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98)
절대회귀-398화(398/424)
제398회 세상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검무극이 잘린 석등의 단면을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단면이 매끄럽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검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비천검술이 구성을 넘어서려 하고 있구나.’
대성을 이루기 직전 찾아오는 마지막 혼란기 같은 것이었다. 무공을 너무 빠르게 대성에 도달한 이들에게서 주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 상태에서 대성에 이르지 못하면 대부분 원래 실력보다 더 퇴보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무공은 다양한 방법으로 무인을 시험한다.
검무극은 이안을 믿었다. 이 결과를 위해 그녀가 얼마나 피땀 흘려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안의 노력은 결코 그녀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다음으로는 바닥의 핏자국을 살펴보았다.
‘이안이 화가 났군.’
자신을 공격한 자들을 가차 없이 베었다. 이안 성격상 불필요한 살생을 할 리는 없으니, 분명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으리라.
주위를 둘러보던 검무극이 남겨진 흔적과 핏자국을 보면서 그날의 싸움을 마음속에 떠올렸다. 무공 경지가 워낙 높은 데다가 이안의 검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방에서 달려들며 그녀를 죽이려 하고, 이안이 검을 뽑아 그들을 베어 넘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적들이 쓰러지면서 흩뿌리는 상상 속의 피가 현실에 남겨진 핏자국으로 정확히 떨어지며 합쳐졌다.
검무극이 이안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며 움직였다.
“여기서 둘을 베고, 이쪽에서 달려드는 놈을 찌르고. 다시 돌아서서 공격을 막은 후에 심장을 찌르고.”
이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암기를 날리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검기를 발출하자 암기를 날리려던 이들이 쓰러졌고 그 뒤에 있던 나무와 석등까지 잘려 나갔다. 검무극의 상상 속 석등과 지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석등이 하나로 합쳐졌다.
취마는 검무극의 설명에 감탄했다.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자신도 짐작이 갔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상황을 떠올리다니?
검무극이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도 싸운 흔적들이 있었다. 복도 바닥 여기저기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도착한 대청에서 검무극이 말했다.
“여기서 마지막 싸움이 있었군. 막아서는 놈 둘을 베고. 저기 기둥 뒤에서 날아온 암기를 쳐내서 이쪽에 서 있던 자를 제거했고.”
검무극이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가더니.
“여기서 수장과 맞붙었군.”
검무극이 가만히 의자 주위를 살피더니.
“죽이지 않았어.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놈에게 뭔가를 알아내려 했다는 의미야. 다시 말해 여기 있던 놈이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는 뜻이지. 아마 북해 쪽 큰 문파 중에서 문제가 생긴 곳이 있을 거야. 거길 찾아야지.”
문제가 더 커졌음을 암시하면서도 검무극은 크게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걱정 안 돼?”
“누구? 이안? 아니면 상대?”
그렇게 너스레를 떤 후에 검무극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애매한 일에 끼어들었으면 걱정했을 거야. 만약 이곳에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면 오히려 걱정되겠지. 한데 지금은 명확한 목표가 느껴져. 이안은 계획하에 움직이고 있어.”
취마는 감탄을 넘어 내가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검무극은 남다르다.
어디 오늘뿐이겠는가? 이곳까지의 여정 속에서도 이런 남다름을 여러 번 경험했기에, 검무극과 함께 있는 시간은 너무 흥미롭고 즐겁다. 그래서일까? 묘한 안정감마저 든다.
예전에 취몽루에서 함께 술을 마실 때도 이런 안정감을 느끼곤 했는데, 이번에 출교해 보니 그 안정감이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소교주의 안전을 책임지는 바짝 긴장한 마존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친한 동생과 편히 여행하는 기분. 그래, 검무극은 이 위험천만한 강호행을 여행으로 만들어버린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검무극을 따라 나가며 취마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날 너도 있었지? 다 봤지? 그래 놓고선 지금 잘난 척하는 거지?”
* * *
흑선방주(黑扇幫主) 주규(周奎)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어두컴컴한 창고 같은 곳에 있었다. 그는 마혈을 제압당해서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혈은 제압하지 않아서 말은 할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아! 나, 납치당했지?’
납치당한 일이 믿기지 않는다. 죽립을 쓴 여인이 장원에 쳐들어와서 순식간에 수하들을 베고 자신을 제압했다.
죽립에 면사까지 착용하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니, 면사를 쓰지 않았다고 해도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뭔가 질문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여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신을 제압해서 여기 던져둔 것이다.
‘뭐 때문이지?’
살아오면서 워낙 여러 악행을 저질렀기에 무슨 원한 때문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어쨌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넌 날 살려둬선 안 됐다.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알게 해주지.’
그에게는 믿을만한 뒷배가 있었다. 특히 최근에 한 곳과 중요한 일을 함께 진행 중이다. 장원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고수들을 풀어서 자신을 찾을 것이다.
북혈문(北血門).
북혈문은 북해삼강(北海三强)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 단연 독보적인 힘을 자랑하는 곳이 북해빙궁이었고, 남은 두 곳이 서로 쌍벽을 이루는 북혈문과 빙검문(氷劍門)이었다.
세 세력은 친구이자 적으로 내부적으로는 패권을 다퉜고, 중원에서 압박을 가하면 서로 손을 잡고 친구가 되었다.
특히 북혈문은 잔인하고 사나운 기질을 지닌 무인들의 집합소로, 북해빙궁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곳이다.
주규가 손잡은 사람이 바로 북혈문주의 둘째 아들 양중(楊仲)이었다.
‘양중을 건드리려다가 네년 모가지부터 떨어질 거다.’
그는 양중이 곧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 믿었다. 그에게 자신은 반드시 구해야 할 사업적 동반자였으니까. 둘째인 그가 북혈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이번 사업을 성공시켜야 했고.
바로 그때였다.
“으으으.”
옆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누군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두컴컴한데다가 내공은 쓸 수 없었고, 게다가 자신이 붙잡혀 온 것에 집중하는 바람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규가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상대의 얼굴 윤곽이 드러났다.
“허억!”
상대를 확인한 주규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양 공자!”
놀랍게도 그는 양중이었다. 자신을 구하러 온 거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도 함께 붙잡혀 와 있었다.
날 구해야 할 당신이 여기 붙잡혀 있으면 어떻게 해?
“정신 차리시오! 양 공자!”
몇 번이나 소리치자 그제야 양중이 잠에서 깼다.
“주규! 네놈이 감히!”
그는 주규가 자신을 붙잡아온 걸로 오해했다. 이제 막 정신이 든 데가 주위는 어두컴컴했기에 주규의 목소리만 알아들은 것이다.
“오해 마시오! 나도 붙잡혀 왔소.”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려고 주규가 소리쳤다.
불신의 침묵에 주규가 빠르게 말했다.
“양 공자를 납치한 사람이 죽립을 쓴 여인이지 않았소?”
죽립을 쓴 여인이란 말에 양중은 자신을 납치한 상대를 떠올렸다.
맞다. 죽립을 쓴 여인이었다. 여인은 자신의 호위 무인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는데, 어찌나 몸놀림이 빨랐는지 어떤 방식을 썼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럼 그대도?”
“장원이 다 쓸렸습니다.”
양중은 누구 소행인지 짐작이 아니라 확신을 했다.
“형이오. 그놈 짓이 틀림없다.”
이곳 북해에서 감히 자신을 건들 사람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북해빙궁과 빙검문 정도다.
북해빙궁이라면 자신을 굳이 이런 식으로 납치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언제까지 북해빙궁으로 와라, 이 한마디만 해도 시키는 대로 해야 했으니까. 무엇보다 납치는 그들 방식이 아니다.
빙검문일 가능성도 희박하다. 자신들과 손을 잡고 북해빙궁을 견제한 그들이니까. 그들과는 이와 입술과의 관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쯤은 서로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주규는 이번 일을 저지른 자가 북혈문 대공자라는 사실도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양 공자를 납치하면 당장 대공자 본인이 의심받는다는 것을 잘 알 텐데. 그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 것 같진 않습니다. 게다가 대공자 밑에 그런 여고수가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 소행이라는 거요?”
잠시 고민하던 주규가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말했다.
“공자님과 제가 진행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양중의 인상이 굳혀졌다. 주규와 손잡고 진행하던 일이 있었다. 함께 붙잡혀 왔다면 그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짓이든 우린 곧 풀려나게 될 거요. 내가 납치되었다는 걸 본문에서 알고 수색에 나섰을 테고. 또 우리에겐 황추가 있으니까.”
주규도 황추에 대해 잘 알았다. 그는 양중의 수족이자 추종술의 달인이었다. 추종술뿐만 아니라 무공실력도 대단해서 이런 일이 생기면 황추가 나서서 일을 해결했다.
“믿을 수 있지요, 황 대협은.”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우릴 살려둔 게 큰 실수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나중에 이곳을 빠져나가면 그년의 뼈를 산채로 다 발라낼 거요.”
바로 그때 뒤에서 누군가 잠에서 깨어나는 신음이 들렸다.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누군가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시기적절한 순간에 한 사람씩 깨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밀려드는 불안감에 주규는 애원했다.
‘설마? 아니겠지? 제발!’
이제 어둠에 익숙해진 두 사람이었다. 그들의 놀람은 곧장 탄식으로 이어졌다.
뒤쪽 구석 벽에 마혈이 제압당한 채 기대 있는 사람은 바로 황추였다.
여기 붙잡혀 있는 걸 보니 자신들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이것이겠지만.
그럼 당신은 누가 찾아내냐고?
* * *
검무극과 취마는 북해에서 사람이 많이 오가는 마을의 한 주점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장원이 있던 첫 번째 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분명 큰 문파들이 있는 이 지역에서 다음 일이 벌어질 거란 예상 때문이었다.
과연 이곳에서 원하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북혈문 이 공자가 실종되었다는군.”
“나도 들었네. 그 일로 북혈문이 발칵 뒤집힌 모양이더군.”
검무극과 취마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취마가 검무극의 잔에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혼자서 북혈문을 상대하다니. 정말 강심장이군, 강심장이야.”
북혈문에 대해서는 검무극도 취마도 알고 있었다. 북해를 대표하는 세 세력 중 하나였으니까.
“이안이 날 닮아서 겁이 없긴 해.”
“대체 무슨 일이기에 북혈문의 혈육까지 납치한 걸까?”
“첫 강호행을 제대로 하고 싶었나 보지.”
취마가 술을 홀짝이며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이대로 지켜만 볼 거야?”
북혈문주의 혈육을 건든 이상, 그들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고수들의 숫자나 전체 규모로 봤을 때, 쉽게 볼 수 있는 상대는 절대 아니다.
“우선은.”
그래도 그녀가 어떻게 처리할지 지켜볼 작정이다. 이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안아,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거냐?
그때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빙궁의 고수들이다!”
밖을 쳐다보니 저 멀리 하얀 백의를 입은 무인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북해빙궁.
무림 신비 세력 중 으뜸이라 불리는 그들이었다. 정사마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온 그들이었다. 그 오랜 역사 속에서도 몰락하지 않은 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강함을 증명한 셈이다.
빙궁 무인들이 내뿜는 기도는 맑으면서도 차가웠다.
특히 선두에 선 젊은 여인은 차가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검무극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북해빙궁 궁주의 외동딸 한설(寒雪).
당대 빙궁주의 성격을 닮아 무정한 성격을 지녔다는 그녀였다.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알려진 그녀였다. 세상에 그 누구도 믿지 않으며, 심지어 부모조차 믿지 않는다고 소문난 그녀였다. 그녀와 관계된 소문들은 이렇게 다 매섭고 차가운 것들이었다.
그녀를 선두로 뒤쪽에 십여 명의 고수가 뒤따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대단한 기세를 드러내는 빙궁의 고수들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며 걸어가던 그들이 주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애초에 주점을 향해 걸어온 것이다. 수하들을 밖에 대기시킨 후에 한설이 홀로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주점 안으로 들어오자 손님들은 고개를 숙인 채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한설이 검무극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성정이 소문대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차가운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면, 그건 분명 그녀를 위한 말이었다.
한설은 맑고 차가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응시하며 첫인사 대신 말했다.
“소교주님, 저와 빙주 한잔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