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4)
절대회귀-34화(34/424)
제34회 호랑이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보다
천마전으로 혈천도마가 들어섰다.
피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가 융단 끝에 멈춰 섰다.
“잘 지내셨습니까?”
혈천도마는 정중히 예를 갖춰 검우진에게 인사했다.
“덕분에 잘 지냈네. 자넨 어땠나?”
“자제분 덕분에 요즘 좀 바빴습니다.”
검우진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자식놈 머리가 크니, 내 마음대로 안 되더군.”
“하하하. 교주님께서도 안 되는 일이 있으셨습니까?”
“인생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늘이 안배한 존재가 자식이라지 않던가? 자네도 자식을 낳아봐야 알 텐데.”
“어디선가 제 자식이 크고 있을지도 모르죠.”
검우진이 웃었다. 그는 검무극을 대할 때보다 부드러웠고 친근했다. 검무극이 봤다면 ‘자식에게 이렇게 좀 활짝 웃으세요!’란 말을 틀림없이 했을 것이다.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혈천도마가 넌지시 검무극을 언급했다.
“교주님 뜻대로는 안 될지 몰라도, 요즘 이 공자가 교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네 작품 아닌가?”
사실 그렇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혈천도마와 얽히면서 검무극이 인기를 얻었으니까.
“이 공자는 교주님 작품이죠. 이렇게 멋진 작품인 줄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검우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들의 활약 이면에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직 철부지라네.”
“저는 가끔 이 공자 나이 때를 떠올려보곤 합니다. 지금 이 공자가 철부지면, 저는 버러지라 불러야 할 겁니다.”
“철부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과대평가야 교주님께서 먼저 하셨지요.”
검무극에게 황천각주를 맡긴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어떤 이유를 대든 파격적인 인사였으니까.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이 공자를 더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자네가 나선다면 둘째 놈에게는 기연이라 할 수 있겠지.”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알아서 하시게.”
“감사합니다.”
이야기 끝에 혈천도마의 방문 목적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기왕 허락해 주시는 것, 제대로 밀어주시겠습니까?”
“무슨 뜻인가?”
“이번 마군주 건, 제 뜻대로 진행하게끔 해주시죠.”
자신의 추천대로 장호를 마군주로 삼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런 감정 기복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마군주 건은 어렵네.”
“이번 건은 이 공자가 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자네도 말했듯이 둘째는 충분히 밀어줬네. 첫째 생각도 해줘야지.”
“제가 제자들을 키우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밀어줄 때는 한 녀석만 확실히 밀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지 못해서 제가 욕을 많이 먹고 있지요.”
“나는 괜찮을 거네. 너그러운 자네와 달리 날 욕하는 자는 다 죽여버리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그들에게는 눈빛만 봐도 상대의 뜻을 알 수 있는 세월이 함께한다. 그 세월이 길면 길수록 이 순간의 정적은 서먹해지는 법.
“더 할 말이 있는가?”
천마의 축객령(逐客令)에 혈천도마는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한번 결정하면 쉽게 결정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다음에 또 뵙지요.”
“그러세.”
혈천도마가 돌아서 나왔다. 피의 길을 걸어 나오는 내내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대체 이 무슨 뒤늦은 저울질이오? 한 번 밀었으면 끝까지 밀어야지. 쯧!’
* * *
“교주께선 자네보단 대공자를 더 생각하고 있더군.”
혈천도마는 나를 보자마자 아버지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대공자를 후계자로 생각하시는 것 같았네.”
자기에게 약점이 있을 때 오히려 먼저 상대를 흔들어댄다. 정말 이 늙은이의 정치질은 얄미울 정도다.
“우린 잘못된 만남 같습니다.”
“무슨 뜻인가?”
“제가 형에게 밀리면, 어르신이라도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셔야 하는데…….”
“내가 부족하다는 뜻인가?”
“다소 아쉽다는 뜻이죠.”
혈천도마는 화를 내는 대신 나를 달랬다.
“이보게, 이 공자. 장호를 마군주로 세우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어.”
“벌써 포기하신 겁니까?”
“안 되는 일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
“이 정도도 못 해내면서 그렇게 잘난 척한 겁니까?”
“이 정도? 잘난 척?”
발끈한 혈천도마를 더욱 약 올리기 시작했다.
“제 뒷배가 되겠다고 제안한 것은 어르신이었습니다.”
“안 되는 일을 애처럼 해달라고 졸라댄 것은 자네였고.”
“그럼 그때 거절하셨어야지요. 다음 날 장호를 추천하지 말았어야죠. 어르신께서는 혹시나 하신 것 아닙니까?”
난 혈천도마의 발아래 기다란 선을 그었다.
“예전에 그러셨죠. 여기까지가 교주님이 어르신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요. 이 선을 믿었는데…….”
나는 반보다도 못한 곳에 선을 다시 그었다.
“실제 아버지와 어르신의 선은 여기였던 것 아닙니까?”
혈천도마는 반박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아버지를 찾아가서 따로 부탁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아버지는 혈천도마의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아버지가 거절했다면 더 부탁했어야지요. 만약 저였다면 반드시 해냈을 겁니다.”
“그럼 한 번 해보게.”
“네?”
“이 정도도 못 한다고 나를 조롱하지 않았나? 그럼 자넨 쉽게 할 수 있겠지.”
“제가 아버지에게 부탁드려서 손쉽게 이뤄내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해보시든지. 아마 역효과만 날걸?”
자신의 부탁을 거절했기에 아들의 부탁은 절대 들어줄 리 없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이럴 때 보면 혈천도마는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내기를 하자는 말씀입니까?”
“내기? 좋지. 하자고. 만약 자네도 못 해낸다면, 그때부턴 군말 말고 내 물이 되어 주게. 안주 타령도 그만일세.”
“만약 제가 해낸다면요?”
“자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무엇을 원하더라도요?”
“원하는 것이 있나?”
잠시 고민한 후 그에게 말했다.
“영약을 구해주십시오. 적어도 마정단보다 더 좋은 영약으로요.”
순간 혈천도마가 흠칫 놀랐다. 나는 이 놀람의 성격을 정확히 알고 있다.
“마정단보다 더 좋은 영약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아니까 조건으로 걸겠죠. 한배를 타기로 한 이상 제가 강해지는 것은 어르신이 강해진 것과 같지 않습니까?”
내가 혈천도마에게 영약을 요구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영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마정단보다 더 많은 내공을 얻을 수 있는 희대의 영약 천외신단(天外神丹)이 그에게 있다.
과거 혈천도마는 본격적으로 형과 손을 잡으며 천외신단을 선물했다. 그가 오랜 세월 천외신단을 복용하지 않고 보관했다는 것도 그때 밝혀졌다.
내기를 유도한 목적은 바로 이 천외신단 때문이다.
“장호를 마군주로 만드는 것도 못 하겠다, 영약도 구해주지 못하겠다, 제가 어르신과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좋아, 자네가 장호를 마군주에 앉힌다면, 내 영약을 구해주겠네.”
“약속하시는 겁니다.”
나는 흑마검을 뽑아서 앞으로 내밀었다.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로 내 검을 튕기듯 때렸다.
쨍!
맑은 이 소리가 우리의 약속이었다. 독문병기로 하는 이 약속은 말보다 훨씬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다.
혈천도마는 언제나 그렇듯 홱 하고 솟구친 후 저 멀리 사라졌다.
내기에서 이기면 그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천외신단은 그가 후계자를 위해 준비해둔 것이었으니까.
앞서 복용한 마정단에 이어 천외신단까지 복용할 수만 있다면, 마존과의 싸움에서 내공이 부족해서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내기를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 * *
내가 찾아간 곳은 대군사 사마명의 집무실이었다.
그가 머무르는 이곳 통천각은 본교의 머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무림의 모든 정보가 이곳에 모여서 분류된다. 그중 사마명을 거쳐 아버지에게까지 전달되는 정보는 극소수.
모르긴 해도 요즘 통천각에서 천마전으로 전해지는 정보의 상당 부분을 내가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통천각 입구부터 사마명의 집무실까지 엄중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는데, 천마전보다 더한 경계였다. 그만큼 통천각이 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고, 머리 쓰는 군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더 철저히 지켜줘야 했다.
총군사의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사마명은 서류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책상에 쌓인 서류가 어찌나 많은지 그의 얼굴을 가릴 정도였다.
아버지 옆에서 몇 마디 조언이나 하면 그만일 것 같지만, 실제 총군사의 일은 문서와의 싸움이다. 하루에도 수백 통씩 중원 각지에서 날아드는 전서(傳書)를 읽고 또 읽고, 그래서 버려야 할 정보와 살려야 할 정보를 구분하는 일로 하루를 다 보내는 것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황천각주는 해도, 통천각주는 못 할 일이다.
책상에서 일어난 사마명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자, 이리로 앉으시지요.”
그와 탁자에 마주 앉았다.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 수하가 차를 가져왔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여긴 차가 한 종류밖에 없어서.”
“향이 아주 좋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교 최고의 지성이 일하는 곳답게 사방에는 온갖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요즘 본교 무인들이 모이면 전부 황천각 이야기만 한다더군요.”
“욕하느라 정신없는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칭찬 일색이라 들었습니다.”
황천각에 대한 여론은 내가 더 잘 안다.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겠다는 것에 대해 열광하는 이들만큼이나 반발하는 이들도 생겼나고 있었다.
지금껏 마음껏 살아왔기에 괜한 불안감이 들 것이다. 혹시나 나도 잡혀가면 어쩌나? 이런 걱정이겠지. 이런 분위기가 확대되기 전에 확실히 기강을 잡아야 한다.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군사님께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
“하시지요.”
“장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무인이라 생각합니다. 훌륭하게 마군을 이끌어 갈 재목입니다.”
사마명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추천의 배후에 내가 있다는 것을. 내가 장호를 마군주의 자리에 앉히려 한다는 것을.
“그럼 장호가 마군주에 오를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채 일 할도 되지 않습니다.”
“도마께서 장호를 추천했다 하더라도요?”
“그 추천은 교주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일 할이라는 수치가 나온 것이리라. 원래는 불가능이란 답이었는데 예의상 일 할이 된 것이다.
“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신다면요?”
“그럼 당연히 가능하지요. 한데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교주님께서는 한 번 내린 결정을 아무런 명분 없이 바꾸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내 부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명분도 없이 다시 결정을 바꿔 달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결정을 바꿀만한 명분을 만들어 드려야지. 내가 준비한 것은 이것이었다.
“혹시 이건 어떻습니까? 혈천도마에 이어서 다른 마존의 추천을 또 받는다면요?”
“동시에 두 명의 마존이 한 사람을 추천한다?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충분히 장호가 마군주가 될 가능성이 있겠지요. 교주님도 마음을 바꿀 명분이 생기는 거니까요. 한데 가능하겠습니까?”
혈천도마가 나선 상황에서 다른 마존이 나서서 장호를 추천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 해봐야죠. 때론 호랑이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보다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이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 동시에 팔다리가 뜯기는 불상사를 막으려면.
“그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지독히도 사이가 나쁘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