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66)
절대회귀-366화(366/424)
절대회귀 366화
제366회 왠지 외로워 보여서요.
검무극이 안가로 돌아왔을 때 비사인은 마당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오셨소?”
비사인은 편안한 얼굴로 검무극을 맞았다.
그러자 비사인을 유심히 살피던 검무극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너, 누구냐?”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이러는가 싶어 비사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 누구냐니까. 내 친구 소맹주는 이런 편안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아니다. 내 친구는 기분 좋을 때 표정이 원수에게 비무첩 내밀 때의 표정인 사람이다. 당장 내 친구 몸에서 나와!”
비사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루라도 장난 안 치고 넘어갈 수는 없소?”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많이 쳐둬야지, 당신 사부나 우리 아버지 보시오. 얼마나 무뚝뚝하고 재미없소? 우리도 나이 먹으면 그렇게 될 거요.”
“당신은 그 나이 되어서도 장난칠 거잖소?”
그건 부정하지 못하겠는지 검무극이 씩 웃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소?”
“이야기 잘됐소. 놈들이 맹주님을 암습할 거라는 것 빼곤 별일 없소.”
“뭐요!”
검무극이 또 이런 일로는 장난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기에 비사인이 재빨리 물었다.
“어떻게 된 거요?”
검무극은 갔던 일을 비사인에게 전부 전했다.
“그렇게 놈을 궁지에 몰았소. 이제 놈들이 선택할 방법은 맹주님을 죽여서 사도맹을 차지하는 것뿐이오. 미안하게 됐소. 놈들을 끌어낼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소.”
맹주를 위기에 빠뜨렸다며 화를 낼 법도 했는데, 비사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화를 안 내시오?”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소?”
검무극은 확실히 비사인과의 관계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저 멀리 있던 그는 이제 자신의 앞에 서 있다.
“맹주전에 계실 때는 감히 공격하지 못할 거요.”
맹주전 자체가 하나의 요새기도 했고, 보이지 않는 수많은 고수가 맹주전 주위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혁사군을 따라 한두 명이 들어올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다수의 적이 침입할 수 없었다.
“출맹하셨을 때를 노리겠지. 부군사는 맹주님의 일정을 가장 먼저 아는 사람이니까.”
검무극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의님과 독왕님이 열흘 후에 온다고 한 것은 당신이 이 싸움에 참전하기 바라는 마음에서요.”
비사인의 얼굴에 떨림이 있었다. 흉측하고 무서운 얼굴이기에 그 떨림은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나를 위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럴 필요 없소.”
비사인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난 염두에 두지 말고 계획을 세우시오.”
“그래도 괜찮겠소?”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해지지 마라.
사부가 전한 그 말을 듣고 난 후, 비사인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붕대를 갈아야 할 때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펄펄 끓을 때가 아니라 차갑게 식어야 할 때임을.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비사인이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당신, 많이 변했소.”
“누구 덕분에 그렇게 됐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얽혔다.
“그럼 쉬시오.”
검무극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뒤에서 비사인이 말했다.
“고맙소.”
단 한마디 말이었지만 비사인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러면 말로 때우지 말고, 내 부탁 하나 들어주시오.”
백자강에게 했던 부탁을 비사인에게도 하고 있었다.
“말해 보시오.”
“이번 일이 다 끝나면 말하겠소.”
그러자 비사인에게서 나온 놀라운 약속.
“그게 뭐든 꼭 들어주겠소.”
들어보지 않고 뭐든 다 들어준다는 말은, 그것도 반드시 약속을 지키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그 어떤 고마움을 전하는 말보다 크고 가치 있었다.
고마움이 가득 차 있던 정산바구니가 비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당신 자리를 원하면 어쩌려고 뭐든 들어준다고 하시오?”
비사인이 돌아서 건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럼 난 소교주 자리에 도전하겠소.”
그에게 검무극이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 보고 나면 그 말이 쏙 들어갈 거요.”
* * *
다음 날에도 검무극은 맹주전으로 갔다.
복도를 걸어가던 검무극이 오늘도 세워진 강철 늑대 앞에 멈춰 섰다.
“그 늑대가 마음에 드십니까?”
생각지 못한 질문에 검무극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안내하던 호위대주 인궁을 쳐다보았다.
오늘도 오면서 인궁에게 온갖 질문을 다 던졌다. 호위하느라 잠은 언제 주무시냐, 은신술은 얼마나 배워야 그런 경지에 오르냐, 맹주전 아래 독침 구멍은 누가 조종하는 거냐. 물론 인궁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궁이 먼저 말을 건 것이다.
“아십니까? 만난 이후 제게 말 처음으로 거셨습니다.”
“그 늑대를 눈여겨보시는 것 같아서요.”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늑대를 향했다. 저 때문이 아니라 늑대 때문에 말을 거셨군요, 라는 너스레가 나올법했는데, 검무극은 깊어진 눈빛으로 차분히 말했다.
“왠지 외로워 보여서요.”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홀로 새하얀 방에 앉아 있는 극악소마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바람 부는 들판을 걸어오던 사도맹주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묵묵히 자신을 안내하는 이 호위대주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회귀 전 삶에서의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인궁의 시선도 늑대를 향했다. 생각지 못한 답이었다. 이곳을 수도 없이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확실히 마교의 소교주는 지금까지 봐왔던 무인들과는 달랐다. 하긴 그래서 그가 이 복도에 서 있는 것이겠지만.
검무극이 다시 뜻밖의 말을 했다.
“언젠가 이 늑대가 살아날 것 같습니다.”
그 말 역시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잡아당기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인궁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수하 중에서 그 전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도 안 믿는 걸 당신이 믿는군요.’
검무극이 늑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이놈아, 졸지 말고 잘 지켜라!”
다시 인궁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맹주전 문이 열리기 전에 검무극이 인궁에게 말했다.
“놈은 강합니다.”
사도맹주를 만나는 순간에는 언제나 인궁이 함께 있었다.
은신한 채 모든 대화를 들었기에 검무극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인궁은 정중히 대답했다.
호위대주만큼은 꼭 알아야 할 일이었기에 투왕의 실력을 상기시킨 것이다.
문이 열리고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갔다.
사도맹주 백자강은 태사의에 앉아 눈은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도맹주쯤 되는 고수들의 사색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검무극은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고 걸어갔다.
검무극이 태사의 아래까지 다가갔을 때 비로소 백자강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드나들다가 나를 죽이는 것이 자네의 계획이었나?”
기척 없이 다가온 것에 대한 백자강의 농담이었다.
“사도맹주님을 죽이려면 이 정도 공은 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근데 신법 수련을 더 해야겠습니다. 한 열 걸음은 더 은밀히 다가갈 수 있어야 제 친구를 그 자리에 앉힐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자강이 눈을 번쩍 떴다. 역시 너스레는 상대가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렇게 막 해야 재미있는 법이다.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알다시피 본맹에 군사들이 문제가 있어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라고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마는.”
말과는 달리 검무극은 한 가지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맹에 계실 때는 놈들이 움직이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출맹하실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놈들이 의심하지 않겠지요.”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검무극의 말이 이어졌다.
“마의와 독왕을 맞으러 나가는 겁니다. 지금 병환을 얻은 총군사는 외부에 숨겨둔 상태지 않습니까?”
지난번 만남에서 혁사군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를 죽일 수도 있다고 조처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총군사를 맹주가 은밀한 곳에 데려다 두었다.
“독왕과 마의를 사도맹에 들이기 싫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두 사람을 마중하러 가는 겁니다. 그들을 데리고 곧장 총군사에게 가겠다고 혁사군에게 말하십시오. 놈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죠. 제가 혼자 맹주님을 죽였다는 것은 믿지 않겠지만, 독왕이 독살했다고 하면 믿을 테니까요.”
백자강은 감탄했다. 아마 처음부터 혁사군을 궁지에 몰려고 독왕과 마의가 온다고 거짓말했을 때부터 검무극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지.”
백자강은 검무극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사인이는 이번 일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소맹주는 자신은 싸우지 않아도 되니, 개의치 말고 계획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백자강은 자신이 전한 말이 제대로 제자에게 전해졌음을 느꼈다.
“그래도 전 소맹주를 데리고 나올 겁니다.”
“왜?”
“소맹주의 싸움이기도 하니까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오늘이 아쉬울 겁니다. 그런 아쉬움을 친구에게 남겨주고 싶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지킬 테니까요.”
백자강의 귓가에 소름은 돋지 않았다.
이 감각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차라리 검무극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이 통했던 거의 모든 관계에서 남은 것은 실망감이었다. 사람을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이 감각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자네가 그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이 젊은 마교의 소교주가 지금까지 보여준 의외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친구 걱정 말고 자네 걱정이나 하게. 지금 발밑에 독침 구멍이 몇 개나 있는 줄 아는가?”
어이쿠 하며 검무극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냥 땅바닥은 안 봐야겠습니다! 다행히 제가 하늘 보는 걸 좋아해서요.”
* * *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맹주가 출맹하기로 한 전날이 되었다.
“어휴, 내일이면 또 징글징글한 싸움이 시작되겠군.”
차 교관의 불평에 함께 수련 도구를 옮기던 황석경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 사맹관에 새로운 기수가 들어오는 날, 짧은 휴가가 끝나면 언제나 연중행사처럼 나오는 차 교관의 불만이었다.
“본맹을 지킬 초석들이라 생각하게.”
“인기 많은 자네에게나 귀한 초석이지. 난 징글징글하네. 또 어떤 녀석이 날 열받게 할지.”
가져온 짐을 내려놓으며 황석경이 차 교관에게 말했다.
“참, 내일은 못 나올 거네.”
“자네가? 무슨 일로? 어디 아픈가?”
차 교관은 깜짝 놀랐다. 사맹관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 황석경이었다. 평소에도 빠지는 날 하루 없는 그였는데 새로운 기수를 받는 첫날에 못 나온다고 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어디 다녀올 곳이 있네.”
“어딜?”
황석경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창고 문은 내가 잠그고 돌아갈 테니, 자넨 먼저 가보게.”
“그래 주겠나?”
저만치 가던 차 교관이 돌아서서 물었다.
“혹시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하게.”
그를 보며 황석경은 환하게 웃었다.
“괜찮네.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라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렇게 차 교관과 헤어진 후 황석경은 수련 도구를 꺼내왔던 창고로 돌아갔다.
창고에 들어간 그가 구석에 쌓여 있는 먼지 가득한 짐을 들어냈다. 그것들은 쓰지 않는 도구들이었다.
그가 벽에 숨겨진 정교한 장치를 조작하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황석경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야명주 조각들이 벽에 박혀 희미하게 시야를 밝히는 그곳은 작은 밀실이었다.
정면 벽에 보의가 걸려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무인 열에 아홉은 비명을 내지를 신물.
불멸(不滅).
불멸신갑은 그가 가장 아끼는 보의이자 중요한 싸움에만 입는 호신갑이었다.
옷을 완전히 벗은 후 불멸을 입었다. 여러 특별한 천과 천잠사를 섞어 만들어진 그것은 몸에 착 감기듯 밀착했다. 얇으면서도 강력한 그것은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무림의 절대신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석경은 팔목과 정강이를 보호하는 보호대를 찼다.
쌍혼(雙魂).
쌍혼이라 이름 붙은 이 보호구들은 불멸신갑에는 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강호의 기물들이었다.
다음으로 비수를 꽂는 가죽띠를 둘렀다. 옆에 놓여 있던 상자를 열자 비수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앞서 신물들이 그렇듯 이 가죽띠와 비수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황석경은 천천히 정성껏 그것을 가죽띠에 꽂아 넣었다.
싸움을 준비하는 그의 움직임은 차분했으며 진지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착용한 것은 한 벌의 장갑이었다.
투신(鬪神).
역시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져 착용한 듯하지 않은 것 같은 이것은 검기는 물론이고 검강에도 손을 보호했으며 주먹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주는 기보였다.
처음이었다. 이 모든 것을 다 착용하고 싸움에 나가는 것은.
다시 겉옷을 걸친 황석경이 밀실에서 나와 위로 올라왔다.
원래 있던 짐을 밀실 입구 위에 다시 쌓아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검도 함께 세워두었다. 이제 이곳에 들어오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 되리라.
그가 마지막으로 검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그는 사맹관의 교관 황석경에서 결전 전야의 투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