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49)
절대회귀-349화(349/424)
절대회귀 349화
제349회 나는 허락한 적 없다.
비사인이 긴 복도로 들어섰다.
맹주전으로 들어가는 길의 좌우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늑대들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이 복도를 지날 때면 텁텁하고도 숨 막히는 특유의 사기가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침입자가 들어오면 저 강철 늑대들이 움직여 자신의 몸이 갈기갈기 찢길 때까지 상대의 목을 물어뜯는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맹주전 끝에 한 남자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평범한 체구였다. 마르지도, 그렇다고 뚱뚱하지도 않은 그 뒷모습은 저자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비사인은 안다. 이 무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의 뒷모습이란 것을.
사도맹주 백자강(伯孜强).
사도제일고수이자 사파 무림의 절대자.
비사인은 백자강의 제자였다. 백자강은 따로 혈육을 두지 않았다. 혈육이 있으면 마음이 약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자신에게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다는 의미기도 했다.
비사인은 긴장한 채 계단 아래까지 걸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맹주 앞에 서면 마음이 위축되고 긴장된다.
“비가 올 것 같구나.”
백자강의 목소리가 맹주전에 울려 퍼졌다. 그는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올겨울 들어 첫 비겠군요.”
평소라면 잘 다녀왔다고 경직된 인사를 했을 비사인이었다. 한데 오늘은 맹주의 말을 받아서 대답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검무극의 영향이었다. 사람을 제대로 보라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맹주를 지금과는 다르게 보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다른 반응은 또 다른 반응을 불러왔다.
“올라오너라.”
비사인은 계단을 올라가서 사도맹주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본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자신을 불러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와 나란히 선 후에야 비로소 정중히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맹주님.”
백자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단춧구멍처럼 작았다. 정말 점이 찍힌 것처럼 작은 눈. 비사인은 한 번씩 생각한다. 저 눈이 언젠가 휘둥그레 커질지도 모른다고. 눈을 숨겨뒀을 거라고. 눈은 그만큼 작았다.
그래서 눈을 보고 그의 감정을 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역으로 맹주는 저 작은 눈으로 상대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사람이다.
“흑사단을 정리했다고?”
하지만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 좋았다. 비사인은 들을 때마다 항상 이런 목소리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네, 흑사단주와 수뇌부 일부를 제거했습니다.”
“이유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솔직히 대답한다면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흑사단이 아이를 납치하고 악행을 저질러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정답이 아니다. 비사인은 사도맹주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게 정답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비사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답을 말했다.
“놈이 건방지게 굴었습니다.”
그나마 보이던 작은 눈이 사라지며 백자강은 큰소리로 웃었다. 눈은 작지만 입은 또 유난히 컸다. 그래서 그가 껄껄 웃으면 정말 크게 웃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설령 맹주가 자신이 왜 그들을 처리했는지 알고 있다 하더라도 답은 이렇게 해야 한다. 사부는 이런 사람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외부 평판을 살피면서 흑사단을 단계적으로 흡수할 작정입니다.”
백자강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사도맹이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사람이다. 그리고 그 이유의 근원에는 마교가 있었다.
“검우진 그자는 반드시 무림일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킬 거다. 우린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
그는 당대 천마가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전쟁을 일으키면 우릴 먼저 칠 거다.”
“왜 무림맹이 아니라 우리입니까?”
“그 싸움에 무림맹은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백자강이 예상하는 무림맹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들은 우리와 마교가 서로 싸우다 몰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절대 끼어들지 않을 거다. 설령 도울 마음이 있다 해도 우리와 손을 잡겠느냐?”
사파를 돕는다는 결정에 수많은 정파 원로가 반대하고 나올 것이고, 무림맹주가 원하더라도 밀어붙이기 쉽지 않은 사안이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릴 줄 알면서도, 절대 우릴 돕지 않을 거다. 나중에 그 이까지 다 뽑혀 나가도, 잇몸을 오물거리며 협의 타령을 할 자들이다.”
미운 것은 미운 것이고. 백자강의 판단은 냉철했다.
“만에 하나 마교와 무림맹 사이에 전쟁이 나면 반드시 무림맹을 도와야 한다. 마교는 반드시 무림을 독식하려 들 테니까. 네가 맹주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백자강은 천마신교를, 그리고 검우진을 위험하게 여기고 있었다.
맹주의 강함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지 않는 데 있다고 비사인은 생각했다. 맹주는 사도맹의 힘을 결코 과대 포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교와 무림맹보다 한 수 아래에 있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일을 진행했다. 비사인은 당대 사도맹의 강함은 맹주의 이 철저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한다고 믿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가 맹주가 되었을 때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세대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지금 이 시대죠.
현실 인식과는 별개로 백자강 역시 무림일통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한 번도 그런 말을 꺼낸 적은 없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작은 눈으로 사도맹이 아니라 무림 전체를 내려다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 결정적 한 방을 위해 참고 또 참고 있다는 것을.
“한가지 여쭐 게 있습니다.”
이번 일을 처리하는데 비사인이 선택한 방법은 정면돌파였다.
“본맹에 제가 모르는 비밀조직이 키워지고 있습니까?”
“그건 왜 묻느냐?”
“흑사단이 유검문을 통해 본맹에 납치한 아이들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본맹에서 허가한 조직이 아니라면, 누군가 사조직을 키우고 있는 거라 생각됩니다.”
큰일이라면 큰일인데 백자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비사인을 응시할 뿐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비사인은 맹주의 그 작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사기를 피하지 않았다. 무서워할 필요 없다. 그는 맹주고 나는 그의 후계자다. 예전이라면 감히 쳐다보지 못했을 그의 눈빛을 최대한 담담히 받아들였다.
“요즘 달라졌구나.”
비사인은 자신의 변화를 숨기지 않았다. 세상에 딱 두 사람에게만큼은 마음을 숨길 자신이 없다. 검무극과 눈앞의 맹주에게는.
“이번에 출맹해서 마교 소교주와 멸마대주를 만났습니다. 그들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지지 않으려면 저도 노력해야지요.”
당당하게 말하는 자신의 태도가 흡족했을까? 맹주의 큰 입에 큰 미소가 지어졌다.
백자강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그는 몰려드는 먹구름을 바라보며 비로소 첫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그런 조직 허락한 적 없다.”
* * *
쏴아아아아아!
검무극과 표기광은 수풀에 숨어 쏟아지는 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살수들을 피해 정신없이 달리다 잠깐 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자네 실력이 뛰어나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지켜드린다고요.”
자신감 하난 끝내준다 여겼는데, 그냥 자신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는 소맹주님을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살수들에게 쉽게 당하지 않습니다.”
살수란 말에 새삼 아까 검무극이 한 말이 표기광의 마음에 떠올랐다.
―세상에 어떤 맹이 일을 시킨 수하에게 청부 살수를 보냅니까? 대체 이 지저분한 상황에서 충성심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표기광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기에 검무극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자가 비밀을 안 지키면 죽이겠다고 경고했습니까?”
표기광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가장 섭섭한 지점이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자가 왜 단주님을 골랐는지 짐작이 됩니다.”
“왜지?”
“보통 사람이라면 펄쩍 뛰고 분노할 일인데, 이 살인멸구를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계시잖습니까? 그자는 알았던 거죠.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를요.”
만약 그래서 자신을 고른 것이라면?
표기광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때 검무극이 쉿하고 시늉하더니 표기광의 뒤쪽 우거진 풀 사이로 검을 찔러 넣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시체가 앞으로 쓰러졌다.
“살수 조직 하나가 통째로 왔습니다. 단주님이 소맹주님과 접선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겁니다. 소맹주께서 몇 사람을 호위로 붙였든 반드시 단주님을 없애겠다는 의지인 거죠.”
다시 말해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는 의미. 직접 나서지 않은 이유는 자신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일 테고. 이 살수 조직을 아무리 족쳐도 그의 흔적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조직 하나가 다 동원되었음에도 자네 혼자 지키고 있는 나를 죽이지 못하고 있군.”
“그런 셈이죠. 가시죠, 이동하셔야 합니다.”
두 사람이 다시 산길을 달렸다.
또 다른 살수들이 두 사람을 덮쳐왔다. 표기광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들은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은 살수들을 의도적으로 찾아내서 그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훈련을 받은 그들은 두려움을 몰랐다.
하지만 그 어떤 용기도 하늘과 땅보다도 먼 실력 차이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 어떤 기습도 통하지 않았다.
살수들을 상대하는 검무극의 수법이 너무 평범해서 표기광의 눈에는 오히려 살수들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렇게 가볍게 휘두른 것 같은데 왜 못 피하는 걸까? 살수가 저런 단순한 발차기를 허용해서 턱이 돌아간다고?
하지만 자신을 공격해올 때의 그 무시무시한 기세는 언제나 이런 외침을 불러왔다.
‘이번에는 진짜 죽는다!’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외쳤을지 모를 그 말이 또 터져 나왔다.
푸욱!
튀어나온 검이 표기광의 눈앞에 있었다. 검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검은 살수의 검이 아니었다. 그의 뒤통수를 뚫고 나온 검무극의 검이었다.
급하게 검을 던져서 그를 죽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 어떤 수법보다 뛰어난 비검술이 발휘된 한 수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이제 살수들은 다 처치한 것 같습니다.”
표기광은 깜짝 놀랐다. 뛰라면 뛰고, 숙이라면 숙이고, 당기면 끌려가고, 밀면 자빠지고. 이러다 보니 싸움이 끝나 있었다.
끝났다고? 그럼 나 살아남은 거야?
실감이 가지 않은 얼굴로 표기광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쏴아아아아아!
검무극은 내리는 비에 얼굴과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 있었다.
문득 그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신나게 맞장구치며 자신의 말을 들어주던 막내 무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덤덤하게 피를 씻어내는 모습이 도산검림을 헤치며 산전수전 다 겪은 진짜 무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어딘지 모르게 그가 외롭게 보였다.
“가시죠.”
“어디로?”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하지만 검무극은 정확히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그놈에게요. 가서 따져야죠. 왜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냐고요. 마무리하고 싶으면 직접 와서 마무리 지어야지, 왜 살수 따위를 보내냐고요. 나를 왜 이렇게 우습게 보느냐고 따져야지요.”
표기광이 하고 싶은 말을 검무극은 대신 말하고 있었다.
“저는 이번 일이 맹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순간 흠칫했지만 표기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네.”
이제 때가 되었기에 검무극은 아껴두었던 결정적인 말을 건넸다.
“사도맹주가 허가한 일이었다면 절대 청부 살수를 보냈을 리 없습니다. 예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도맹주가 제일 싫어하는 자들이 청부 살수들이라고요.”
“!”
순간 표기광은 과거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흑룡단주 시절 수하들과 이와 관련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맹주께서 살수들을 정말 싫어해서, 당대 사도맹에서는 살수 출신이 출세하는 경우가 없다고. 심지어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표기광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잊고 있던 일이다. 다치고 단에서 물러나고, 폐인처럼 살고. 그러는 중에 다 잊고 살았던 일이었다.
‘그 사람이 맹주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라면, 살수를 동원하지 않았을 텐데?’
강력한 의문에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의 지난 대화가 떠올랐다.
―이번 일 맹주님도 알고 계시는 작전이오?
―당연하지요. 그렇기에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이유기도 하오.
그때는 당연히 맹주도 안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니 이 사람이 나선 것이겠지 하고. 그랬기에 소맹주도 개입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소맹주에게도 알리지 않은 비밀작전이었으니까.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
마음에 떠오른 물음의 답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벗어나서 자신을 무시했던 것들에게 ‘나 이렇게 대단한 일 하고 있다, 이 머저리들아!’ 이런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맹주님 모르게 진행된 일이라면 이 일은 반역입니다.”
표기광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놈은 자신을 반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의미였으니까. 표기광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진실인지 저와 함께 확인해 보시죠.”
어제만 해도 진실은 자신만이 아는 것이라 여겼던 표기광이었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을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겠나?”
“어차피 죽음도 각오하셨잖습니까?”
그래, 맞다. 오늘 몇 번이나 이제 죽는구나, 하고 눈을 감았는지 모른다. 한 번 더 감아보는 거다.
표기광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부터 우린 물고기가 아닙니다. 어부가 돼서 저와 함께 어망을 던져 보시죠. 그래서 지금껏 어부처럼 행세했던 그 물고기가 뭐라 하는지 한 번 들어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