아?”
“덕분에.”
“얼굴 보고 가려고 기다렸다. 다음에 보자.”
진하령은 검무극과의 이별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조금만 더 놀다 가. 며칠이라도.
하지만 이런 말조차 꺼낼 수 없는 것이 검무극과 자신의 관계이자 운명이었다.
“가기 전에 이건 말해주고 가.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어?”
“죽도록 수련하는 거지.”
“만날 노는 것만 같은데?”
“원래 수련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거야.”
그때 진하군이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왔다.
“할아버지께 배후에 대해 말씀 들었소.”
자신의 사부를 조종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검무극이 공을 그에게 돌렸다.
“이번 일을 밝혀낸 것은 당신 덕분이오. 사부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중에 화를 당했을 수도 있었소.”
진하군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모르고 지나갔다면 백천경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을 파멸로 몰고 갔을 것이다.
진하군은 자신에게 온 공을 다시 검무극에게 되돌려주었다.
“당신 덕분이오. 상대를 대충 보지 말고, 똑바로 보라는 그 말 덕분에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진하군은 상대가 누구든 똑바로 보고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멸마대는 물론이고 무림맹 조직도 쇄신할 거고.
검무극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매사 조심하시오.”
“당신도.”
진하군은 마지막으로 감사를 전했다.
“동생 구해줘서 고맙소.”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꼭 갚으시오.”
검무극다운 대답이란 생각에 진하군은 옅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검무극이 진하령과도 작별했다.
진하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전히 우린 친구지?”
진하령의 말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교 본단 근처에 술맛 좋고, 주인장 좋은 주점이 있다. 다음에 한번 초대하지.”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진하령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검무극은 땅을 박차며 날아올라 순간 시야에서 멀어졌다.
“오라버니, 우리 힘내야 할 것 같아. 마교가 우리보다 멋있으면 안 되잖아?”
진하군은 대답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라버니 성격 누구보다 잘 안다. 지지 않을 거다, 우리 오라버니.
그 뒤를 따라 걸어가던 진하령이 검무극이 사라진 곳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도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어디 깨달음을 얻은 것이 오라버니뿐이겠는가?
호북일미가 아니라 호북제일검이 되기 위한 그녀의 첫걸음이었다.
* * *
안가 주방에서 이안은 한창 요리 중이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몰라도 두 마존에게 직접 요리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할 줄 아는 요리가 서너 개 있었는데 그중 제일 자신 있는 요리를 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너도 같이 먹자.”
“저는 괜찮아요.”
권마가 손짓까지 하며 권하는 바람에 이안도 함께 식사했다.
혈천도마, 권마와 한자리에서 식사하기?
이건 누가 봐도 벌칙 아니겠는가? 잔뜩 긴장해 있는데 음식을 먹으며 혈천도마가 말했다.
“싱겁다.”
혈천도마는 만든 사람 배려해서 대충 맛있다 해주고 그런 것 없었다.
“아! 죄송해요. 간을 좀 약하게 했어요. 제가 가서 다시 해오겠습니다.”
그때 권마가 이안이 가져가려는 그릇을 붙잡았다.
“싱겁게 먹어야 건강하다고 했소.”
“누가?”
“마의가 그랬소.”
이안은 권마가 그런 말을 해줄지 몰랐기에 내심 감격했다.
마존들은 겉으로 보는 모습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모습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자신도 겉으로 보는 느낌과 실제 성격은 완전히 달랐으니까.
혈천도마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왜 요리를 해준 거냐?”
물론 이유는 있었다.
싸움에서 보았던 두 마존의 모습에 감동하고 존경심이 들어서였다. 그들이 보여줬던 그 강함, 그 강렬함은 이제 귀영대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녀에게 큰 감흥을 주었다. 그래서 정성껏 지어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었다.
“자주 오는 기회도 아니고.”
거기에 서대룡이 술자리에서 항상 하는 말을 덧붙였다.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말해주려고요. 이 엄마가 젊은 시절 혈천도마님과 권마님에게 직접 밥도 해드렸다.”
“싱거웠다는 말도 꼭 해.”
혈천도마의 말에 이안이 멋쩍게 웃었다.
그때 권마가 불쑥 말했다.
“무극이와 자넬 닮은 자식이면 굉장할 거야.”
그 말에 이안은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당황한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제가 어떻게 소교주님과 혼인을 해요. 대주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일개 평무인이었는데요.”
“무슨 상관이냐? 교주나 무극이나 그런 것 따지는 사람 아니다.”
권마의 말에 혈천도마도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말해주는 권마가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항상 걸리는 것이 있었다. 혼인이란 말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
원래라면 안 꺼낼 말인데, 이 무서운 두 사람 앞에서 왠지 하고 싶었다. 아니,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저는 부모님이 누군지도 모르는걸요.”
그러자 혈천도마가 위로의 한마디를 던졌다.
“가족이 원수다. 몰라도 돼.”
이렇게 말해주는 혈천도마도 고마웠다.
그때 권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그게 정 마음에 걸리면 내가 아버지가 되어 주마.”
그 말에 혈천도마까지 깜짝 놀랐다. 그랬으니 당사자인 이안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녀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쳤다.
권마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심야수련모임에서 자신을 좋게 본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농담인가? 이번에야말로 잘못 들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그곳으로 검무극이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검무극은 대번에 얼어붙은 분위기를 파악했다.
“마교 소교주가 무림맹 맹주전에서도 아무 일이 없었는데, 안가의 밥상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흐르던 침묵을 깬 것은 혈천도마였다.
“음식이 싱거워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