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9)
절대회귀-39화(39/424)
제39회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일화검존을 만나고 돌아오는데, 항상 기다리던 길목에서 혈천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우가 뭐라고 하던가?”
그는 일화검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어르신과 연을 끊으라고 하더군요.”
“역시! 내가 뭐라고 했나? 그럴 거라고 했지? 이유도 말하든가?”
“혈천도마님과 저는 이상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어르신께서 너무 자유분방하셔서…….”
“지랄하네.”
그의 몸에서 차가운 마기가 휘몰아쳐 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 텐가?”
“저야 당연히 더 좋은 조건을 제안하는 쪽과 손잡아야죠.”
“뭐?”
난 혈천도마를 의도적으로 자극했다.
“저울질할 수 있을 때, 해야죠. 어르신이라면 안 하실까요?”
혈천도마는 화를 내지 못했다.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아직은 어르신이 우세한 상황입니다. 설마 천외신단보다 더 좋은 것을 제시하겠습니까?”
“할 수도 있지. 나를 망치는 일이라면 뭐라도 할 사람이다.”
“대체 일화검존 선배와는 왜 사이가 나빠진 겁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말했다.
“사람 미운 데 이유 있나?”
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세상 누구도 믿지 못할 이유를 가진 두 사람이다. 악인들이라면 악인들이고, 권력욕 역시 둘째라면 서러운 그들인데.
“한잔하시겠습니까? 이대로 돌아가시면 괜히 마음만 복잡하고 씁쓸해하실 것 아닙니까?”
“나를 어떻게 보고?”
“냉철함? 그거 미덕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속상할 때는 속상해하고, 기분 나쁠 때는 떠들면서 풀고. 자, 가시죠. 오늘은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혈천도마가 홱 몸을 날리며 말했다.
“마가촌에서 기다리지.”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는 그였다.
늙은이 성질머리하고는.
하지만 처음 내게 와서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던 때와는 분명 달라졌다.
혈천도마는 조춘배가 운영하는 풍류주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루에 가 계실 줄 알았습니다.”
“여자들 나오는 곳 싫어하네.”
“뜻밖인데요?”
“뜻밖? 왜? 내가 여자를 밝히는 것처럼 보이나?”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죽은 동생분이 기루를 좋아하셔서.”
“술맛 떨어지게. 그놈 이야기는 집어치워라.”
“네.”
사실 일부러 꺼냈다. 마음의 상처가 그의 속에서 곪지 않게 하려고. 혈천도마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풍류주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물었다.
“왜 하필 이 주점을 선택하셨습니까?”
“건너편에 황천각 지부를 열었더군.”
지나가다 그걸 보고 여기 멈춰선 모양이다.
“조심하십시오. 괜히 길 가다 사람 때리면 어르신도 제게 붙잡혀 옵니다.”
내 농담에 혈천도마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춘배가 반갑게 우릴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각주님.”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다시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술과 안주 맛이 좋아서 오는 겁니다.”
주문을 받은 조춘배가 주방 쪽으로 사라지자 혈천도마가 입을 열었다.
“자넨 쓸데없이 친절해.”
“친절해서 나쁠 것 있습니까?”
“인정에 끌리면 반드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생기지. 방금 저 주인장을 예로 들어보자고. 자네가 이렇게 친절할 때 요리가 잘 나올까. 아님, 맛없으면 죽인다고 할 때 더 잘 나올까? 그런 점에서 대공자가 자네보단 유리하지.”
“확실히 비정한 쪽이 세상 살기는 편하죠.”
“아직 늦지 않았어.”
“그렇다고 해도 그 비정 마차에는 올라타지 않을 겁니다.”
“이유는?”
“지금 나오는 저 요리가 두려움에 떨며 만들어진 것보단 휘파람을 불며 즐겁게 만든 것이 더 맛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죠.”
“언젠가 저자는 자네의 친절을 이용해서 더 큰 것을 부탁하고 요구할 거야. 들어주지 않는다면 비난하고 욕하겠지. 그게 인간이거든.”
“언젠가 저 사람은 제가 베푼 이 작은 친절 때문에 더 큰 것을 돌려줄 겁니다. 어쩌면 그 덕분에 제 목숨을 구할 수도 있겠지요. 그게 또 인간이거든요.”
“어디 두고 보자고.”
우린 함께 술을 마셨다.
“사실 전 어르신이 저보다 더 감정적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눈깔로 내 도는 어찌 막았누? 사람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
나는 잘 봤다고 생각한다. 나와 얽혀드는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많은 감정 소모를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인생에서는 없었던 대화를 나누며 쏟고 있고.
“말이 나온 김에 한 말씀만 드리자면, 이제부터는 도귀들과 제자분들 관리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계속 황천각과 충돌하게 될 테니까요.”
혈천도마가 스윽 고개를 들어 차갑게 나를 쳐다보았다.
“점점 기고만장해지는구나.”
“기고만장한 것은 어르신이죠.”
“뭐?”
“본교나 아버지를 우습게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니까, 내가 혈천도마인데. 내 제자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야? 아닙니까?”
꽝!
탁자가 부서졌고 술병과 안주가 담겨 있던 그릇이 떨어져서 깨어졌다.
“너는 너무 건방지다. 가끔은 정말 죽이도록 패버리고 싶어.”
날 노려보던 혈천도마가 애꿎은 조춘배에게 소리쳤다.
“뭘 그렇게 보고 서 있는 게냐? 여기 탁자 가져오고 새 술과 안주 내와라!”
“이럴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탁자에 돈을 올렸다.
“미안하오. 이 돈이면 부서진 것들 하고, 오늘 손해 본 매상으로 충분할 거요.”
조춘배가 돈을 받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소. 가져가시고, 여기 다시 술상 봐주시오. 상다리 부러지게.”
“네!”
돈을 받아든 조춘배가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갔다.
혈천도마가 한껏 인상을 썼다.
“나보고 그따위 짓을 하라고?”
“하기 싫으면 때려 부수면 안 되죠.”
“마존을 데리고 지금 선행을 가르치려는 거냐?”
“제가 세우려는 마도는 기분 나쁘다고 객잔을 때려 부수지 않습니다.”
“너는 대체!”
“소리 그만 지르시고 이리와 앉으세요.”
결국 혈천도마가 내가 옮겨 앉은 탁자에 앉았다.
“건방진 놈. 넌 정말 미친놈이 확실하다!”
나를 노려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날 배신하면 죽여버릴 거다.”
새로 술을 가져오던 조춘배가 흠칫 놀랐다가 이내 못 들은 척 술과 잔을 놓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새 잔에 술을 가득 따라서 혈천도마에게 주었다.
“조금 전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그래, 진심이다.”
“그럼 진심으로 제게 충성하십시오. 아까 그 협박, 그럴 때 할 수 있는 협박입니다. 진심으로 충성했는데 배신하고 버릴 때, 그때 주인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을 수 있는 겁니다.”
혈천도마는 반박하진 못했다.
나는 내 잔에 술을 가득 따른 후 건배하자고 내밀었다.
혈천도마는 코웃음을 치며 혼자 술을 마셨다. 비록 잔을 부딪치진 않았지만, 내 마음에서는 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 * *
일화검존의 모옥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그녀의 오른팔인 사우종이었다.
“이공자는 지금 혈천도마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등을 돌린 채 서 있던 일화검존은 아무 말도 없었다.
“건방진 놈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일화검존이 몸을 돌려 싸늘히 사우종을 노려보았다. 사우종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말조심해. 사람 뒤에서 말 함부로 하는 것만큼 천박한 짓 없어.”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사우종은 검존이 화를 낼 줄 알면서도 일부러 검무극을 욕했다. 그녀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을 자신이 대신해준다고 믿었으니까.
사우종은 자신이 검존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믿었다. 문지기에게도 존대하는 그녀지만, 오직 자신에게만은 편하게 하대했으니까. 자신은 특별했다.
“내가 알던 이공자가 아니야.”
비무 대회 이후 불과 몇 달도 안 된 사이 검무극이 일으킨 폭풍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래봤자 찻잔 속의 태풍입니다.”
사우종은 검무극을 과소평가했지만 일화검존의 생각은 달랐다.
“그 찻잔이 무림을 다 담을 크기라면? 그 욕심 많은 늙은이가 천외신단을 바쳤어. 자신의 전부를 바친 것이나 마찬가지야. 도마는 이공자에게서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본 것이 틀림없다.”
“검존께서도 이공자에게서 가능성을 보셨습니까?”
검무극은 확실히 예상 밖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외신단과 같은 영약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짜증이 난다. 자신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혈천도마가 본 것이 아닐까 하고. 그 빌어먹을 늙은이가 본 것을 자신이 보지 못한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고 짜증이 났다.
“오늘은 이만 쉬시지요. 새 사람으로 준비해뒀습니다.”
일화검존이 차갑게 사우종을 쳐다보더니 뭐라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달싹거리려던 입술은 끝내 말을 뱉지 않았다.
홱 돌아선 그녀가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사우종의 표정은 더없이 복잡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뜨거웠다.
모옥 안에 들어선 그녀가 비밀장치를 조작하자, 바닥이 열리며 비밀통로가 나왔다.
그녀가 통로로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그녀는 한두 번 내려간 것이 아닌지 익숙하게 내려갔다.
지하에는 긴 복도가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복도 마지막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은 화려하게 꾸며진 침실이었다.
커다란 침상에 한 청년이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일화검존은 천천히 걸어가서 커다란 동경이 붙어 있는 화장대에 앉았다. 거울 속에 비친 청년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일화검존이 거울 속 청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옷부터 벗으세요.”
* * *
혈천도마와의 술자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이안의 수련장에 들렀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기운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육중한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장을 누볐다. 한계를 넘나드는 힘든 훈련이었지만, 한 동작 한 동작 헛된 것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제 새로운 무공을 전수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아! 오셨어요? 도련님?”
“요즘 수련 열심히 하나 보네.”
“어떻게 아셨죠?”
“살이 좀 빠진 것 같아서.”
“정말요?”
아닌 줄 알면서도 이안이 활짝 웃었다. 살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그녀가 아껴뒀던 질문을 했다.
“도련님. 전에 말씀하신 것 진짜인가요? 제 부작용 고칠 수 있다는 것요.”
이안 성격에 이 질문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혹시라도 내가 ‘농담이었는데?’라고 대답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그녀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이다.
전신석화공을 전수해 준 사람이 절대 부작용은 없앨 수 없다고 말해줬더라도, 그래도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으리라.
“정말 고칠 수 있어요?”
그녀가 이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고칠 수 있어.”
“정말요?”
이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줄 때가 되었다.
“난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을 없앨 수 있는 시술법을 알고 있다.”
대법 재료를 찾는 과정에서 전 중원을 헤매 찾아낸 방법이었다. 회귀하면 반드시 원래 그녀의 몸으로 되돌리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생각해 보니 지난 내 인생이 오직 복수만을 위한 황량한 길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떤 시술이죠?”
“신독정화술(身毒淨化術)이라는 대법이다.”
“……신독정화술?”
그녀는 몇 번이나 그 말을 되뇌더니 다시 물었다.
“이걸 어떻게 배우셨어요?”
“그건 비밀이야. 알지? 무공과 관련해서는 지켜야 할 비밀이 많은 것.”
“네. 알죠. 알아요.”
대화하는 내내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지금 시술할 수도 있겠네요.”
“있어.”
“한데 왜 안 해주시는 거죠?”
“너무 위험하고 어려운 시술이야. 또 시술 중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고. 그래서 내 무공실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올라갔을 때 시술할 거다.”
“아! 정말 치료법이 있었군요!”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넌 목숨을 걸어야 해. 시술 중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서. 그래도 할 수 있겠어?”
“네!”
그녀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거 실망인데.”
“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난 네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어. 혹시라도 제가 죽으면 도련님을 지켜드릴 수 없으니 시술은 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그럴 가능성을 미리 막은 내 농담이었는데.
“제 삶을 살라면서요? 아니었나요?”
그러면서 그녀가 장난이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나는 이제 안다. 조금 전의 저 모습이 원래 그녀의 모습임을.
충성심이나 책임감에 짓눌려서 잠들어 있던 그녀의 본래 마음을, 사람이라면 가지는 저 당연한 마음을, 나는 저 마음을 찾아주고 싶은 거다.
“이안아.”
“네, 도련님.”
“중원에 가보고 싶은 곳 있느냐?”
“아뇨, 없습니다.”
평생 나만 쳐다보고 있었으니, 어딜 가더라도 제대로 구경한 곳이 없었으리라.
“나중에 나랑 중원 유람가자.”
“정말요?”
“그래. 명소란 명소는 다 가고, 절경이란 절경은 다 구경하자. 유명한 요리, 내가 다 맛보게 해주마. 내가 아는 곳이 좀 많다.”
“약속하신 거예요?”
“너도 약속해.”
“뭘요?”
“그때 나 버리면 안 돼.”
“제가 도련님을 버리다니요? 천지가 개벽해도 그런 일은 없어요.”
천하제일미가 되어 세상 모든 남자가 너를 추앙해도 그런 말을 하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