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06)
절대회귀-306화(306/424)
제306회 무슨 마존이 미신을 믿어?
천독림을 나와서 향한 곳은 대취림이었다.
언제나처럼 삼대취객 여빈이 나를 취마에게 안내했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취마님 요즘도 술 많이 마십니까?”
“한때 많이 줄이셨는데 요즘 부쩍 과음하시는 것 같아요.”
그녀의 눈빛은 내가 좀 말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여빈은 취마를 좋아하고 진심으로 위해주는 유일한 여인이다.
그렇게 섬에 도착하고 취몽루에 올랐다.
취마는 이미 취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마지막에 오냐? 내가 마존들 중에 꼴찌지? 아니면 이럴 수가 없다.”
취마는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형하고는 마지막에 만나야 편하게 술 마시지.”
“핑계는 좋다.”
“아이고, 형이 이해해 주라. 피곤한 하루였어.”
취마 앞에 다리를 쭉 펴고 편하게 앉았다.
“그거 모르지? 난 형하고 있을 때가 제일 편해.”
“만만한 거겠지!”
“그런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취마가 술을 따라 주었다. 어느새 그의 표정은 풀려 있었다. 구구절절한 변명보단 차라리 ‘그런가?’ 한마디가 이렇게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우린 함께 술을 마셨다.
독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속이 화끈했다. 예전에 취마가 마시던 술보다 더 독한 술이었다.
“술 줄였다더니, 더 독한 술을 마시고 있었네.”
“독하면 이 술 마셔.”
취마가 누각에 쌓여 있는 다른 술병을 가져와서 따라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원래 마시던 독주를 마셨다.
대체 무슨 고민일까?
궁금했지만 먼저 묻지 않았다. 주정뱅이에게 진실을 들으려면 두 가지 방법뿐이다. 술을 깨게 하거나, 술을 더 먹이거나.
“자, 한잔 더!”
그의 고민이 무엇이든 이렇게 오랜만에 취마와 술을 마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분위기 끝내준다.”
오늘따라 자욱한 물안개와 구름 속에서 뿌옇게 빛나는 달이 이 밤의 흥취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나가 있으면서도 술 생각나면 여기가 항상 떠올랐어. 형은 술 마시고 있을까? 호수에 떠다니고 있을까?”
“이제 추워서 물에 잘 안 들어간다.”
“시간 참 잘 간다.”
엊그제 봄이었는데, 벌써 춥다. 우린 잠시 각자 생각에 잠겨 술을 마셨다. 취마는 확실히 평소보다 많이 마셨다.
“형 술 많이 마신다고 여 무인이 걱정 많이 하더라.”
“여빈이야 만날 걱정이지.”
“걱정해줄 때 잘해. 나중에 후회 말고.”
“후회?”
취마가 무슨 뜻이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알면서 왜 묻나? 만날 술이나 마셔대는 것 같지만 취마는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여빈이 자신을 남자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모른 척하는 것이겠지.
그러고 보면 마존들은 하나 같이 가족을 이루지 못했다. 그나마 권마에게 최근에 딸이 생겼고. 다들 이렇게 혼자 살고 있다.
혈천도마가 만날 하는 말처럼 가족이 원수라서 그럴까? 가족이 약점이라 그럴까?
“잠시 나와 갈 곳이 있다.”
취마가 나를 배에 태웠다.
노를 저어서 입구 반대쪽 호숫가에 배를 댔다. 배에서 내린 취마가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만날 내가 취몽루에만 와서 그렇지, 대취림도 굉장히 넓은 곳이다.
한참을 걸어가자 주위에 안개가 자욱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살펴보니 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기(酒氣)였다. 나는 주기가 이렇게 안개처럼 펼쳐진 것을 처음 보았다.
“이곳에 노출되면 술에 취해 쓰러지게 된다. 내력으로 뽑아낼 수 있는 주기도 아니어서, 보통 사람은 절대 통과할 수 없지. 내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와라.”
취마가 걸어가자 주기가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지나가자 갈라졌던 주기가 합쳐지며 길이 사라졌다.
경공으로 달려서 갈 수도 없었다. 안개처럼 깔린 주기로 앞을 볼 수가 없었고 길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결국 이 길은 오직 취마만이 갈 수 있는 대취림의 금지(禁地)였다.
그렇게 미로를 빠져나오자 비로소 주기가 걷혔다.
눈앞에 서 있는 하나의 건물.
“대대로 대취마들이 술을 담아 먹는 곳이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양조장처럼 꾸며져 있었다. 시설들은 낡고 오래되어 보였지만 그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벽의 장식장에는 전대 취마들이 좋아했던 술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야 다양한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해서 여기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아. 게다가 내가 마시는 재주는 있어도 담그는 재주는 별로더라고. 그래서 가끔 와서 쉬었다 간다.”
양조장 가운데 특이하게 생긴 술잔이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취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에 주정(酒精)이 상했어.”
과연 그곳에선 썩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내가 마존이 되고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취마가 어두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불길해.”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취마가 고민이 있는 기색이었는지.
“혹시 나 죽으려나?”
“죽기는 싫은가 보네.”
“아직 못 마신 술이 얼마나 많은데.”
“걱정하지 마. 형 죽으면 중원의 모든 술을 다 사 와서 무덤에 뿌려 줄게.”
취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함을 느낀 그의 마음에는 지진 나기 전 새 떼가 날아오르고 동물들이 떼를 지어 달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정말이지 이런 이유로 심각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무슨 마존이 미신을 믿고 있어?”
“사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주정이 상하면 큰일이 생긴다. 대취마에게 문제가 생기거나 본교에 문제가 생긴다고. 물론 믿지는 않았지만.”
막상 주정이 상하니 심란한 모양이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아버지에게 알려.”
“싫어! 이제 겨우 교주님과 오해를 풀었는데.”
원래 취마는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오해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 사부를 싫어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오해를 풀었다.
“교주님께 술 선물도 하고. 그동안 잘 지냈단 말이지. 한데 주정이 상했다는 말을 들으면 괜히 기분이 찝찝하지 않겠어? 그럼 그렇지, 그 사부에 그 제자지. 하여튼 재수 없는 주정뱅이들 같으니라고.”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걱정하나 싶지만, 이렇게 섬세한 사람이 취마다. 적어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더욱 그러했고.
“아버진 미신으로 치부하고 마실 거야. 그런 분이시니까.”
나는 주정이 담긴 잔을 살피며 물었다.
“이거 어떻게 치우면 돼? 실수로 깼는데 천년을 내려온 대취림의 보물이다, 그런 말로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왜? 지금 치우게? 됐어. 나중에 내가 할게.”
“뭘 나중에 해. 혼자 온갖 우울하고 나쁜 생각 하면서 치울 거잖아. 나 있을 때 후딱 치워.”
취마와 함께 잔에 담긴 상한 주정을 비웠다.
내가 물을 퍼와서 잔을 씻는 사이 취마는 새로 술을 담기 위해 준비했다.
잔을 씻으며 그에게 말했다.
“형 때문에 상한 것 아니야. 요즘 본교를 어지럽히려는 자가 하나 있어. 그 재수 없는 놈 때문에 상한 걸 거야.”
“나 위로한다고 괜히 지어낼 필요 없다.”
“지어낸 말 아니야. 황천각과 통천각까지 동원해서 뒷조사 중이니까.”
“정말 그런 놈이 있어?”
“있어. 우리 형 우습게 보면 안 되겠네. 이런 것도 다 알아맞히고.”
그럼에도 취마의 표정이 편해지지 않았다. 내가 또 미신에 잡아먹히는 마존을 두고 볼 순 없지.
“형은 사람의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
“어느 정도는.”
“나는 아니야. 지금 당장 내가 형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당장 형과의 관계가 바뀌는데, 대체 뭐가 정해져 있다는 거야? 나는 주정이 상한 게 형이 나를 이곳에 데려오게 하려는 운명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영원히 몰랐을 거야. 세상일을 어떻게 알겠어? 언젠가 위기에 빠져서 이곳으로 도망쳐 오게 될지. 이건 불길한 경고가 아니라, 동생의 생명을 구하는 위대한 운명의 알림이지.”
“정말이지 잘도 가져다 붙이는구나.”
어이가 없어 웃었지만, 덕분에 불길한 마음이 많이 풀린 모양이다. 취마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런 말 듣고 싶어서 날 그렇게 기다린 거지?”
취마는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어.”
“앞으로도 자주 이용해 주십시오, 손님!”
깨끗이 씻은 술잔을 원래 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이용에 필요한 값은 술 한 잔과 미신 좋아하는 우리 형이면 됩니다.”
* * *
거처로 돌아왔을 때 야간조 호위들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강서지단에서 돌아온 후 지금까지 거의 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났다. 게다가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지금부터 쉴 테니까, 방해하지 마.”
당장 침상에 몸을 던질 듯 방으로 들어왔지만, 나는 잠을 자는 대신 시공이환술을 열었다.
불길함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는? 수련이다.
불길한 일이 생기면 없애버리면 된다. 불운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티는 거다. 이렇게까지 노력해서 버티는데. 불운, 너 따위가 어쩔 건데?
시공이환술 속에서 다시 시천비술을 발휘해서 시간을 달리 흐르게 했다.
그동안 피나는 노력을 해서 외부의 시간보다 두 배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무한대의 시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딱 열 배의 시간 차이를 내는 것이 시천비술의 최종 목표이다. 구화마공 십이성 대성을 이룰 시간까지만, 제발.
오늘 수련은 구화마공이었다. 그동안 제일초식만 반복해서 수련했는데, 이제 제이초식을 익힐 때가 되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극의에 이른 내 무공 경지가 이러하다.
구화마공 제이초식
대멸식(大滅式).
제일초식 인멸식이 한 사람만을 노리는 공격이라면 제이초식 대멸식은 다수를 상대하는 초식이었다.
제이초식을 발휘하자 악귀 하나가 소리 없이 내 앞에 등을 돌린 채 출현했다.
일 초식에 출현하는 네 악귀 중 가장 무섭게 생긴 그 악귀였다.
순간 녀석의 몸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스륵.
악귀가 분열했다. 분열한 개수는 모두 셋.
콰콰콰콰콰콰콰!
세 악귀가 검을 내지르며 앞을 휩쓸며 나아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곳에 무엇이 있던 다 쓸어버리는 공격이었다.
제이초식의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분열하는 개수도 늘어난다.
나중에는 수십 개로 분열해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초식이 될 것이다.
물론 소모되는 내공의 양도 분열되는 개수에 따라 늘어날 테고.
아버지는 몇 개까지 분열하실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숫자를 넘어설 것이다.
과연 내 한계는 몇 개일까?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악귀들이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격동했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 이초식 수련에 몰두했고, 해가 떠올 무렵 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이제는 정말 쉬어야 할 때다.
시천비술을 풀고 시공이환술을 다시 발휘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공간이 펼쳐졌다.
뜨거운 태양, 푸른 바다, 새하얀 모래사장, 잎 넓은 나무 아래 편안한 의자.
정말 오랜만이었다. 일부러 아꼈다. 이런 날 열려고.
나는 털썩 의자에 눕듯이 주저앉았다.
내 검강 색처럼 푸른 바다와 하늘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주정이 상했든, 사우종이 설치든, 배후가 있든. 이 순간만큼은 다 잊고 쉬었다.
품에 있던 비궤를 내 옆에 내려놓았다. 비궤에 사람처럼 눈과 입을 그려두었다. 활짝 웃는 표정이었다.
말로는 매일 열려라, 열려라 해서 기어코 열겠다고 말했지만, 비궤를 얻은 이후에 열려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너도 쉬어라. 그 오랜 세월을 사람들이 열려라, 열려라 재촉했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냐? 너도 쉬고 나도 쉬자.”
잠이 밀려들었다. 수마는 나를 오랜만에 보는 존재로 안내했다.
꿈속에서 나는 하늘에 서 있었다.
하늘을 닮은 바다 위, 내 기도 속이었다.
그때 그림자가 지며 세상이 어두워졌다. 돌아보니 거대한 무엇인가가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벽처럼 높은 해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천마혼.
몇 번이나 내게 모습을 보였던 그것이 꿈속에 나타난 것이다. 천마혼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있었기에 그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천마혼이라는 것을.
나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천마혼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안술도 통하지 않았다.
‘너도 내가 더 빨리 너에게 도달하기를 바라는 거냐?’
천마혼은 그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 * *
사흘 후, 서대룡의 집무실에서 첫 보고를 받았다.
“사우종의 재산 상태를 샅샅이 살펴봤음에도 별다른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돈이 오간 흔적도 없다?”
“네. 저축하고 쓰는 습관을 분석해 봤을 때 돈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인물입니다.”
서대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섭혼마존의 손에 죽으려고 한 것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더 나쁜 경우다. 네 말은 돈이 아닌 것에 움직였다는 의미잖아? 협객이라면 대의로 움직였겠지만 그런 사람 아니니까.”
“소교주님은 놈의 배후에 누군가 있다고 여기시는군요.”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거다.”
무림맹에 잠입해 있었던 목천가의 백천경을 생각해 보면 본교라고 그런 자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앞으로 일어나는 어떤 사건에도 항상 배후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건 사우종의 일과를 감시한 내용입니다.”
종이에 적힌 그의 하루를 차분히 살폈다. 보통 무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일상에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여기 화원은 뭐야?”
“근래 그 화원에 자주 간답니다. 가서 멍하니 앉아 있다 온다네요. 일화검존이 화원 가꾸는 것을 돕던 자였으니, 화원에 드나드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아니, 이상한데? 나라면 꽃이라면 꼴도 보기 싫을 것 같은데. 차라리 생뚱맞게 거문고를 배우러 갔다면 의심 안 했을 거다. 한데 다들 그러려니 의심하지 않는 곳을 주기적으로 찾았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수상하네요. 아, 소교주님이 제 동기가 아닌 것이 정말 다행이에요. 전 수석 입학 못 했을 겁니다.”
녀석의 너스레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제 어딜 갈 것인지는 명확했기에 서대룡은 창가에 놓인 화분을 쳐다보며 말했다.
“삼인자야, 너 친구 생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