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02)
절대회귀-302화(302/424)
제302회 우린 지금 강해져야 할 때.
“진심이냐?”
아버지의 저 한마디 물음에는 ‘정말 진심으로 이렇게 불확실한 선택을 할 거냐?’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인연이 닿지 않을 수도 있는 데다가 설령 인연이라 하더라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저와 인연이 없다면…… 적 머리통을 갈겨 버릴 때 쓰죠. 아니면 녹여서 검이라도 한 자루 만들면 그만입니다.”
“뭐 어차피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니.”
“지금까지 너무 완벽한 모습만 보여드려서, 가끔 이런 실수도 한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의미에서 이걸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비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그것에 손을 대는 순간.
“아아!”
내 깊은 탄식에 아버지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이것을 집었을 때 뭔가 짜릿한 느낌이 오거나, 구우우우 울리는 뭔가 신비한 소리가 제게만 들려야 하는데…….”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아무 느낌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내저었다.
“네 선택이었다. 저기 만년설삼 사이에 보면 공청석유가 몇 방울 담긴 병도 있었을 텐데.”
“아니죠? 제발 농담이라고 해주십시오!”
나는 영약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정말 영약과 영초 사이에 공청석유가 담긴 병이 있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날 못 봤다고? 이 우윳빛 영롱함을?
“진작 말씀해주셔야죠!”
“일부러 숨겨도 모자랄 판국에 내가 왜 말을 해주냐?”
나는 짐짓 괴로운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설마, 또 뭐가 있는 것 아니죠?”
아버지는 나를 놀리는 맛에 흠뻑 빠져 드셨다.
“명색이 본교의 보고인데 그것만 있으랴? 빙극설과(氷極雪果)도 있지.”
나는 아버지 옆으로 가서 나직이 말했다.
“물려주십시오.”
“불가!”
그래, 이걸 물러주시면 아버지가 아니시지.
“이것들 쓰지 말고 꼭 그대로 두세요! 나중에 제가 교주 될 때까지 꼭 남겨두세요! 아버지!”
이걸 보관해 두시는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라고 욕심이 없으실까? 지금이 아니라 결정적일 때 쓰시려고 모아둔 것이리라. 역시 아버지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거다.
나는 비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놈아, 너는 공청석유보다 귀한 놈이다!”
괜히 아버지에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여전히 내 본능은 이 비궤에 이끌리고 있었다. 잘못한 선택을 했을 때의 그 가슴 철렁함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비궤를 선택했을 것 같은 이 느낌은 단지 잘못된 선택을 애써 부정하는 어리석은 고집이 아니었다.
아직도 이 칙칙한 쇳덩어리는 나를 강렬하게 끌어당기고 있었으니까.
아버지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겉으론 까불다 잘 됐다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한편으로는 기대하는 눈치셨다. 당신이 풀지 못한 비밀을 내가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때가 되면 열릴 겁니다. 연자여, 잘 선택했다! 그깟 공청석유와 나를 비교했을 때 자존심 상했다! 이러면서요.”
“그래, 그런 희망이라도 가지고 살아야지.”
‘연자여!’를 다시금 외치며 비궤를 품에 넣었다.
아, 무겁기는 왜 이리 무겁냐!
아버지와 함께 천마보고를 나왔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사실 오늘 난 비궤보다 더 큰 선물을 받았다. 아버지가 내게 축하선물을 줬다는 그 사실. 그것이 제일 큰 선물이었다.
“이제 뭘 할 거냐?”
“수련해야죠. 수련하다 지치면 마존들하고 놀고. 또 노냐, 하셔도 놀 겁니다. 지겹지도 않냐? 하셔도 놀 겁니다.”
아버지 눈치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놀 때 아버지도 불러드려요?”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셨지만, 부르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까 함께 놀러 가고 싶다는 말씀 괜히 드린 말씀 아니었습니다. 조만간에 저와 놀러 가시죠. 사마군사께서 말리면 몰래 둘이서 야반도주하는 겁니다. 천마비행술과 쾌속보로 냅다 달리는 거죠.”
아버지는 끝내 그러자, 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선물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조만간 바둑이나 한판 두자.”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제 군사가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 * *
천마전을 나오자 내 뒤로 착착 적연을 비롯한 주간조 호위들이 줄을 지어 따라붙었다. 무언의 인사이자 반가움의 표시였다.
“다들 수련 열심히 했구나.”
드러나는 기세와 걷는 모습만 봐도 수련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제법 피나는 수련을 한 모양이다.
그래, 다들 강해지자. 우린 지금 모두 강해져야 할 때니까.
그길로 곧장 혈천도마를 찾아갔다.
“어르신!”
평소처럼 반갑게 달려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생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당에 화원이 만들어져 있었고, 혈천도마는 그 큰 멸천대도를 세심하게 움직이며 꽃나무 가지를 치고 있었다.
“이런! 남도종인 줄 알고 왔는데 북천검가에 왔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검존님. 그사이 왜 이리 못나졌나요?”
“허튼소리 그만하고 저기 물 좀 뿌려라.”
“네.”
요즘 일화검존과 잘 지내면서 그녀에게 꽃을 키우는 법을 배운 모양이다.
겉모습만 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나는 안다. 화원을 가꾸는 일은 책을 좋아하는 혈천도마와 꽤 어울리는 일임을. 저 남자다움 이면에 존재하는 도마의 부드러움이 있다.
“한 곳에 물 너무 많이 주면 죽는다. 골고루 줘.”
나는 혈천도마가 시키는 대로 다른 곳에 물을 줬다.
“검존 선배와는 요즘 잘 지내시나 봅니다.”
“뒤늦게 무공수련에 빠져서 바쁘시다. 화장 안 한 모습 보이기 싫다고 만나주지도 않는다.”
나와 마지막으로 비무한 후에 무공 수련에 전념하는 모양이다. 꾸미기 좋아하는 검존이 화장을 안 했다는 것은, 제대로 진심이란 의미.
“너 때문이지?”
“아닙니다.”
“아니긴. 다 늙어서 뭔 호승심인지.”
다 늙어야 와닿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젊어서는 별것 아니라 생각했던 것들이 이젠 달리 보이잖아요? 어르신도 그렇잖습니까? 제자에게 칼을 선물하고, 마당에서 꽃을 키운다? 예전이라면 가당키나 했겠습니까?
혈천도마는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가면쟁이만 챙기지 말고 주정뱅이도 챙겨.”
“취마 형님요?”
“내가 돌아온 날 지붕에서 술 마시며 너 기다리고 있더라.”
“어휴, 우리 못난 형. 술 취해서 또 궁상을 떨었군요.”
혈천도마는 그 말만 했을 뿐 취마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를 챙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변화였다.
“자,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혈천도마가 가지치기를 멈추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라 들어가려 하자 그가 쫓아내려 했다.
“얼굴 봤으니 됐다. 괜히 나 신경 안 써도 된다.”
“저는 여기가 제일 편하고 좋습니다.”
“난 불편해. 혼자가 편해.”
잽싸게 들어가서 침상으로 몸을 던졌지만, 혈천도마의 허공섭물로 허공에 뜬 채 멈췄다.
“저 소교주입니다! 소교주라고요!”
내 몸이 천천히 창가 쪽으로 날아갔다.
“교주가 돼도 안 돼! 씻고 옷 갈아입고 누워.”
혈천도마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난 창가 자리에 앉았다. 탁자에 혈천도마가 읽던 책이 놓여 있었다. 화원 가꾸는 법에 관한 책이었다.
도법과는 무관한 책이지만, 그의 멸천대도는 더욱 강력해지고 무서워질 거라 믿는다. 가끔은 적의 목을 자를 때보다 꽃나무 가지를 칠 때,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일화검존이 수련으로 내달리면, 그러잖아도 열심히 수련하던 혈천도마가 그냥 있을 리 없다. 검존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함께 달릴 것이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다 같이 강해지고 있다.
“어르신. 이게 뭔지 아십니까?”
나는 품에서 비궤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게 뭐냐며 호기심을 드러낼 줄 알았는데, 계속 옷을 갈아입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비궤구나.”
“어떻게 아세요?”
“어떻게 알긴. 젊은 시절에 교주가 그거 비밀을 풀겠다고 얼마나 난리를 쳤는데.”
젊은 혈천도마와 아버지가 친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때와 비하면 요즘은 좀 소원한 사이가 된 것 같긴 하지만.
그나저나 아버지는 자신이 그렇게 난리를 치셨으면 선택하기 전에 좀 말려주시지. 참 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왜 네 수중에 있느냐?”
“소교주가 된 선물로 받았습니다. 아니, 제가 골랐죠.”
“골라도 왜 하필 그걸 골라?”
“인연이 있는 자에게만 열린다. 이 말을 듣고 어찌 참습니까? 어르신도 골랐을 겁니다.”
“나는 안 골랐을 거다. 나처럼 불운한 사람이 보물과 인연이 있을 리가 없지.”
처음 만났을 때, 혈천도마가 했던 말이다.
불운과 함께한 인생이었다고.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이젠 아니시잖아요?”
혈천도마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고를지도 모르지.”
그럼요, 그래야죠. 아버지 뵙고 당장 어르신 뵈러 달려오는 저를 위해서라도, 그러셔야죠.
내 시선이 비궤를 향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철컥하고 열릴 겁니다. 제가 열릴 때까지 매일 열려라, 제발 열려라, 할 거라서 듣기 싫어서라도 열릴 겁니다.”
비궤를 챙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럼 가보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래도 어르신 제일 먼저 뵈러 왔다는 걸요.”
“생색은.”
말은 그러면서도 내심 좋아할 혈천도마였다.
혈천도마의 거처를 나온 후 거처로 돌아왔다. 원래는 권마도 보려 했는데 내일로 미뤘다.
호위들은 쉬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돌아온 첫날인데 얼마나 호위를 하고 싶었겠는가?
“잘 부탁한다!”
“걱정 마시고 푹 쉬십시오!”
그들에게 호위를 맡기고 집으로 들어왔다. 꽤 오래 집을 비웠음에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그래도 집이 좋구나.”
나는 침상에 누워 잠부터 잤다.
출교한 이후 하루도 푹 잔 적이 없었다. 잠은 운기로 대신했고, 남은 시간은 다 무공수련에 쏟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푹 자고 여독을 풀 작정이다. 아무리 고수라도 장거리 마차여행은 피곤한 법이다.
* * *
잠에서 깨니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정말 꿈 한번 꾸지 않고 푹 잤다. 잘 잤을 때의 그 개운함에 기분이 상쾌했다.
누워서 잠시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누워서 보는 경치가 좋았구나.
한참을 침상에서 뒹굴뒹굴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호위는 야간조로 교체되어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오늘 야간조를 이끄는 사람은 삼호였다.
“배고파. 자네 어머니가 해주신 집밥 먹고 싶어.”
삼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일어나시면 시장하실 것 같아 간단한 요기를 준비해뒀습니다.”
다른 호위가 준비한 요리를 방으로 가져갔다.
“다 같이 들어가서 먹자.”
“저희는 이미 먹었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나?”
“야간 임무 시작 전에 먹고, 새벽에는 돌아가면서 먹습니다.”
“밤낮도 바뀌었는데 대충 먹지 말고 제대로 먹어. 속 다 버린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만 감사하다고 하지 말고. 꼭 지켜!”
방으로 들어가서 식사했다.
간단한 요기라더니 제대로 된 식사였다. 내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 식어도 괜찮은 요리를 준비해둔 것이다.
밥을 먹고 나서 따뜻한 차를 한잔 마셨다.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일상의 기쁨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할 때의 즐거움이 있다면 이렇게 혼자 조용히 있을 때의 행복이 있다. 사람들과 있을 때 너스레를 많이 떨면 떨수록 혼자만의 시간이 소중해진다.
그러다 회귀 전 삶을 떠올렸다. 그때는 혼자인 것이 지긋지긋했는데.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밥을 다 먹고, 품에서 비궤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살폈다.
과연 이게 뭘까? 만약 상자라면 이 안에 뭐가 들었을까?
비궤를 흔들어보았다. 그냥 꽉 찬 쇳덩이지, 상자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버지나 전대 천마들이 온갖 시도를 다 해봤을 거다. 내력도 주입해 보고, 물에도 담가도 보고, 열을 가해 보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인연이 있으면 열린다고 했다. 비밀을 풀어야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래, 지금 열리기 싫으면 너 편할 때 열려라.”
그렇게 비궤를 바라보고 있는데 밖에서 삼호가 말했다.
“극악소마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나가보니 정말 하얀 가면을 쓴 극악소마가 달빛 아래 서 있었다.
“소마님!”
“소교주!”
“내일 찾아뵈려고 했는데 어쩐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긴장했는데, 그가 찾아온 이유는 정말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보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
“항상 소교주님이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찾아올 때도 있어야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찾아가면 항상 하얀 벽을 보며 서 있던 그였는데. 그게 아무리 무공수련에 도움이 된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방에 홀로 있는 것이 항상 마음이 좋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그 방에서 나와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오늘 아버지는 태사의에서 내려오셨고, 극악소마는 하얀 방에서 나왔다.
거처 주위에 경계를 서고 있던 호위들의 표정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그 무서운 극악소마가 저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출교하신 일은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극악소마의 눈빛은 예전보다 더 깊어져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소마님 느낌이 다릅니다.”
“소교주가 주신 만년설삼 덕분에 무공에 성취가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게 어찌 한낱 인삼 때문이겠습니까? 소마님 노력 덕분이죠.”
한낱 인삼이란 표현이 우스웠는지 소마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얼굴 뵈었으니 됐습니다.”
극악소마는 다른 용무가 아니라 정말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듯 곧장 작별을 고했다.
행동 하나가 백 마디 좋은 말보다 더 감동일 때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돌아서 걸어가는 극악소마 옆으로 가서 나란히 걸었다.
“되긴 뭐가 됐습니까? 오랜만에 뵈었는데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죠. 소마님하고 밤새워 놀 겁니다. 이미 아버지에게 선포도 했습니다, 놀겠다고요.”
잠시, 사이를 두고 극악소마가 말했다.
“지금까지로 봐서는 무림의 운명이 소교주님을 놀게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거창하게 운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내가 급해서라도 놀고 있진 못하겠지. 물론 오늘은 예외다.
“그럼 서둘러야겠네요. 운명이란 놈이 방해하기 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