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
절대회귀-3화(3/424)
제3회 소원이 뭐냐?
눈을 떴다.
평생 수도 없이 눈을 떴다가 감았지만, 이번만큼 간절했던 때는 없었다.
부디 그 모든 일을 되돌이킬 수 있는 때로 돌아가기를.
제발!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회귀 전에 겪었던 그 모든 고난을 보상하는 광경이었다.
나는 광장처럼 너른 비무대 위에 서 있었다.
관객석을 꽉 채운 수천 명의 군웅 너머로 거대한 악귀상들이 보였다. 붉고 푸르고 누런 삼색의 악귀상들은 연무장을 중심으로 서로 격돌하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것들의 거대한 검과 도와 주먹이 비무장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저 멀리 더욱 거대한 조각상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는 검은 악귀상은 바로 천마신교(天魔神敎)의 상징이었다.
‘과거로 돌아왔다!’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마치 나의 회귀를 축하라도 하듯 사방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천마신교의 마인들이 연무장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때 건너편에서 한 남자가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신마쟁투(新魔爭鬪) 날이구나.’
이 무렵 아버지는 차기 교주를 자신의 혈육으로 한정 짓지 않는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그 발표에 교내가 들썩였다. 이제 실력만 있으면 천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발표에 힘을 싣겠다는 듯, 교내 후기지수들을 대상으로 비무대회를 열었다. 그것이 바로 신마쟁투다.
그리고 신마쟁투 우승자에게 당신의 두 아들 중 한 명에게 도전할 기회를 줬다.
우승자와 아들 중 누가 이기든 천마는 그에게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준다고 했다.
그러니 신마쟁투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교내의 젊은 후기지수들이 대거 참가해서 자웅을 겨뤘다.
열흘에 걸친 치열한 대결 끝에 대회의 우승자가 나왔고 그가 지목한 상대가 바로 나였다.
“검무극(劍無極)! 검무극!”
군웅들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귀령자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이름. 천마의 두 아들 중 막내인 검무극이 바로 나다.
군웅들이 검무극을 응원하자 대회 우승자인 비무 상대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흥! 이 시합이 끝나면 외치는 이름이 달라질 거요. 아무리 그대라도 봐주지 않을 테니.”
당시의 나는 그가 나를 선택한 것에 기분이 나빴다. 형보다 나를 더 만만하게 봤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지나고 보니 놈이 나를 선택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기권하는 것이 어떻소?”
놈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나는 이 비무에서 졌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상대의 치졸한 계략 때문이었다. 상대는 내 주방 숙수를 포섭해서 내공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산공독(散功毒)을 밥에다가 하독했던 것이다.
일반적인 산공독이 아니었다. 그냥 있을 때는 전혀 이상이 없다가, 비무와 같이 격렬한 상황이 되었을 때 내공을 흩어버리는 그런 특별한 산공독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것은 사도맹이 개발해서 시중에 은밀히 유통하고 있던 흑비(黑妃)라는 이름의 산공독이란 것을.
어쨌든 이 날 비무에 지고 나서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고했지만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오히려 그깟 계략에 속았느냐는 질책이 담긴 눈빛을 보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 나는 오늘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여러 무리수를 잇달아 던졌다.
그때의 적은 형이나 다른 후계자 후보들이 아니었다. 내 적은 조급함이었고, 상처 입은 자존심이었다. 눈만 감으면 날 한심하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이 떠올랐다.
잇따른 실수와 실패들, 그렇게 나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지며 후계자 다툼에서 멀어졌다.
모든 게 오늘의 패배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 운명의 분기점에 선 내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네 이름이 뭐였더라?”
순간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고 상대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자신을 희롱하는 것이라 여겼겠지만 나는 정말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나 구평호(具坪浩)를 무시하는 것은 사부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소!”
“아, 맞아. 구평호였지.”
팔마존(八魔尊) 중 일인인 혈천도마(血天刀魔) 구천파(具天波)의 일곱 제자 중 다섯째인 구평호. 아마도 모르긴 해도 신마쟁투에서도 온갖 비겁한 수작을 부려서 우승했을 것이다.
“이 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널 무시하는 거지, 네 사부님은 왜 끌어들이나?”
순간 군웅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혈천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일화검존(一花劍尊) 쪽 마인들의 웃음이었다.
“이 공자! 이렇게 내 심기를 건드는 것을 보니,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저 멀리 상석에 앉아 계신 천마를 쳐다보았다.
수천 명의 마인이 있는 곳에서도 ‘나 여기 있다’는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계셨다.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을 데려와서 여기서 천마를 찾아내라고 하면, 그는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낼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감은 흑백의 그림 속에 피처럼 붉은색 원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아버지의 양옆으론 본교를 대표하는 여덟 고수 팔마존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옆에 있기에 스스로를 낮추고 있을 뿐, 그들 역시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 이들이었다.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눈빛에서 이런 마음을 읽었다.
과연 넌 이 난관을 어떻게 벗어날 테냐?
당시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아! 아버지는 이미 내가 산공독에 당한 것을 알고 계셨구나.’
무심한 척, 후계 다툼은 모른 척하고 계셨지만 다 파악하고 계셨을 줄이야.
과거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다 알고 계셨단 말이지? 그렇다면…….’
예전처럼 당하고 나서 일러바치는 것은 하책(下策).
산공독에 당했으니 승부를 미루자는 것은 중책(中策).
내공 없이도 이기는 것이 상책(上策).
당연히 상책을 발휘해야 한다. 나는 그때의 더벅머리 애송이가 아니었으니까.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긴 인생을 살아보았으니까.
사실 구평호 정도야 내공 없이 싸워도 일초지적(一招之敵)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많은 마인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내 실력을 드러낼 수는 없었으니.
내가 손을 높이 들어서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큰 소리로 말했다.
“본교의 영웅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당당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구평호를 상대하겠습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길 자신 있습니다!”
내 선포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반면 구평호의 얼굴은 표가 나게 일그러졌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묻고 싶겠지.
―산공독에 당한 것을 어떻게 알았지? 싸움이 벌어져야 발휘되는 산공독인데.
정말 미치도록 궁금하지?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혼자만 내공을 사용하면 비겁자가 될 것이다.
당혹감에 휩싸인 구평호는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 공자가 그렇게 나온다면 저 역시 내공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내 예상대로 반응했다.
그의 추종자 몇몇이 박수쳤지만, 함성은 나오지 않았다. 그 선택은 내공이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박진감 넘치는 싸움을 내공 없는 자들의 심심한 싸움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맥 빠지는 한숨 소리까지 들렸다.
구평호는 당황했고, 그 당혹감은 나를 향한 분노로 이어졌다.
“이 공자! 비록 내공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내 칼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나는 놈의 경고를 흘려들으며 내 몸을 살피고 있었다. 젊은 몸이라는 낯선 이질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사용하던 검은 마치 장난감처럼 가볍게만 느껴졌다.
‘이 몸이 과연 내 생각대로 따라 줄까?’
구평호가 기세 좋게 도를 뽑았지만 나는 반대로 검을 풀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검을 쓰면 내 실력이 드러날 확률이 더 높았으니까.
그러자 다시 함성이 터졌다. 철저히 상대를 무시하고 조롱할 때 환호하는 것이 마인들의 본성 아니던가?
당연히 구평호의 분노가 폭발했다.
“교주님의 혈육이니 차마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 팔 하나는 거둬주마!”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구평호는 내 쪽으로 성큼 뛰어 거리를 좁히더니 어깨를 노리며 도를 내리찍었다.
쇄애애액!
나는 날아드는 도를 끝까지 쳐다보다가 마지막 순간 신형을 비틀어 피했다.
‘좋다, 좋아!’
내 뜻대로 몸이 움직여 줄까는 기우였다. 몸은 즉각 반응했고, 예상보다 빠르고 팔팔했다. 몸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잊었어? 이게 젊은 시절의 너잖아?
달리면 온종일 달릴 수 있을 것 같았고 움켜쥔 주먹은 뭐든 다 부숴버릴 것 같았던 시절.
‘이 나이 때는 심장이 이렇게 펄떡펄떡 힘차게 뛰었구나!’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너무 기뻐서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미소를 본 구평호가 더욱 미쳐 날뛰었다.
“이 미친 새끼가 웃어?”
눈이 뒤집힌 구평호는 노골적으로 급소를 노리며 도를 휘둘렀다. 이러다 내공을 써서 도기를 발출할 수도 있는 놈이라서 더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집요하게 팔을 자르려 날아드는 도를 피하며 놈의 가슴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구평호는 다급한 헛숨을 내쉬며 방어했지만 이미 내 팔꿈치는 놈의 명치에 박히고 있었다.
퍽!
뒤로 튕기는 구평호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내 주먹이 연속해서 박혔다. 빠른 첫 방에 놈의 코뼈가 내려앉았고, 묵직한 두 번째 주먹에 늑골이 부러졌다. 아무리 내공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린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다. 맨주먹으로 소도 때려잡는데, 놈의 몸이 버틸 리 없었다.
난 이 정도로 끝내지 않았다.
비명과 함께 주저앉는 놈의 손목을 낚아채 잡았다.
“독은 어느 손으로 풀었냐? 이 손이냐?”
나는 놈의 팔을 잡은 채 훌쩍 뛰어올랐다가 진각(震脚)을 내려쳤다.
꽝.
발바닥부터 전신을 타고 올라온 힘으로 내 무릎을 지렛대 삼아 놈의 팔을 꺾었다.
꽈드드드드드득!
해일처럼 밀려간 충격파에 팔목과 팔꿈치, 어깨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으아아아아악!”
참혹한 비명이 아니더라도 다들 알 수 있었다. 도를 쓰는 쪽 팔과 어깨가 완전히 으스러졌으니 이제 재기불능임을.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어설픈 승부가 아니라 볼거리가 확실한 승리였기에 모두를 만족시킨 것이다.
혈천도마 쪽 마인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멈출 줄 모르는 함성에 묻혀버렸다.
좌중에 앉아 있는 혈천도마는 제자가 박살났음에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열기와 함성, 고통의 신음이 가라앉자, 비로소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새하얀 곤룡포에 수놓아진 붉은 용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았다.
함께 있던 팔마존이 일제히 함께 일어났다.
촤아아아아아악.
마치 물결이 이어지듯 장내의 모든 마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절대자에게 예를 갖췄다.
천마 검우진(劍宇珍).
이 시대의 최강자.
……아직까진.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몸을 꿰뚫을 것처럼 강력한 시선이었다.
당시의 나는 아버지가 너무나 무서웠다. 특히 사람을 깔보는 것 같은 저 강렬한 눈빛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랬으니 어디 대화라도 제대로 나눠봤겠는가?
결국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식은 추측과 선입견, 그리고 소문으로 이뤄져 있었다.
과거의 나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사람 관계만큼은 혼자 상상하지 마라. 똑바로 보고, 제대로 들어라. 해답은 네 속에 없다. 상대는 저기에 있으니까.
나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표정 어디가 그렇게 무섭다고.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숱한 도전과 간계 속에서 만마(萬魔)를 다스리는 권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한 인간이 있을 뿐인데. 그래서 비롯된 무정함이고 무뚝뚝함일 뿐인데. 그때 보지 못한 것들이 이제는 보인다.
“소원이 뭐냐?”
아버지의 묵직한 저음은 내공이 실리지 않아도 모두에게 들렸고, 듣는 이를 위축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들 내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옆의 팔마존들은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제 소원은…….”
오늘로 돌아올 줄은 예상 못 했기에, 나는 본능에 따랐다.
“아버지와 사냥 가고 싶습니다.”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아버지가 흠칫 놀랐다. 지켜보던 마인들 역시 웅성거렸다. 설마 이런 소원을 말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후계자가 되고 싶다는 소원까지는 들어주지 않을 테니, 적어도 보검이나, 무공비급을 원할 것이라 예상했으리라.
“나와 사냥을?”
“네. 아버지와 단둘이서요.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사냥을 즐기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사냥을 배우고 싶습니다.”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출발은 내일 새벽이다.”
말을 마친 아버지가 걸음을 옮겼다.
흑백의 그림 속에서 홀로 붉은 천마가 걸음을 옮겼고, 모든 마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수천 명이 모인 그곳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천마와 팔마존이 그곳을 떠나자 비로소 들려오는 표독스러운 말소리.
“병신이. 고작 그딴 소원을 빌려고…….”
돌아보니 구평호가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사형제들에게 업혀 옮겨지고 있었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놈에게 말했다.
“미안. 너 이름이 뭐였더라?”
마지막까지 무시당한 구평호가 악을 썼다.
“으아아아악! 저놈 죽여! 사형! 제발 죽여달라고!”
하지만 비무가 끝난 상황에서 내게 덤비는 자는 없었다. 그저 그들은 날 차갑게 노려보다가 구평호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막 나가던 너희들 인생이 더는 재미있지 않을 거야.’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시점으로 보내준 하늘에게 감사했다. 비록 배신하려 했지만, 대법을 완성 시킨 귀령자에게도 고마웠다.
‘정말 고맙소.’
난 내 나이처럼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