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04)
절대회귀-304화(304/424)
제304회 넌 뭘 믿고 목숨을 건 거냐?
청선과 함께 내원을 걸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마존이 된 것은 소교주님 덕분이라 여기고 있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소만, 섭혼께서 마존 자리에 앉으신 것은 본인의 능력 때문이오.”
“그래서일 거예요. 오늘 이렇게 소교주님을 찾아뵌 것도. 이렇게 저를 믿어주시는 분이시니까.”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청선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막상 용기를 내서 찾아오긴 했지만, 말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무공 때문일까?
풍천교주가 가르쳐주긴 했어도 지금 부재중이니 막히는 부분이 많이 있을 거다.
아니면? 혹시?
그녀와 관계된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전자이길 바랐는데 그녀의 고민은 후자였다.
“마존이 되기 전에 사귀었던 남자가 있어요. 그는 북천검가의 사우종이에요.”
두 사람이 사귀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 사실을 이용해서 그녀를 풍천교주에게 찾아가게 하기도 했었고.
회귀 전의 인생에서 사우종은 섭혼술에 당한 채 일화검존을 죽이려다 역으로 죽었다. 그가 죽고 난 후 일화검존을 여인으로 좋아했음이 밝혀졌고, 당시에는 그에게 섭혼술을 걸었던 사람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 사람이 청선이었음을 알고 있다.
“마존 자리에 오르고 나서 그와 결별을 선언했어요. 그런데도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제 주변을 맴돌았어요. 이후 시간이 지나고 저를 잊고 잘 사나 싶었는데, 일전에 갑자기 저를 찾아왔어요. 다시 만나주지 않으면 자신과 사귀면서 있었던 일들을 폭로하겠다고요.”
사우종, 스스로 성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폭로를 빌미로 협박이나 하는 한심한 놈이다.
“마존이 되기 전의 일이니 상관없지 않소?”
협박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과거 그의 부탁을 받고 사형의 부채를 훔쳤던 적이 있어요. 그것까지 폭로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어요.”
당시 섭혼마존은 사람의 심장을 뽑아내서 생기를 흡수하는 심혼대법을 주기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바로 사우종이었다. 물론, 좋은 뜻으로 알려준 것은 아니다. 섭혼마존을 앞세워 나를 견제하려던 목적이었으니까.
심혼대법으로 희생된 시체가 발견되었고, 시체와 함께 섭혼마존 제자의 부채가 나왔다. 그것을 훔쳤던 사람이 바로 사우종의 부탁을 받은 청선이었다.
의도가 어쨌든 사우종으로 인해 섭혼마존의 악행을 막았고, 단지 섭혼마존을 끌어들였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수 없어 살려뒀던 자였는데, 이렇게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 일까지 밝혀지면 제 명성에 흠이 가게 될 거예요.”
그녀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마존이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한창 조직을 장악하며 커나가고 있는 그녀였기에 이번 일을 심각하게 여겼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녀의 두 눈에서 귀기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살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를 없애버릴까 고민도 했어요.”
“왜 없애지 않았소?”
사우종의 검술이 보통 실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존이 된 그녀의 섭혼술을 감당할 수는 없다. 따로 그를 유인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 이런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이 사람은 매사 의심이 많고 조심스러운 성격인데 왜 내게 이런 무모한 협박을 할까? 이러다 내게 살인멸구 당할 수도 있는데.”
확실히 의아한 부분이다. 내가 본 사우종도 매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조심스러운 자였으니까. 그런 자가 갑자기 무모한 짓을 벌일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무심코 뱉은 말 때문이었어요. 누구나 다 약점이 있지. 검존이라고 없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느꼈어요. 아, 이 사람 일화검존의 약점도 쥐고 있구나. 오랫동안 검존을 모셔 왔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때 이 일은 제가 처리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죽여버려선 안 되겠구나, 그때 떠오른 사람이 소교주님이었고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합격이다. 좀 전에 권마와 대화를 나누며 마존들은 저마다의 비상함과 꼼꼼함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바로 이런 점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을 거다.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내게 알려야 한다고. 그녀가 말한 첫 번째 이유도, 두 번째 이유도 모두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으니까.
본능은 또 말해줬을 거다. 이래야 나와의 관계도 더 가까워질 거라고. 그녀의 본능은 잘 작동되고 있다.
“정말 잘 판단했소. 이후 일은 내가 처리하겠소.”
청선의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지금까지 내가 보였던 결과들을 생각하면, 이후부터 발 뻗고 잘 수 있을 거다. 그래, 똑똑한 선택의 대가로 그 정도 선물은 받아야지.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한마디를 해주었다.
“정파와 사파가 제일 두려워하는 마존이 섭혼마존과 독왕이란 것을 알고 있을 거요. 그 두려움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길 바랍니다.”
청선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떠났다. 그 자부심이야말로 그녀가 노력해야 하는 최고의 동기가 될 것이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는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순한 협박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검존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일까? 만약 약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절로 마음이 차가워졌다. 누군가의 약점을 쥐고 협박으로 뭔가를 이루려는 자들은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었으니까.
그길로 내가 향한 곳은 북천검가였다.
* * *
“요즘 검존께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내 방문에 입구를 지키는 마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혈천도마 말대로 오직 무공수련에만 열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왔다고 기별만 해주게.”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검이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그곳에 서 있었는데 마침 사우종이 연무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교주가 되신 것 감축드립니다.”
“오랜만이오, 사 무인.”
그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원래 일화검존을 방문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그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인자에서 밀려나 평범한 마검이 된 그였다.
그가 다시 공손히 인사한 후, 가던 길을 걸어갔다. 누가 알겠는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대하면서 뒤로는 섭혼마존을 협박하고 있을 줄. 지난번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은 다를 것이다.
그때, 일화검존에게 보고를 하러 간 마검이 돌아왔다.
“들어오시랍니다.”
누군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면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정말 노력하는 사람은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그 시간을 절대 소홀히 쓰지 않는다.
내가 궁둥이 붙일 기회만 있으면 천마호신공을 수련하듯, 일화검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거처 앞마당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수하의 보고를 받고 내가 올 때까지 그 짧은 시간도 아까워서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기세가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정말 모두가 강해지고 있구나.’
하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무공의 성취가 아니었다.
그녀는 얼굴에 화장기가 하나도 없었다. 혈천도마에게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민얼굴이었을 줄이야.
정말 딴 사람 같았다. 화장을 안 해서 못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느낌이 완전 달랐다.
내 놀람을 느낀 그녀는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이라네. 다른 사람에게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화장 안 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변했다고. 예전의 그 아름다움에만 빠져 있던 그 검존이 아니라고. 보라고, 내 의지를. 화장까지 지우고 너를 보는 내 의지를.
“선배님의 민얼굴을 보다니! 영광입니다.”
짐짓 격앙된 어조로 감탄하자 일화검존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영광은 무슨. 초라하고 늙었지.”
“오히려 더 아름다우십니다.”
“괜한 소리 말게.”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정말 더 아름답습니다. 지금까지 왜 그렇게 짙은 화장을 하셨나 싶을 정도로요.”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아무도 그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아주 오랫동안 당연히 화장한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모양이다.
“지금 모습이 훨씬 매력적입니다. 깨끗하고 우아합니다.”
“이 주름살은 어쩌고?”
“조금 전에 선배님의 검이 만들어 낸 검선처럼 아름답습니다.”
검존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역시!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은 소교주가 유일하네.”
“저는 진심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녀가 아무리 화장하고 아름답고 꾸민다 한들, 이안이나 진하령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중년 여인들과 비교하면 화장하지 않았더라도 검존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그 세상에선 검존이 이안이고 진하령이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자넨 정말이지 지치지도 않는군. 아무리 자네라도 사람들 챙기다 보면 지치기 마련일 텐데. 어찌 이렇게 기분 좋은 말을 해주나?”
“제가 아부쟁이라서 그렇죠.”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만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는 법이지. 나는 자네의 그 자존감이 부럽네.”
생긴 모습이나 분위기만 봤을 때는 마존들 중에 가장 자존감이 높을 것 같은 그녀였는데. 이럴 때 보면 자존감이 바닥이다.
“마존분들과 친해지는 일이 곧 제가 강해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제 한 마디 한 마디가 검을 한 번 휘두르고 두 번 휘두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팔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수련하기도 하는데, 그에 비하면 쉬운 일이죠.”
“사람 상대하는 일이 더 어렵지 않나?”
“너무 쉬운 수련을 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아! 내 수련 강도가 약했나 보군.”
우린 마주 보며 웃었다. 맞죠, 사람 상대하는 것이 열 배는 더 어렵죠.
“선배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시게.”
“사우종이…….”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 살짝 불편함이 스쳤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우종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더라도 그녀에게 사전에 보고는 해야 한다. 나는 그녀의 약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섭혼마존이 개입되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묻지 마시고, 제게 맡겨주십시오.”
일화검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일화검존에게 말하지 않고 바로 사우종을 처리해 버릴까도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다. 사우종은 비열한 자이지만 멍청한 자는 아니었으니까.
‘사우종, 넌 대체 뭘 믿고 목숨을 건 거냐?’
* * *
“삼인자야, 꽃을 피우려면 봄이 올 때까지 참아라.”
이인자였다가 삼인자가 된 화분을 바라보며 서대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우리에겐 영원히 봄은 오지 않을 거야.”
황천각주가 된 후 매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였다.
책상에는 업무가 가득 쌓여 있었다. 각주가 되니 해야 할 일도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다. 황천각주가 되면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아! 일하기 너무 싫다.”
그런 날 있잖은가? 괜히 일하기 싫은 날. 자꾸 창밖만 바라보게 되는 그런 날.
그가 책상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검무극이 황천각주이고 옆에서 도울 때도 업무량은 비슷했다. 그때도 거의 자신이 다 도맡아 했으니까.
하지만 그 일이 본격적으로 자기 일로 주어지자 느낌과 압박감이 달랐다. 같은 일이라도 더 힘들게 느껴졌다.
“소교주님과 출교했을 때가 좋았는데.”
특히 소룡전에 출전해서 우승했던 그 순간은 정말 잊히지 않았다. 비무대 위에서 들려오던 그 함성! 이안이나 장호에게는 너무 자랑을 많이 해서 더는 꺼낼 수 없는 그 영광의 순간!
“아! 돌아가고 싶다! 그때로!”
그때 문이 덜컥 열렸다.
책상에 엎드려 있던 서대룡은 벼락처럼 빠르게 일어나 허리를 곧추세우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리 급히 들어오는가?”
그러자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그때로 돌아가면 본교는 누가 바꿉니까? 각주님.”
서대룡이 벌떡 일어나며 반갑게 소리쳤다.
“소교주님!”
검무극이 웃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힘드냐?”
서대룡이 짐짓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힘들어요.”
이렇게 마음 편하게 힘들다는 말, 황천각주가 되고 처음으로 꺼냈다. 그 대상이 천마 다음으로 어려운 사람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힘드니까 네게 맡겼지. 아니면 내가 계속했지.”
“너무하십니다!”
오랜만에 소리치면서 서대룡은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정말 검무극을 보고 싶어 했었구나. 황천각주도 좋고, 혈천도마의 제자도 좋고, 다 좋지만 그래도 검무극이 제일 보고 싶었구나.
“그렇게 힘들면 나랑 일 바꾸자.”
“소교주님이랑요?”
“자, 네가 할 일을 말해주마. 취마 만나러 가서 고민 들어주고, 형이랑 마불 잘 있는지도 확인하고, 독왕 만나서 독초도 캐고. 아버지하고 바둑도 둬야 하고. 밤새워 무공수련하고.”
자신의 신분이 뭐였든지 똑같이 이런 너스레를 떨어주는 검무극이 너무나 보고 싶었구나.
“갑자기 제 일이 너무 쉽게 느껴지는데요? 죽을 때까지 월봉 받으면서 버틸 겁니다. 저 뿌리 내렸습니다.”
검무극은 위로는 너스레로 끝나지 않았다. 가만히 서대룡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고생 많다, 내 오른팔.”
오랜만에 듣는 오른팔이란 말에 서대룡은 울컥했다. 어찌나 바쁜지 자신이 검무극의 오른팔이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그래, 고생했다는 저 한마디면 충분했다. 고생하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데. 더 고생은 못 하겠는가?
그래, 알아줘야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길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일조차 힘든 일이 되는 법이니까. 서대룡은 앞으로 수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몸소 경험으로 배우고 있었다.
“고생은요, 제 삶이 누군가에게는 꿈일 텐데. 열심히 해야죠. 죽도록 하겠습니다! 소교주님과 함께 봄은 왔습니다. 제 마음에 꽃을 피워보겠습니다!”
한바탕 기분 좋게 외친 후에 서대룡이 물었다.
“한데 황천각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예전이었다면 ‘나하고 일하나 하자’라고 했을 검무극이었는데 오늘은 서대룡의 권위를 제대로 세워 주었다.
검무극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서 각주께 부탁할 일이 있소. 나와 질 나쁜 악당 하나 잡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