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3)
절대회귀-33화(33/424)
제33회 새로 나온 호신갑입니까?
“입에 넣어 주면 소화는 시킬 수 있고?”
혈천도마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꼭꼭 씹어서 삼키겠습니다.”
“이보게, 이 공자. 세상일에는 순리가 있다네.”
“술 마시면서 안주를 함께 먹는 것도 순리 아니겠습니까?”
혈천도마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양쪽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러다 분노를 터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못 참겠군. 사흘이나 기다려줬는데 이딴 말 같지도 않은 조건을 건다고?”
그가 땅에 박혀 있던 멸천대도를 뽑아 들었다.
“그 머리통 들고 천마전으로 가겠다!”
쇄애애애애액!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를 휘둘렀다. 정말 나를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분노가 제대로 담긴 신경질적인 공격이었다.
카앙!
흑마검으로 받아치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법이군! 제법이야!”
혈천도마가 감탄했다. 상당한 공력을 실은 공격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막아낼 줄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 그 귀한 머리통 떼기가 쉽지는 않겠지?”
혈천도마가 다시 멸천대도를 휘둘렀다. 앞선 공격보다 더 빠르고 강한 공격이었다.
나는 바람을 찢으며 수직으로 날아드는 멸천대도를 이번 역시 흑마검으로 쳐냈다.
카아아앙!
앞선 공격보다 더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병기파괴자란 별칭이 붙은 멸천대도였지만, 흑마검을 손상하지는 못했다. 나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자꾸 까부는데 우리가 콱 부러뜨려 버릴까? 파괴된 병기파괴자! 내일 아침을 장식할 소문으로 훌륭하잖아?
검에게 농담하듯 떠올린 생각이었는데, 그런 마음을 품어서였을까? 풍신사보를 쓰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과연 혈천도마는 내가 펼치는 명왕보를 막아낼 수 있을까?
이것은 나의 투심(鬪心)이 만들어낸 유혹이었다. 강적을 만났을 때, 풍신사보와 같은 극상승의 무공이 반응하는 것이다. 싸우자고. 그래서 이기자고.
‘안 돼! 아직은.’
시간이 내 편인데, 굳이 부족한 내공으로 위험한 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다.
세 번째 공격이 날아들기 전, 나는 손목이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물론 그렇다고 내 뜻까지 물리진 않았다.
“마군을 제게 주십시오.”
혈천도마가 도를 거두며 물었다.
“대체 누굴 마군주 자리에 앉혀 달라는 건가? 설마 자넨가?”
“물론 아닙니다.”
“그럼 누군가?”
“삼대주 장호를 앉혀주십시오.”
“장호를?”
장호가 마군주가 된다면 마군을 내 우호 조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교내의 입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해진다.
비단 내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장호와 같은 무인이 마군주가 된다면 본교에도 큰 도움이 될 일이었다.
“장호를 마군주에 앉히는 일은 나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군 내부에서 대주를 뽑는다면 장호는 유력한 후보지만, 마군과 같은 정예조직의 경우 수장은 외부 인사에서 뽑았다. 천마전과 팔마존이 신경전을 벌이며 각자의 사람을 앉히려고 애쓴다.
“이 공자! 욕심이 과하면 배가 터지는 법이야.”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배가 터지도록 먹어 치워야 하는 길 아닙니까?”
“우리?”
“광기로 싹 다 잡아먹자고 하신 게 어르신입니다. 저와 손잡자고 한 것도 어르신입니다. 미친놈들이 가는 길이 어디 평범한 길이겠습니까?”
“놈들이라니!”
“그럼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어르신이 저와 손잡습니까?”
혈천도마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야망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세상에 밝히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팔마존 중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이 혈천도마다. 이 깐깐하고 영악스러운 도마가 말이다.
“흥! 당장에라도 천마가 된 것 같군.”
“제게 바람을 넣으신 분이 어르신 아닙니까? 대체 절 데리고 뭘 하시려는 겁니까? 번드르르한 말만 앞세워서 젊은 놈 이용이나 하려는 겁니까? 어르신 제자들처럼요?”
내 말에 정곡이 찔렸는지 혈천도마가 버럭 소리쳤다.
“네 욕심이 술상 엎었다!”
꽝.
실제로도 발로 차서 술상을 엎어버린 후, 그는 그대로 홱 하고 날아갔다.
저 멀리 사라져버린 그를 바라보며 오히려 나는 옅게 웃었다. 혈천도마의 여유가 처음으로 깨진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그의 술상 말고도 일곱 개의 술상이 더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기에.
* * *
개인 수련장에서 무공수련에 몰두했다.
회귀한 후 수련하면서 항상 느끼는 바지만, 정말이지 지치지 않는 젊음이 좋았다. 이건 내공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몸은 가볍고 활기찼다.
잃어봐야 소중함을 느낀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이 청춘에 가장 강력하게 적용되리라.
그래, 이때에는 알지 못했다. 얼마나 귀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지를. 나중이 되면 이 순간이 얼마나 그리워지는지를.
무공? 돈? 권력? 그것을 얻기 위해 바치는 것이 청춘이라는 사실이…… 우습고도 슬프다. 회귀까지 해서도 또 내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현실이지만.
그래도 알고 하는 실수다. 그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발 한걸음 옮기는 것도 신중하게 온 힘을 다해 수련했다.
풍신사보로 가상의 적들 사이를 누볐다.
처음에는 서너 명의 적들이었는데, 수련을 거듭할수록 적들의 수는 많아졌다. 다섯이 일곱이 되고, 일곱은 열이 되었다.
처음에는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적들이었지만, 이제 내 상상 속의 적들은 움직였고 대화를 나눴으며 내게 욕을 하기도 했다. 수련을 거듭할수록 그들의 무공 수위도 높아지고 있었다. 내 무공적 상상력만큼 수련의 수준이 결정되었다.
수련의 칠 할을 풍신사보에 할애했다면, 나머지 시간은 아버지가 가르쳐준 기 수련과 천마호신공을 연마했다.
한바탕 수련이 끝나고 나는 연무장 바닥에 누워 숨을 골랐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지만, 수련을 마친 이 순간만큼 기분 좋은 때가 없다.
창 너머 붉게 노을 진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이 젊은 몸으로 중원유람을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대법 재료를 구하면서 바라보던 석양과 화무기를 죽인 후 천하제일인이 되어 보는 석양은 완전히 다를 텐데…….
회귀 전에는 회귀한 이 순간만을 상상하며 그 고생을 감수했다. 이제는 화무기를 죽인 이후의 미래를 기대하며 참고 있다.
오늘의 나만 생각해선 안 된다. 수련이 부족해서 상대에게 비참하게 죽는 내일의 나도 나다. 그래, 참자.
내가 다시 일어나자, 가상의 적들도 다시 몸을 일으켰다.
* * *
이틀 후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혈천도마가 마군주 후보로 삼대주 장호를 추천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신경질을 내고 사라진 혈천도마였지만, 결국 내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애초에 그가 엎을 수 없는 술상이었다.
이 소식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당사자인 장호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를 찾아와서 묻는 것만으로도 그는 총명하고 눈치도 있는 사람이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 일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장호는 세상에 그런 행운은 없다는 것쯤은 깨우친 사람이었다.
“이공자께서 만드신 일이지요?”
“맞네. 내가 혈천도마께 부탁했네.”
“저를 높이 사주시는 것은 감사할 일이지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겸손할 필요 없네. 내게 죽은 마군주도 차지했던 자리야.”
“그건 다른 경우지요.”
“삼 대처럼만 이끌게. 그럼 역대 마군주들 중에서 최고의 마군주가 될 거라 확신해.”
특히 그는 대주 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사람이었다. 삼대 무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도 받았고. 내부에서 뽑는다면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이공자께서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겁니다.”
“자네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다른 후보들도 언급되는 상황이니, 좀 더 지켜보자고.”
장호는 당황한 와중에도 동시에 기뻐하고 있었다. 마군 대주들의 꿈이 무엇이겠는가?
“자, 우리 할 일은 다 했으니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자고.”
* * *
장호에게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지만, 저 무심한 하늘이 잘도 응답하겠다. 내가 부지런히 움직여서 일을 만들어내야지.
그날 밤, 나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천마전에는 아버지의 숙소가 따로 있었는데,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숙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선 아버지의 낯선 모습에 나는 헛것이라도 본 듯, 눈을 껌벅였다.
“새로 나온 호신갑입니까?”
“아니, 내 잠옷이다.”
“…….”
“…….”
“꽃문양 잠옷이네요. 마귀나 악귀가 아니라…….”
“잠은 편히 자야 한다는 주의라서.”
잠옷을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화사한 꽃문양 잠옷도 충격적이지만, 이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신 것이 더 놀라웠다. 기다리라고 한 후에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셨어도 됐을 텐데.
“야밤에 무슨 일이냐?”
“야밤이라니요? 초저녁이죠. 이렇게 일찍 주무시는 줄 몰랐습니다. 이거 특급기밀 아닙니까? 무림맹이 알면 당장 쳐들어오겠습니다. 천마가 일찍 잠든다더라, 심야에 기습하자!”
“용건만!”
“네.”
너스레는 거기까지 떨고 나는 오늘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혈천도마를 제 칼로 쓰려고 합니다.”
“언제는 죽이겠다더니?”
“죽이기는 아까워서요.”
아버지에게 새 소식은 아닐 것이다. 혈천도마가 장호를 추천했을 때, 이미 혈천도마와 내가 손을 잡았다는 것을 눈치채셨을 테니까.
아버지뿐만 아니라, 교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주목하고 있다. 나와 혈천도마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나중에 형은 어떻게 반응할 거며, 다른 마존들은 각기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아버지가 화제를 돌렸다.
“새 검은 어떠하냐?”
“마음에 듭니다.”
“어디 보자.”
나는 흑마검을 검집째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천천히 흑마검을 뽑아보더니 이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잘 들였다.”
“잡아만 봐도 아시는 겁니까?”
“잡아보면 알아야지, 찔리고 나서 알 테냐?”
아버지가 다시 흑마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혈천도마는 이렇게 쉽게 길들지 않을 거다.”
“길들일 생각 없습니다. 부러질 때까지 쓰다 버릴 겁니다. 아직까진 소장 가치 없습니다.”
“그러다 네가 베이면?”
“그럼 베여야죠. 대신 혈천도마와 전 다른 점이 있을 겁니다. 늙은 혈천도마는 한 번 부러지면 그대로 끝이지만, 저는 베이면 베일수록 더 강해질 겁니다. 약 바르고 붕대 감고, 계속 나아갈 겁니다.”
“말이야 쉽지. 한데 왜 내게 보고하는 거냐?”
“이제 아버지가 주시는 녹봉을 받는데, 당연히 보고드려야죠.”
아버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혈천도마의 추천을 받아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은 아니고?”
참으로 눈치가 빠르신 분이지만, 이번만큼은 틀렸다.
“아뇨, 반대입니다. 절대 혈천도마의 뜻대로 허락해 주지 마십시오.”
“허락해 주지 말라고? 이유는?”
“이참에 혈천도마의 기를 꺾어버리려고요. 제 앞에서 어찌나 기세등등한지. 어떤 때 보면 아버지보다 더 잘난 척을 합니다. 그 기를 꺾어버릴 작정입니다.”
“헛소리 말고. 네 진짜 속마음을 말해라.”
“왜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마군을 얻을 기회인데, 고작 혈천도마의 기를 꺾는다고 마군을 포기해? 너 그런 아이 아니지 않으냐?”
역시 예리하신 아버지시다.
“네, 잘 보셨습니다.”
“뭘 노리는 거냐?”
“혈천도마에게 얻어낼 것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려면 이번 일이 혈천도마 뜻대로 되면 안 됩니다.”
“마군보다 중요한 것이냐?”
“어떤 면에서는요. 아, 그리고 마군도 제 것으로 만들 겁니다. 전부 다 제 것으로 만들 겁니다.”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그대로 돌아섰다.
“그만 웃기고 가라.”
말은 그러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 부탁을 들어주실 것을.
아버지의 등에 활짝 핀 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버지. 적어도 오늘 밤, 그 잠옷보다 더 웃긴 건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