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97)
절대회귀-297화(297/424)
제297회 왜 나요?
수족을 잃은 적패는 슬퍼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오른팔을 잃어도 이러할진대 자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지는 안 물어봐도 뻔한 일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놈을 붙잡아 둬야 한다.”
적패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주양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을 놓치면 죽는다는 것을. 이미 자신은 삶과 죽음에 걸쳐 있다.
일단 충실히 해야 할 일은 이자를 받으러 가는 것.
다음 날 이자를 받으러 간 칼잡이는 손이 망가져서 돌아왔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날은 봐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검무극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이틀 연속으로 손이 망가져서 돌아오자 통전소 칼잡이들은 동요했다. 몇몇은 갑자기 아파서 드러누웠고, 몇몇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종적을 감추기까지 했다.
칼잡이들 사이에서 검무극을 비정하다고 욕했지만 주양은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다. 상대는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 그가 비정했다면 이미 통전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날 왜 다 죽여버리지 않은 걸까?’
잔학에게 고문당했던 사람의 눈을 감겨 줄 때, 주양은 ‘아, 우린 이제 몰살당하겠구나’라고 절망했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러지 않았다. 분명 자신들을 살려둔 이유가 있다.
어쨌든 오늘도 이자는 받으러 가야 했다.
“오늘은 내가 직접 간다.”
주양의 말에 자신이 걸릴까 봐 조마조마하던 칼잡이들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관리자로서 무작정 칼잡이들을 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에 직접 나선 것이다.
호위하겠다고 누구 하나 따라오지 않는 걸 보며 씁쓸하게 통전소를 나섰다. 그래, 이해했다. 자신이라도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수하들보다 더 반가운 얼굴로 검무극이 맞아주었다.
“왜 당신이 왔소? 벌써 수하들이 다 떨어진 거요?”
“다들 두려워하고 있소.”
“그렇다고 당신이 수하들 걱정하는 사람은 아닐 텐데?”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검무극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감이 넘치시오. 어디 대단한 고수라도 부르러 갔소?”
정곡을 찔렸지만 주양은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겁먹은 연기를 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것일까?
“그때 날 죽이기 위해 보낸 사람보다 더 고수는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주양은 검무극이 말하는 사람이 적패의 오른팔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마교에 도움을 청하러 간 거고.
주양이 대답 대신 질문을 던지며 화제를 돌렸다.
“왜 내 손은 망가뜨리지 않은 거요?”
제일 궁금한 점이다. 딱히 그에게 잘한 것도 없었는데.
검무극이 동전 두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당신의 그 손이 필요할 수도 있어서요.”
그 뜻밖의 말에 주양은 의아해했지만 검무극은 더는 말해주지 않고 자신의 객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주양이 탁자에 놓인 동전을 들었다.
그냥 나가려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이 필요하다고? 대체 왜?
* * *
“지단주가 대주님 뒤를 캐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집채만 한 바위 아래에서 끙하는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사람이 그 큰 바위를 짊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내공을 사용했다지만, 이렇게 큰 바위를 어떻게? 란 생각이 절로 드는 광경이었다.
쿵.
바위가 땅에 떨어지고 그 뒤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걸어 나왔다.
다부진 체력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녔는데, 굳이 동물로 비유하자면 그는 호랑이였다.
마검대주(魔劍隊主) 중악(仲岳).
이 한 줄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사내다.
마검대는 천마신교의 최정예로 전쟁을 대비해서 최전선인 강서지단에 배치된 무력 조직이었다.
중악은 정예조직을 이끄는 책임자답게 강력한 무공을 지닌 고수인데다 실전경험까지 풍부했다.
“이 무거운 걸 들고 있을 때, 그딴 보고를 하는 건 날 죽이겠다는 의도지?”
보고를 했던 수하는 중악의 수족인 마검대 일조장 차회(車淮)였다.
“저도 대주 한번 해 먹고 은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워낙 성격이 차갑고 단호해서 마검대 무인들조차 두려워하는 중악이었는데, 유일하게 격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차회였다. 그만큼 충성심이 깊어서 비밀이 없는 사이였다.
“그 인간이 내 뒷조사를 하고 있다고?”
“네, 은밀히 사람을 풀었습니다.”
직급상으로는 단주가 대주보다 더 높았다. 하지만 마검대와 같은 정예조직은 직급을 넘어서는 권위가 있었다.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는 서로 존중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한데 강서지단에서는 그게 잘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그 사람 적 만드는 걸 참 좋아한단 말이지. 정작 싸움은 우리가 다 하고 다녔는데.”
중악이 땀에 젖은 옷을 벗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었다. 그의 온몸은 흉터가 가득했다. 마검대 대주가 되려면 어떤 역사가 있어야 하는지를 느끼게 하는 몸이었다.
몸을 씻으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좋게 좋게 살면 얼마나 좋아? 적도, 친구도 아닌 사람들 속에서 편안하게.”
“강직한 척하는 이면에 무슨 속셈이 있는지 모르죠.”
“아냐, 그 사람은 그냥 병이야. 그렇게 잘난 척 안 하면 못 견디는 사람이야.”
다 씻은 그가 미리 준비된 새 옷을 입었다.
“그래서? 문제 될 것 있나?”
“제가 일단은 입단속을 시켜두었습니다.”
중악은 지단주의 의심처럼 부패무인이었다. 강서 내의 여러 문파들에게서 은밀히 뇌물을 챙기고 있었다.
반면 작년에 새로 온 지단주는 강직한 성격이어서 절대 뇌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뇌물은 더욱 많이 중악에게 바쳐졌다. 중악은 주는 족족 다 받아 챙겼다.
“넘쳐나는 돈 나눠주겠다는데, 왜 그리 어렵게 사는지 모르겠어. 그 버러지 같은 것들이 주는 돈, 잘 받아 챙기고 결정은 내 마음대로 하면 되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뇌물을 받았다고 상대 요구를 다 받아주지 않았다. 자기가 생각해서 아니다 싶은 것은 무시했고, 이건 해줘도 되겠다 싶은 것은 해주었다.
그걸 가능하게 한 네 글자, 마검대주.
물론 그들이 바친 뇌물의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대비한 것이었다.
“우리가 불안과 싸워주는 거잖아? 얼마나 좋아?”
중악의 농담에 차회가 옅게 웃었다.
문제는 이번 일이 이렇게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란 점이었다.
“아시다시피 보통 깐깐한 자가 아니라서 이렇게 파고들기 시작하면 결국 알아내고 말 겁니다.”
중악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자신의 뒷조사를 결심했다는 것은 그도 모든 것을 걸었다는 뜻. 처음에는 꽤 관계가 괜찮았는데. 대체 어디서 어긋나버린 걸까?
중악이 천천히 바위로 걸어가더니 검을 뽑았다.
나뭇가지를 베듯 가볍게 휙 휘둘렀는데.
쩌어어어억.
그 큰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
이 놀라운 한 수에 차회는 존경을 담아 포권했다.
“무림평화를 위해서라도…….”
중악이 매끈한 바위의 단면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지단주는 바뀌어도 우린 그대로 있어야지.”
그리고 바로 이때 운명처럼 방문자가 있었다.
다른 수하가 와서 보고했다.
“손님이 왔습니다.”
* * *
밀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적패였다.
이곳은 중악이 은밀한 만남을 가질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적패 역시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죽립을 쓰고 허름한 장삼을 입고 있었다.
중악이 안으로 들어오자 적패가 벌떡 일어나서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내가 부르기 전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중악의 반응이 차가웠다. 원래도 그는 염왕채를 운영하는 적패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럼 내 돈도 무시했어야지.’
적패는 그런 속마음을 감추고 넙죽 엎드렸다.
“오죽 다급했으면 이렇게 찾아뵈었겠습니까?”
“무슨 일인가?”
“마인을 사칭한 자가 끼어들었는데 우리가 손을 댈 수 없는 고수입니다.”
마교소교주라고 사칭한 부분은 일부러 뺐다. 그랬다간 중악의 성격상 그런 미친놈을 우리에게 상대하라는 거냐면서, 그 핑계로 뒤로 빠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본교를 사칭하는 죄는 중죄인데? 얼마나 대단한 실력인데?”
“이곳으로 달려와야 할 만큼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지단주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래라면 무조건 거절했을 것이다. 한데 중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알았다. 내가 처리해주지.”
“감사합니다.”
너무 흔쾌히 허락해서 오히려 적패는 당황스러웠다.
“대신 한 가지 해줘야 할 것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마인을 사칭한 자가 있다고 지단주의 귀에 들어가도록 해라. 이런 일은 나 혼자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
적패는 알 수 있었다.
‘상대가 고수라니까 제가 움직이지 않고 지단주를 이용해서 없애려는 거구나. 하여튼 잔머리는.’
어쨌든 상관없었다. 놈을 없애기만 하면 되니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실 중악은 적패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비정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교를 사칭한 놈을 잡으러 갔다가 강서지단주가 죽는다? 그 복수는 마검대가 하고?
그게 될까? 의심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
되게 해야지.
이것이 중악이 살아온 인생이었다.
* * *
다음 날에도 주양이 찾아왔다.
“우리 주 선생, 이제 겁 없이 혼자 잘 오는군.”
“적어도 내 손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내 손은 지킬 수 있지 않겠소?”
주양은 궁금해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체 왜 내 손이 필요한 거요?”
그러자 주양의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말이 검무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신을 새 통전소의 수장으로 삼을까 해서요.”
주양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반면 검무극은 침착했다.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오?”
“그야…….”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보거나 말로 꺼낸 적이 없던 이유였다.
“날 죽일 것 아니었소?”
자신이 느낀 검무극은 악인을 그냥 두는 자가 아니었다.
“맞소. 원래는 죽이려고 했는데 악인이 하나 필요해졌소.”
검무극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어차피 당신들이 필요악이라면, 정말 제대로 된 필요악으로 만들려고 하오. 앞으로 중원의 통전소는 상식적인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줄 거요. 지금은 통전소뿐이지만, 언젠가는 중원의 모든 염왕채를 놓는 곳을 그렇게 다 바꿀 거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자신을 살려뒀는지. 왜 손을 멀쩡히 남겨두었는지. 이 손으로 앞으로도 계속 주판을 튕기라는 의미였다.
눈앞의 이 남자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절로 이 말이 터져 나왔다.
“당신이 대체 뭔데?”
몇 번이나 들었던 대답이 다시 나왔다.
“마교 소교주.”
“당신은 그저 미친놈이오!”
사람 이마에 구멍을 뚫고 칼잡이들 손을 박살 낸 자인데, 이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게 만든다. 자꾸 경계심을 풀게 만든다.
“결국 사채꾼에도 그 말을 듣고 마는구려. 마존들이 당신 말을 들었으면 껄껄 넘어갔을 거요. 한동안 나 놀린다고 정신없겠지.”
주양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거나…… 자신이 진짜 마교 소교주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거나.
“그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요?”
“나는 모르지. 당신이 맡아서 해나가야 하니까.”
이러는데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당신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어차피 당신은 죽을 거요.”
“그럼 당신이 날 도와주시오.”
“무슨 마교 소교주가 사채꾼에게 도움을 바라시오?”
자기가 생각해도 농담이 우스웠는지 주양이 혼자 웃었다가 빠르게 정색했다. 미친놈하고 어울리니 함께 미쳐가는 거다.
“좋소, 그렇다고 치고. 왜 나요? 그에 걸맞은 사람을 세우면 될 텐데? 나 같은 놈 말고, 돈 욕심 없는 사람 말이오.”
개인적으로 주양이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워낙 큰돈을 다루는 곳이니 그 사람도 돈 때문에 타락하게 될 거요. 반면 당신은 더는 타락할 일이 없지. 당신이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헛짓거리를 하면 아무 가책 없이 죽이기도 쉽고.”
설마 이런 이유일 줄이야.
“사람 앞에 두고 너무 하는군.”
“당신을 살려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당신에게 쉽지 않은 일이 될 거요. 조직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할 거고, 단 한 푼의 돈도 허투루 빼돌릴 수는 없을 거요.”
검무극이 그에게 내린 응징은 이것이었다.
“당신에게 이자를 갚았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죽는 날까지 뼈 빠지게 일해야 할거요. 잘못 받았던 이자를 평생 제대로 받으면서.”
“만약 거절한다면?”
“적패가 죽는 날 함께 죽겠지.”
검무극이 동전 두 개를 차례대로 꺼내 탁자에 올렸다. 그 행동이 마치 이러는 것 같았다. 이 동전은 적패 것, 이건 당신 것.
동전을 보자 주양의 심장이 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요즘 같으면 저 동전에 이마가 꿰뚫리기 전에 심장이 터져 먼저 죽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두려워서인지, 통전소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허영심 때문인지, 평생 재미없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갑갑함 때문인지. 이자와 함께 있으면 자꾸 이렇게 심장이 날뛰게 된다.
검무극은 마치 주양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처럼 차분히 물었다.
“두렵소?”
“그럼 안 두렵겠소?”
“바다에 빠졌어도 코와 입을 내밀 요만큼의 공간만 있으면 살 수 있소.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딱 이만큼만 있으면.”
검무극이 손을 얼굴 앞에 원통처럼 말았다.
“당신에게 요만큼의 숨구멍이 나인지, 당신 수장인지 잘 생각하시오. 빨리 결정해야 할 거요. 곧 큰 파도가 덮쳐올 테니까.”
주양이 탁자에 올려진 동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동전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어떤 심정이냐고? 살고 싶었다. 평생 속죄하며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소. 자신에게는 그런 기백이나 용기가 없다.
이제 곧 진짜 마교가 나서면 갈가리 찢겨 죽을 사람인데. 왜 자꾸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왜 지금이라도 ‘당신의 뜻을 따를 테니 살려주시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왜 그래야만 할 것 같을까?
주양이 동전을 챙겨나가며 말했다.
“그 파도, 당신부터 덮치고 있소. 그러니 당신 숨구멍이나 잘 찾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