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19)
절대회귀-319화(319/424)
제319회 언제나 소교주 때문이다.
그날 밤, 풍천교주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상대를 선입견 없이 제대로 보라는 검무극의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제자인 소백타를 선입견 없이 보지 못했다.
차이에만 집중했다. 그가 이런 성격이었나? 예전에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그를 제대로 보지 않고 감정에만 휘둘렸다.
‘교주전을 그렇게 다 바꿔버렸다고? 나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지만 냉정히 따지면 자신에 대한 존경심과 교주전을 바꾼 것은 별개의 일이다. 대수롭지 않게 결정해서 바꿨을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검무극의 말이 옳다. 해답은 내 마음에 있는 게 아니라 소백타에게 있다. 바뀐 교주전을 볼 것이 아니라 소백타의 눈을 들여다봤어야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상념으로 앞마당을 서성이고 있는데 황금빛으로 어둠을 밝히며 마불이 걸어 나왔다.
“자네를 잠 못 자게 하는 교주가 세 교주 중 어느 교주인가?”
“세 교주?”
“우리 소교주인가? 풍천교의 당대 교주인가?”
“나머지 한 교주는?”
마불은 풍천교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제야 풍천교주는 마불이 말한 마지막 교주가 전대 교주인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풍천교주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 문제는 마지막 교주 때문이지.”
그러자 마불은 다른 해답을 내놓았다.
“아니. 우리가 잠 못 드는 이유는 소교주 때문이네.”
어찌 모르겠는가?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오늘 이 자리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저 소백타는 아직도 ‘언제 교주 되나?’ 교주전만 바라보는 신세였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니 섬뜩했다.
고월은 여전히 교주전에 묶인 채로 있을 것이다. 아니, 족쇄의 열쇠를 지니고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자신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은 고월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며 펄쩍펄쩍 뛰고 있겠지. 그런 인생을 살고 있을 자신이 섬뜩했다.
풍천교주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마불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아마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저 마불도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겠지.
지금의 소교주가 아니라 다른 소교주였다면 대공자는 후계자가 되었을까?
그때 마불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솔직히 요즘 난 즐겁네.”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미쳤군’이란 말이 튀어나오려다 말았다.
마불의 입에서 즐겁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그래, 그도 사람인데 즐거울 수 있겠지. 한데 그 감정을 자신에게 드러낼 줄은 몰랐다.
“내가 아닌 다른 인생을 사는 이 기분이 즐겁다네. 지금까지 너무 지겨운 삶을 살아왔었나?”
권력투쟁을 내려놓은 삶도, 풍천교주를 도와주러 이곳까지 오는 삶도, 독초가 그려진 종이를 가득 받아드는 삶도, 그는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다른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마불의 말을 듣고 있던 풍천교주가 불쑥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난 한 번도 자네를 똑바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네.”
한때 친구처럼 지냈을 때도, 그러다 후계자 다툼으로 막말하며 싸울 때도, 그리고 이 순간까지도. 단 한 번도 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마불은 전혀 섭섭해하지 않았다. 풍천교주의 말에 담긴 뜻을 그 역시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마불은 쉽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 모든 책임은 소교주 때문이네.”
풍천교주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나 소교주 때문이지. 어른들 잠도 못 자게 만드는 건방지고 똑똑한 우리 소교주 때문이지.”
요즘 마불과 검무극 흉을 볼 때가 제일 재미있는 그였다. 언제나 검무극 욕할 때가 제일 신나는 그였다.
풍천교주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외의 달은 더 처량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러다 순간 아차 했다.
‘또 이런다. 또 마음에서 먼저 해답을 찾는다.’
다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보니 새외의 달이나 중원의 달이나 똑같았다. 그래, 달 보면서도 연습하는 거다. 답은 저 달에 있다.
* * *
다음 날 환영회장으로 가기 전에 작전회의가 있었다.
“지금쯤이면 이쪽 배후는 화원의 여인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일 겁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당했다고 생각하겠죠. 반응은 둘일 겁니다. 몸을 사리거나, 보복하거나.”
풍천교주와 마불은 겁을 먹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이 누구든 천마신교의 소교주나 마불, 그리고 전대 풍천교주에게 감히 복수할 거라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안다. 상대는 환여를 잃은 환왕이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경각심을 깨웠다.
“화원 여인을 통해 보셨다시피 실전된 혈교의 마공을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긴장을 늦추시면 안 됩니다.”
혈교는 확실히 풍천교주에게 효과가 있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그의 눈빛이 강렬해졌으니까. 또한 풍천교주는 멸망한 혈교를 부활시키려는 자들이 있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었고.
“교주님은 오늘 연회에 참석한 이들 중에 혹시라도 섭혼술에 당한 사람이 있는지 잘 살펴봐 주십시오.”
마불에게는 다른 당부를 했다.
“놈들이 저나 교주님이 아니라 허를 찔러서 마불님께 접근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그 점 유의하셔서 의심스러운 자가 접근해오는지 살펴주십시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힘차게 말했다.
“자, 가시죠. 전쟁은 이제부터입니다.”
두 사람과 함께 객청을 나섰다.
검무극 양옆으로 풍천교주와 마불이 나란히 걸었다. 이곳 새외에서는 그들이 날개였다.
* * *
환영연회장에는 풍천교 오대장로들은 물론이고 주요 고수가 모두 모였다.
풍천교라고 전부 환술의 고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환술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 무인들도 있었다. 지금 풍천교주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장로 후양(候洋)이 그러했다. 그는 새외삼대검객에 속한 검술의 고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 교주님이란 호칭을 쓰지 못하니 후양은 풍천교주를 뭐라 불러야 할지 어색했다.
“잘 지냈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풍천교주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이 그 말이다.
“얼굴도 편안해 보이십니다.”
“고맙네. 자네도 아주 보기 좋군.”
예전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예전에 관계가 좋았으니 당연히 지금도 내게 호의적이겠지.
풍천교주는 차분히 그를 응시했다.
정말 그럴까?
이제 이 물음이 무겁게 다가온다.
검무극이 말하는 게 이런 거다.
지난 관계, 성격, 평판, 듣기 좋았던 말, 혹은 말실수. 이런 것들 끌어와서 지레짐작으로 판단하지 말고, 지금 자신을 보는 저 눈빛과 표정과 말을 똑바로 보고 들으라는 거다.
“자네를 더 귀히 중용하지 못해 미안했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순수 무인 출신인 자네를 존중했었다네. 본교에 투신해줘서 고마웠고. 그래서 좀 더 나은 대접을 해줘야지, 생각은 있었는데 미루다가 기회를 놓쳤지. 미안하네.”
그에게 사과했다. 이렇게 사과를 하는 것도 검무극을 만난 후의 변화였다. 고월에게도 사과하고, 마불에게도 사과하고, 후양에게도 사과하고. 그래, 다 사과하는 거다.
후양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속셈인가 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후양이란 사람과 자신의 관계는 딱 이 정도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친절하게 굴지?’라는 당혹감이 생기는 정도의 거리. 이것이 그와 자신과의 거리다. 앞서 느꼈던 막연한 친근함은 자신의 마음에만 있던 감정이었고.
자세히 보려고 노력하니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그냥 오늘 아니면 다시 해줄 기회가 없어서 말해준 거라네.”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후양을 필두로 다른 장로들도 풍천교주에게 와서 인사했다.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풍천교주가 물었다.
“한데 성 장로가 보이지 않는군.”
그러자 후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 장로님은 장로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셨습니다.”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성 장로는 성야(星爺)라는 인물로 오대장로의 수석 장로였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사람이기도 했고.
“물러난 이유가 뭔가?”
“이제 그만 쉬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풍천교주는 자신이 교주직을 내려놓고 떠날 때 성 장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새 교주님을 모시겠습니다.
―자네만 믿고 가네.
그랬던 사람인데 쉬고 싶다고 물러났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가 물러났다면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검무극에게도 사람들이 와서 인사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를 직접 만날 일은 평생 있을까 말까한 기회였다. 그래서 다들 자신을 소개하며 어떻게든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했다.
그때 한 여인이 과감한 인사를 해왔다.
“소교주가 이렇게 잘생긴 줄 알았다면 저는 이미 새외를 탈출했을 거예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었다. 거칠고 요사한 기운을 풍기는 풍천교 사람답지 않게 그녀는 선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구숙(具淑)이에요.”
“검무극입니다.”
검무극은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오대장로 중 한 사람으로 풍천교주를 많이 따랐던 여인이다.
그때 풍천교주가 그곳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소교주에게 빠졌다간 정말 새외탈출을 감행하게 될 거라네.”
구숙이 환하게 웃으며 풍천교주에게 인사했다.
“우리 오라버니처럼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란 말에 풍천교주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이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이제 교주도 물러났는데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죠. 기억 안 나세요? 교주직에서 물러나시면 제가 오라버니라고 부른다고 했었는데.”
솔직히 기억나지 않았다. 저런 말을 지어낼 리 없으니, 자신이 얼마나 남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농담인 줄 알았지.”
“저는 단 한 번도 농담한 적이 없답니다.”
풍천교주는 그저 눈을 껌벅이며 듣고 있었지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교주를 존경하고 있음을.
“소교주님,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술 한 잔 대접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저야 언제든지 좋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아름다운 누님께 술과 인생을 배울 기회를 어찌 놓치겠습니까?”
검무극의 너스레에 구숙은 활짝 웃으며 소교주의 반만이라도 닮으시라고 풍천교주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렇게 시원시원한 성격의 장로가 있는가 하면 인사만 한 후에 조용히 탐색만 하는 왕효(汪梟)같은 장로도 있었다.
옆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검무극이 돌아보니 마불이 탁자에 걸터앉은 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녔기에 대화를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그때 교주 소백타가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풍천교의 무인들은 일제히 예를 갖추며 그를 맞았다. 소백타의 얼굴에는 어제의 그 문양이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요사스러웠던 분위기가 오늘은 순수하게 느껴졌다.
소백타는 검무극부터 챙겼다.
“오늘은 소교주님을 위한 날이니, 마음껏 드십시오.”
“새외의 술이 이렇게 맛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귀한 분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술이지요.”
다음으로 마불과 인사했고 마지막으로 풍천교주를 챙겼다.
“사부님,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우리 교주가 신경 써 준 덕분에 편히 잤네.”
일부러 다들 들으라고 우리 교주라고 표현했다. 배후가 어디에 어떻게 잠입해 있는지 몰라도 풍천교주는 소백타를, 그리고 풍천교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교주.”
“네, 사부님.”
“오랜만에 교로 돌아오니 문득 음뢰종이 보고 싶네. 볼 수 있겠나?”
“물론이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소백타와 단둘이 있고 싶어서 한 말이기도 했고, 실제로 음뢰종이 보고 싶기도 했다.
연회장을 나온 소백타는 풍천교주를 데리고 교주전으로 향했다.
‘어제 갔던 그곳에는 음뢰종이 없었는데?’
의아한 마음이었지만 풍천교주는 잠자코 소백타의 뒤를 따랐다.
교주전에 들어선 소백타가 태사의에 올라가 앉더니 손을 올려두는 곳에 내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사방 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구우우우웅.
벽 뒤에 장식장이 놓여 있었고 풍천교의 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기왕 내부를 바꾸는 것, 신물들 보관도 이렇게 바꿨습니다.”
“아주 정교한 기관이로군. 멋있네.”
물론 신물들 쳐다보는 재미로 살았던 풍천교주와는 맞지 않았다.
풍천교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신물을 구경했다.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것들을 다 챙겨서 신교로 갔었는데.
음뢰종은 태사의 뒤쪽 중앙에 놓여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음뢰종을 바라보는 풍천교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음뢰종에 새겨진 악귀는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고월이 안부 전하라네.’
나란히 옆에 서 있던 소백타가 나직이 말했다.
“교를 떠나실 때 제게 하셨던 말 기억하십니까?”
순간 풍천교주는 흠칫했다.
‘내가 뭐라고 하고 떠났었지?’
그때의 자신은 정말 정신없었다. 어서 일을 끝내고 고월에게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그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앞서 구숙에게 들었던 말을 잊은 것도 그렇고.
이건 기억력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삶의 태도의 문제다. 오직 자신의 감정에만 취해 상대를 잘 보지 않고, 상대의 말을 잘 듣지 않았던 태도의 문제. 그래서 다 잊어버리는 거다.
자신에게 현실은…… 환술 속 세상보다 못한 세상이었나 보다.
음뢰종을 쳐다보던 풍천교주가 고개를 돌려 소백타를 쳐다보았다.
소백타는 차분히 그날 풍천교주가 해줬던 말을 그대로 했다.
“나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너는 꼭 이루도록 해라.”
그 말을 들으니 기억났다. 그래, 이 말을 그에게 해주었다. 떠나는 사람이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너는 부디 오래 남아서 교주로 죽으라는 뜻으로 해준 말이었다.
소백타도 고개를 돌려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음뢰종의 악귀를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저는 그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교주 꿈이 무엇이오?”
왠지 나와서는 안 될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했다.
“무림일통입니다.”
“!”
그래, 거기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풍천교라는 크나큰 패권을 가진 수장이라면 한 번쯤 가져볼 수 있는 꿈이었으니까.
문제는 다음에 나온 말이었다.
“이제 그 첫발을 내딛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