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2)
절대회귀-32화(32/424)
제32회 안주가 필요합니다.
다음 날, 마가촌에 황천각 지부를 열었다.
위치는 풍류주점 건너편에 마련되었다. 정말 소규모 지부라 그곳에는 신입조사관 하나와 집행무인 한 명만 배치되었다.
필요한 집기들이 들어가고, 현판이 붙는 모습을 지켜보던 풍류주점 주인장 조춘배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주님, 왜 지부를 여기 둔 겁니까?”
“만약 그대가 본교 무인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칩시다. 하면 지금까지는 어떻게 했소?”
“……어떻게 하다니요?”
조춘배의 질문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하긴. 그냥 억울하고 말았지.
“본교 무인들이 관련된 일이라면 황천각에 와서 고하면 되오. 주위에 그래 본 사람 있소?”
“아뇨,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없을 수밖에 없다. 황천각까지 오기 위해서는 본교 정문에서부터 무슨 목적으로 방문하는지 보고해야 하고, 신분 확인은 물론이고 몸수색까지 거쳐야 한다. 심지어 그런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 황천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니 누가 가서 고발하겠는가? 결국 황천각은 마가촌 주민들은 버려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인장께서 소문 좀 내주시오. 마가촌 주민들이 본교 무인들에게 피해를 보면 이곳 지부에 와서 고발하면 된다고.”
“한데…… 보복이 두려워서 다들 망설일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조만간 발표할 겁니다. 황천각 조사와 관련해서 고발자에게 보복할 시에는 참형에 처할 거라고.”
“참형이라고요? 아, 정말 우리를 위해서 지부를 여시는 거군요.”
조춘배는 크게 감격했다.
원래라면 그는 형식적인 일 처리라며 믿지 않았을 것이다. 저러다 결국 유명무실해지겠지 하고.
하지만 이번에 내가 백도귀 양태 부자를 처리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기에 조춘배는 신이 났다.
“이보게들, 여기 와서 들어보게.”
그가 저잣거리 사람들에게 지부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억울함을 고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얼마가 되든 이 시도는 본교의 기강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렇게 손쉽게 고발할 수 있게 된 이상, 함부로 약자를 괴롭히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지부 정리가 끝나고 돌아오는 데 서대룡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정말 잘하셨습니다.”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지.”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황천각은 무게 중심이 머리에 있었다. 팔마존의 눈치를 보며 교내 여러 조직의 문제를 해결해 왔지. 원래의 창설목적에서 벗어나서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거다. 난 이제부터 황천각의 중심을 다리에 둘 거다. 이곳 마가촌의 주민들, 하급 무인들, 상대적으로 약해서 억울함을 당하는 이들을 지켜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단 하나의 원칙만 잊지 않으면 돼.”
“그게 뭡니까?”
“목숨의 무게는 똑같다는 것. 하급 무인도, 마존도 목숨의 무게는 똑같다. 그렇기에 우린 똑같은 기준으로 일을 처리한다.”
서대룡의 얼굴에 격정이 스쳤다.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다면, 전 개소리라 여겼을 겁니다. 현실을 무시한 한심한 이상론에 불과하다고요. 하지만 각주님이시라면 믿습니다.”
“욕이야, 칭찬이야? 방금 나 욕한 거지?”
“더 무섭게 다가서시면 첫 고발자는 제가 될 겁니다.”
후다닥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녀석에게 말한 황천각의 박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나는 집행무인들을 모두 소집했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이 목청을 높여 인사했다. 이번에 백도귀까지 뇌옥에 가두면서 처음 부임했을 때보다도 내 인기는 더 높아져 있었다.
인기뿐만 아니라 권위도 높아졌다. 후계 구도에서 형에게 밀렸다고 생각해서 나를 은근히 무시했던 자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걸어가다 마주치면 눈부터 내리깔았다.
“지금까지 본각을 위해 헌신해준 그대들에게 감사한다.”
내가 단상 옆으로 나와 그들에게 포권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집행무인들 역시 일제히 포권하며 내 인사를 받았다.
“조사관들 없이 우리끼리 모인 적은 처음이지?”
“네!”
“오늘같이 좋은 날에는 좋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나는 오늘 그대들에게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 말에 집행무인들이 긴장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본교에는 본 각의 권위에 불복하고 도전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마군이 그랬고, 도귀들이 그랬지.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자네들보다 강하다고 여겨서다.”
자존심이 상할 이야기였지만 나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조사관에게 할 말이 있고, 집행무인에게 할 말이 있다. 이들에겐 돌려 말하는 것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더 효과가 클 것이다.
“팔마존 중 어디라도 좋다. 내 명령서를 가져가서 백도귀급 수뇌부를 체포해 올 수 있겠나?”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게 현실이었다.
“왜 안 되느냐? 본 각의 법보다 자기들의 주먹이 더 강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걸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해. 그대들의 주먹이 그들보다 더 강해지면 된다. 그대들이 무서우면 감히 개길 생각조차 못 하겠지.”
모두의 표정이 상기되었다. 자신들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 일들을 한 번쯤은 겪었을 테니까.
“나는 그대들이 지금보다 더 강해지길 원한다.”
물론 지금의 집행무인들도 강하다. 하지만 정예조직의 무인들을 압도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금 낮은 정도.
“그래서 오늘부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특별훈련에 들어간다.”
특별훈련이란 말에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고, 인상을 굳힌 이들도 있었다.
“이런 변화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지금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다. 다른 부서에 보내줄 테니, 앞으로 나오도록.”
잠시 망설이다가 두 명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다른 부서로 가고 싶다고 솔직히 말했다.
나는 그 두 사람을 각자 원하는 부서로 발령 내주기로 약속하고 돌려보냈다.
“눈치 보지 마라. 모두가 황천각에서 싸울 필요 없다. 각자 어울리는 자리에서 본교를 지탱해 나가면 되는 법. 또 없나?”
더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좋아.”
난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을 손짓해 불렀다.
그는 바로 마군 삼대주 장호였다. 마군의 대주 중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
지난번 내가 마군주를 죽여 친구의 원한을 갚아준 이후, 그는 나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부터 그대들에게 특별훈련을 해줄 분이다.”
아직 새 마군주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마군은 모두 대기상태였다. 그래서 이런 부탁이 가능했다.
장호가 그들 앞에 나섰다. 커다란 덩치에 얼굴의 칼자국까지. 그는 집행무인들을 압도했다.
“당분간 그대들의 훈련을 맡은 장호다. 개인적으로 여기 계신 각주님을 존경해서 이번 일을 맡게 됐다. 훈련은 혹독할 거다. 대신 한 가지는 약속한다. 견뎌낸 사람은 분명 이전보다 더 강해져 있을 거다. 알겠나?”
“네!”
집행무인들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훈련은 반 시진 후부터다. 모두 준비하고 다시 모이도록. 해산.”
집행무인들이 모두 흩어지고, 장호와 둘만 남았다.
“요즘 마군 분위기는 어떤가?”
“뒤숭숭합니다. 어서 차기 마군주가 결정되어야 안정되겠지요.”
나도 차기 마군주에 대해 여러 소문을 들었다. 워낙 중요한 요직이라 아버지와 사마명이 임명에 고심한다는 소식도 들었고, 마존들이 자기 줄을 대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이럴 때 도움을 청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이 공자님, 아니 각주님 명령이시면 언제든지 달려오겠습니다.”
“고맙네.”
장호마저 떠나가고 돌아서려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소리.
“이제 이틀 남았네.”
고개를 돌려보니 뒤쪽 담장 위에 혈천도마가 걸터앉아 있었다.
“할 일이 참 없으십니다.”
“마존쯤 되면 넘쳐나는 것이 시간일세.”
“제가 교주가 되면 마존들이 해야 할 일이 넘쳐날 겁니다.”
“그러려면 내 손을 잡게.”
혈천도마는 어떻게든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압박을 가하는 중이다.
“이러시는 거 형이 알면 섭섭해할 겁니다.”
“이해하겠지. 더 잘하는 쪽과 함께 가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내가 왜 정파 놈들을 싫어하는지 아나? 이런 마음을 너무 포장해. 그냥 저놈이 돈 많아서 좋다, 저놈이 더 강해서 좋다 하면 될 것을 협의가 어쩌고 도의가 저쩌고. 솔직하면 주화입마라도 걸리는 줄 알지.”
“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뭐가?”
“더 잘하는 쪽과 함께 가려는 그 인지상정요. 다른 마존이 저와 손을 잡고 싶어 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중에는 어르신보다 더 잘하는 분도 계실 수 있고요.”
대답이 궁색할 법도 했는데 혈천도마는 여유롭게 대처했다.
“이보게, 이 공자. 자네는 자네의 능력과 가능성을 믿나?”
“네.”
“천마가 될 자신도 있고.”
“있습니다.”
“그걸 제일 먼저 알아봐 준 사람이 바로 나야. 누군가의 진가를 파악하는 능력만 봐도, 누가 제일 잘할지는 나와 있지 않나?”
“달변가인 저도 어르신은 못 당하겠군요.”
“하하하하. 이틀 후에 보세.”
크게 웃음을 터뜨린 혈천도마가 훌쩍 몸을 날려 사라졌다.
‘늙은이가 어찌나 말을 그럴듯하게 잘하는지.’
얼핏 들으면 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억지에 가깝다.
내가 교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모두 내 변화를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혈천도마는 나와 얽히면서 먼저 나섰을 뿐이다. 침 좀 튀겼다고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셈.
혈천도마와 손을 잡는다?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다. 그가 진정 내 편이 된다면, 분명 큰 힘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 그와 손을 잡는 것은 안 된다. 아직 주도권은 혈천도마가 쥐고 있으니까.
* * *
다음 날, 나는 수련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집행무인들이 훈련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호는 혹독했다. 그야말로 피와 뼈를 깎는 훈련인데, 집행무인들은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장호는 시작 전 단 한 마디로 모두를 자극했다.
―우리 마군이 하는 훈련이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마군이 하는 훈련을 견뎌내지 못하면, 그들이 황천각을 우습게 보는 것을 인정해 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나는 장호가 참으로 영리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인에게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만큼 효과가 좋은 것은 없었으니까.
멀리서 장호의 외침이 들렸다.
“버텨라! 마누라도, 자식도, 친구도, 누구라도 배신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흘리는 이 땀만큼은 너흴 배신하지 않을 거다!”
나는 장호의 고함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혼인도 안 해본 장호가 마누라랑 자식을 언급하는 게 우스웠다.
‘그나저나 제대로 임자 만났구나.’
장호 같은 무인을 거느리면 정말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스치던 그 순간.
‘아!’
혈천도마와 관련해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 *
사흘째 되던 날, 혈천도마는 처음 손을 잡기를 제안했던 그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처럼 멸천대도를 땅바닥에 꽂아둔 채, 칼날에 기대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제 내 술을 마실 준비가 되었나?”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준비되었습니다.”
혈천도마가 흡족한 얼굴로 크게 웃으며 술을 따라 주었다.
건배까진 힘차게 했지만,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왜 안 마시고 내려놓나?”
“안주가 필요합니다.”
“안주? 사내대장부가 무슨 안주 타령인가?”
혈천도마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말한 안주가 실제 안주가 아니라, 어떤 요구 조건이란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떤 안주가 필요한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내가 대답했다.
“마군.”
생각지도 못한 말에 혈천도마가 두 눈을 부릅떴다.
“마군을 제 입에 넣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