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33)
절대회귀-333화(333/424)
절대회귀 333화
제333회 나이 든 욕망을 드러낼 때는.
취마와 일화검존이 대취림에 도착했다.
“술 상자는 여기 두고 가. 지금부터는 내가 들고 갈게.”
취마의 말에 일화검존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한잔 마시고 갈래.”
“그렇게 붙잡을 때는 매정하게 그냥 가려고 하더니?”
“좋은 술이 생겼잖아.”
물론, 그래서가 아니었다. 취마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느꼈기에 위로해주려는 것이다. 어쩌니 해도 하나 있는 친구였으니까.
일화검존은 자신들을 맞이한 삼대취객 여빈에게 말했다.
“오늘은 같이 마시지.”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마시고 싶어서 그러네.”
그러자 여빈이 취마를 쳐다보았다. 취마는 일화검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여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주를 챙겨오겠습니다.”
일화검존과 취마가 먼저 취몽루에 올랐다.
“왜 안 하던 짓을 해?”
질문을 하면서 취마는 스스로 답을 떠 올렸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화해하도록 뒤에서 몰래 노력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묵은 갈등도 많이 해소했고.
일화검존은 그 사실을 모르는데도 여빈과 자신을 이어주려 하고 있다. 정말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인가?
“만날 하던 짓만 하니 지겨워서 그래.”
일화검존이 손을 내밀자 가져온 상자에서 술 한 병이 떠오르더니 그녀가 앉아 있던 누각으로 날아왔다.
“금손이네. 저 많은 술 중에서도 제일 귀하고 비싼 술을 딱 뽑는 걸 보니. 하긴, 검존의 손이니 제일 존귀하지.”
예전이었다면 저 농담에 살짝 발끈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제 노여움이 들지 않았다.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지금 자신의 손은 귀한 손이다.
일화검존은 안주를 챙겨온 여빈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공손히 술을 받은 그녀가 술잔을 비웠다. 일화검존은 잔을 든 그녀의 손이 긴장으로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한잔 더 받게.”
일화검존이 또 따라주었고, 석 잔까지 따라주었다.
석 잔을 연속해서 마시니 그녀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대가 대취림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객들 중 많지 않은 여인이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빈이 일화검존의 삶에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최근에 일화검존이 심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녀가 눈에 들어온 것일 뿐.
삶이 변해야 무공도 변한다.
검무극의 하던 말과 반대 경우였다. 무공이 변하니, 더 정확하게는 무공을 대하는 그녀의 마음이 변하니 삶이 변하고 있었다. 이렇듯 삶과 무공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때의 자네는 어렸고, 나는 꽤 젊었고, 저기 자네 마존은 상당히 멋있었는데.”
취마가 소리 없이 웃었다. 평소라면 지금이 더 멋있다면서, 그 치기를 어디 중년의 매력에 갖다 대냐면서 온갖 너스레를 떨었을 텐데. 오늘의 취마는 차분했다.
세 사람이 술을 마셨다. 일화검존은 취마를 대화에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냥 혼자 술 마시게 두고, 여빈과 둘이 대화를 나눴다. 이런저런 질문을 했지만 노련한 검존답게 여빈이 불편해할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단 이 질문은 제외하고.
“혼인하고 싶지 않은가?”
취마가 쓸데없는 것 묻는다는 눈빛으로 일화검존을 쳐다보았지만, 그 시선을 무시한 채 일화검존은 여빈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생각 없어요.”
“왜 없나?”
“매일 이렇게 술을 마시는 부인을 좋아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같이 술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되지. 대취림에 남자들 많지 않나?”
여빈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네 마존은 어때?”
그러자 취마가 끼어들었다.
“괜한 소리 한다! 취했어?”
일화검존이 취마에게 말했다.
“그래, 취했다. 너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대면서 왜 안 취하는데? 취마면 취해야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일화검존이 작정했던 말을 꺼냈다.
“너 요즘 왜 이리 삐치고 화나는 줄 알아?”
취마는 발끈했다. 삐치다니? 지금 내 수하 앞에서 그딴 말 할 거야?
하지만 일화검존은 하던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참아서 그래. 나이 먹었다고 참고, 마존이니까 참고. 그놈의 나이가 뭔지. 체면이 뭔지. 이봐, 친구. 나이가 들수록 자기 욕망을 품격 있게 잘 드러낼 줄 알아야 해. 화 그만 내고 그만 삐치려면 그래야 한다고.”
정작 자신은 품격 있게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래서다. 그녀가 이 부분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이유가. 잠시라도 상념에 빠지게 되면 어김없이 지난날 자신의 수치스러웠던 욕망을 떠올렸으니까.
“헛소리 그만하시고 가. 남의 귀한 선물 그만 축내고.”
“싫어.”
“그럼 내가 간다.”
술 한 병 손에 든 채 취몽루를 내려간 취마가 홀로 호수에 배를 띄웠다.
두 여인은 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향해 서서히 흘러가는 취마의 배를 쳐다보았다.
“사실 자네에게 한 말이었네. 이런 말 해봤자 저 친구는 들어먹지 않을 것 알거든.”
여빈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참고 또 참으면. 처음에는 삐치게 되고, 나중에는 화가 나겠지.”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았기에 오히려 여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겁나나? 이러다가 옆에서 지켜보는 삶까지 사라져 버릴까 봐?”
여전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겁내지 말게. 이만큼 지켜봤으면 됐어. 그건 미련이고 습관이네. 그 삶은 이만 떠내려 보내게.”
취몽루에도, 호수에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일화검존은 취기가 깨며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충고할 처지인가? 여빈에 대해 뭘 그리 잘 안다고.
두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외 술이 너무 독해서 기억 안 난다고 해야 하나?
“술 취해 한 말이니 너무 깊이 생각지 말게.”
일화검존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드디어 여빈이 입을 열었다.
“검존께서 제대로 보셨어요. 이미 전 삐친 상태를 거쳐서 화가 나 있습니다. 화가 난지도 몇 년이 되었지요.”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그녀였다. 항상 공손한 태도를 보였기에 그녀가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이렇게 떨리는 걸 보면 전 이 화난 삶조차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고 있나 봅니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처음으로 밝힌 여빈의 눈빛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일화검존은 더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서 주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용기를 그녀의 잔에 가득 채워주었다.
“오늘 하루는 진짜 주정뱅이가 돼 보게.”
그 말을 해주고는 훌쩍 몸을 날렸다. 술에 취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우아한 경공으로 호수를 건너갔다.
호숫가에 내려서서 돌아봤을 때 여빈이 술을 한 병 들고 호수에 떠 있는 취마의 배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일화검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후회할 때 하더라도 일단 저질러 볼 수 있는 그녀의 젊음이 부러웠다.
하지만 괜찮다. 앞으로 자신도 욕망을 드러내며 살아갈 생각이니까.
대신 고상하고 품격 있게.
* * *
형과 함께 동권문에 도착했다.
한때 백권부터 흑권까지 수련했던 탓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아는 얼굴이었다.
그때와 지금은 나를 대하는 눈빛과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철권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내원으로 들어섰다.
내원의 연무장에서 권마는 흑권들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는 흑권의 수련만 직접 지도하고 나머지 철권들의 수련은 천소희가 맡고 있었다.
“사부님! 저 돌아왔습니다.”
“왔느냐?”
오랜만에 보면 권마의 저 무서운 얼굴도 이렇게나 반가운 법이다.
권마는 무뚝뚝하게 나를 맞이한 것에 비해 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맞았다.
“오셨소? 대공자. 무거운 것 이리 내려놓으시오.”
그냥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제가 든 상자가 더 무겁다고요! 사람 차별하십니까?”
차별의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곽 방주에게 여러 번 들었소. 대공자께서 권갑을 만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마땅히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권갑이 완성되어서 가져왔습니다.”
검무양이 상자를 열어서 권갑을 보여주었다.
그사이 인사할 기회를 놓치고 꾸벅 고개만 숙였던 천소희가 내게 와서 속삭이며 인사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소교주님.”
“우리끼리 있을 때는 사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천소희는 지금은 우리끼리가 아니잖아요? 하는 눈빛으로 권마와 형을 쳐다보았다.
그들 두 사람 들으라고 다시 말했다. 속삭임을 가장한 외침이었다.
“매정한 사부님 밑에 이렇게 다정한 우리 사매가 있어서 다행이야.”
권마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정하면 다정할수록 네 사매의 수명은 줄어들 거다.”
“그건 안 되죠. 다정한 사매 취소입니다! 사매야, 비정강호다!”
지켜보던 이들이 미소를 지었다. 내 성격을 다들 잘 알고 있었으니, 분위기는 좋았다.
권마가 권갑을 들어서 살폈다.
“손바닥에 얇은 쇠 그물을 넣었군.”
“맞습니다. 가벼우면서 강도도 대단합니다. 철방의 기술이 그 부분에 집약되었지요.”
권마는 권갑을 천소희에게 건넸다.
천소희가 직접 권갑을 끼고 위력을 시험했다.
“일단 착용감은 아주 좋아요.”
그녀가 철권을 시켜 검을 가져오게 했다.
“힘껏 내질러!”
검을 가져온 철권이 힘차게 검을 내질렀고, 그녀는 손바닥으로 검을 막았다.
상당히 강한 위력이었음에도 손바닥은 멀쩡했다.
지켜보던 흑권들이 감탄했다.
권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권갑이군. 고생했네.”
“지금은 오십 명이 사용할 수 있지만 몇 달 내로 모든 동권문 철권들의 숫자만큼 제작해서 보내올 겁니다.”
“자네가 신경 써준 덕분이겠지. 고맙네.”
권마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고, 검무양은 지난 노고가 해소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소희가 권갑을 흑권들에게 나눠주는 사이 우린 함께 내원을 걸었다.
권마는 나보다 검무양과 대화를 주로 했다. 이번 권갑 제작과 관련한 이야기부터 동권문에 필요한 지원이 어떤 것인 있는지에 대한 부분까지. 일과 관련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말없이 함께 걸으며 확실히 느꼈다. 역시 이런 일들은 형이 더 잘한다는 것을. 일의 결과가 제대로 나오려면 누군가는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권마가 전음을 보낸 것은 우리가 작별을 고하고 돌아설 때였다.
―잘 돌아왔다.
―나중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나를 위한 사부의 환대는 이 한마디 전음으로 충분했다. 수백 발의 폭죽을 터뜨려 환영하는 것보다 더 기분 좋았으니까.
동권문 입구에서 검무양에게 말했다.
“배고프다. 같이 밥 먹자.”
“언제부터 우리가 밥 같이 먹었다고.”
“이번에 새외에 나가보니까 아버지 생각, 형 생각 많이 나더라.”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양이 말했다.
“조만간에 아버지 모시고 식사하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를 챙기라는 내 말에 대한 대답임을. 함께 해나가자는 뜻이었다.
“밥은 형이 사.”
“싫다. 돈 많은 네가 사라.”
놀랍게도 형이 좋아지고 있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사람 사이의 실수는 딱 이럴 때. 이제 막 좋아지기 시작할 때 저지르게 되니까. 이럴 때일수록 더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봐야 한다.
잠시 서서 형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내가 향한 곳은 남도종이었다.
혈천도마는 자신의 거처에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어르신.”
“여독이나 풀지, 여긴 왜 왔어?”
“어르신 뵙는 것이 쉬는 거죠. 한데 웬 책 정리십니까?”
그는 시화집과 문예집을 빼고 그 자리에 무공비급을 꽂고 있었다.
“젊었을 때 봤던 비급들이다. 대룡이 녀석 읽히려고.”
“다들 제자 사랑이 넘쳐나는군요.”
“다들?”
원래는 풍천교주를 두고 한 말이었지만.
“저도 권마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말씀이죠.”
“행여나. 두들겨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정리 도와 드려요?”
“다 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혈천도마가 쌓아둔 책을 뒤적였다.
“못 보던 책도 많이 생겼네요. 빌려주십시오.”
“책 읽을 시간은 있고?”
“없어도 내야죠.”
그렇게 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책장 정리를 하며 혈천도마가 물었다.
“무림맹의 그자와 같은 놈들이었나?”
무림맹의 백천경을 잡을 때 혈천도마와 함께 했었다.
“네, 같은 편 같습니다.”
“이놈의 무림은 바람 잘 날이 없구나.”
혈천도마는 더는 그에 대해 묻지 않으며 책을 몇 권 골라주었다.
“다 읽으면 또 빌려주마.”
“또 들르겠습니다.”
혈천도마가 빌려준 책을 옆구리에 끼고 나는 거처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적연이 술을 한 병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선물입니다.”
“선물?”
“취마님 선물 사실 때, 저희가 돈 모아서 한 병 샀습니다.”
보니 취마에게 선물한 술 중에서 비싼 편에 속하는 술이었다. 그걸 살 때, 호위들도 나 몰래 따로 한 병을 산 모양이다.
“너희가 돈이 어디에 있다고?”
“저희가 누군지 잘 모르시겠지만, 자그마치 천마신교 소교주님 호위들입니다. 돈 많이 받습니다.”
적연의 자학 농담이었다.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호받는 느낌을 받고 있을 테니까.
“선물 고맙다. 아껴 먹으마.”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적연이 물러가고, 나는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불을 끄고 침상에 눕는 대신 책과 술을 챙겨서는.
딱.
시공이환술로 나만의 공간을 열었다.
맑은 바다와 새하얀 모래사장, 푸른 하늘과 잎 넓은 나무, 그 아래 편안한 의자.
“이 녀석들아, 보고 싶었다!”
편안한 의자에 몸을 눕혔다.
“아, 좋다.”
정말 이곳에서의 행복감이란! 풍천교주는 환술을 익힌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지만, 이 공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지난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나이를 먹으면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했던 것은 나만의 공간이었고, 나만의 시간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세상만사 다 잊고 조용히 나만의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오늘은 안식처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내 의자 옆에 작은 의자가 하나 생겨났다.
그 위에 비궤를 올려놨다.
“어떠냐? 마음에 들어?”
비궤도 좋은지 활짝 웃고 있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술을 홀짝이며 책을 읽었다.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와 갈매기 울음, 그리고 책장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무림을 다 준다 해도 이 순간과는 바꾸지 않을 것이다.
돌아와서가 더 바빴던 귀교 첫날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