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400)
절대회귀-400화(400/424)
제400회 만났으면 술주정이나 부렸겠지.
북해빙궁의 궁주전은 탑의 꼭대기에 있었다.
마치, 고드름이 하늘로 치우쳐 솟은 것처럼 생긴 탑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웠다.
그 입구에서 한설은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수하의 이유를 조직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오.
그녀가 입구까지 뒤따랐던 수족인 찬에게 불쑥 물었다.
“네게도 이유가 있어?”
찬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떤 이유 말씀이십니까?”
“내가 이해해야 할 이유 같은 것이 있냐고.”
일단, 이 질문부터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없습니다.”
찬은 짤막하게 대답했고 한설은 그를 남겨두고 탑으로 들어섰다.
찬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에 오히려 그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소궁주님, 제가 이해해야 할 뭔가가 생긴 겁니까?’
한설은 얼음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얼음처럼 보였다. 얼음이면서 얼음이 아닌, 북해빙궁 고유의 건축술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여러 색으로 반사되며 신비로움을 더했다.
그 환상적인 공간을 올라가고 있지만, 한설은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게 정상이지. 수장과 수하 사이에 대체 ‘이해’라는 말이 왜 필요한 것인가? 부모 자식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탑의 꼭대기에 자신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빙궁주 한서경(寒曙景).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는 철의 여인.
최근 몇 대에 걸친 빙궁주 중에서 가장 무재가 뛰어나다고 알려진 여인이기도 했다. 물론 외부에 무공을 드러낸 적이 없기에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렇듯 빙궁의 강함은 그 힘이 드러나지 않은 은밀함과 신비로움에 있었다.
“궁주님.”
한설에게 그녀는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였고, 어머니가 아니라 빙궁주였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따스하게 안아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걸음 다가서면 어머니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철저하게 소궁주로 키워졌고, 그런 한설에게 그녀는 엄격한 빙궁주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누가 봐도 모녀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지 않았다면, 한설은 친모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으리라.
지금 두 사람은 다섯 걸음이 채 되지 않은 거리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얼마나 깊은 절벽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절벽 끝에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북혈문의 둘째를 납치한 인물은 예상대로 마교의 무인이 맞았습니다.”
마교가 북해의 일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중요한 보고였음에도 빙궁주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수하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고, 소교주는 오히려 그 일을 감싸는 듯 보였습니다.”
빙궁주가 눈빛으로 이유를 물었지만, 한설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끼는 수하인 듯 보였습니다.”
그러자 빙궁주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고 북혈문의 혈육이 그들 손에 죽게 해선 안 된다.”
북혈문이 도움을 청했고, 어머니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려 하고 있었다.
한설은 어머니와 북혈문주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알지 못했다.
“일단 소교주에게 수하의 행방을 넘기라고 말했습니다.”
“네 말대로 아끼는 수하라면, 쉽게 수하를 넘기겠느냐?”
“아니겠지요.”
네가 생각하는 답을 말해 보라는 눈빛이 다시 한설에게 날아들었다.
이럴 때 얼마나 숨 막히는지 어머니는, 아니 궁주님은 알고 있을까?
어려서부터 그랬다. 스스로 답을 찾아내야 한다고. 그래야 강해진다고 어머니는 믿었다. 그게 정답이라 여기는 사람처럼.
‘어머니, 그 답은 틀렸어요.’
답을 찾아내라고 재촉하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잠시 쉴 수 있는 품이 엄마이기를 바랐건만. 이 길 끝에는 엄마가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건만.
그리고 지금의 한설에게는 예전에 품었던 이런 아쉬움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던 그녀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소교주가 취마와 함께 온 이유는 죽은 백주설원의 원주 때문이었습니다.”
“취마는 그녀의 죽음에 어떤 반응이더냐?”
“자결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취마가 쉽게 돌아가지 않겠군.”
빙궁주는 취마와 백주설원의 원주가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시금 한설이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딸이지만 수하들의 보고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점을 아쉬워할 법도 했는데, 두 사람은 전혀 아무런 내색이 없었다.
뒤에서 빙궁주가 불렀다.
“소궁주.”
한설이 다시 돌아섰다.
“소교주는 정사마 회담을 이뤄낸 인물이에요.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이렇게 정중히 말할 때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할 때다.
한설은 검무극이 그런 인물인지 아직 느끼지 못했지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빙궁주는 투명한 얼음 바닥으로 한설이 탑 계단을 돌아서 내려가는 희미한 윤곽을 쳐다보고 있었다.
* * *
눈 쌓인 설원에 검무극과 취마가 서 있었다.
한참을 서 있던 취마가 불쑥 말했다.
“여기다. 원주가 처음 내게 좋다고 말한 곳이.”
그때는 아직 마존이 되기도 전, 한창 젊은 시절이었다.
“왜 그분의 마음을 안 받아줬어?”
취마가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때의 난, 술 하나만 해도 인생이 벅찰 때였다.”
“무슨 말이야?”
“취마가 되기 위한 경쟁자들은 술에 미쳐 있었거든. 반면에 나는…….”
“그들만큼 술을 좋아하지 않았군.”
취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안 사실이었다. 취마는 처음부터 누구보다 술을 좋아했을 것 같은데.
그래, 때론 인생은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우릴 떠민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던 사람이 살수가 되기도 하고, 칼날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쳐 한 사람이 유명한 검객이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나 잘 적응해 버린다.
“지금은 술 좋아하잖아?”
그러자 취마가 피식 웃었다.
“좋아만 하겠어? 내 삶의 전부지.”
검무극이 그를 따라 웃었다.
“이렇게 술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그녀 도움이 컸다. 처음에는 어색한 사이였지만 점차 우린 순수하게 술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서찰로 주고받았다. 그녀가 보내준 술에 관한 이야기며, 중원의 온갖 술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지.”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술로 맺어진 취마의 지기(知己)였음을.
“내가 이 자리에 오른 것도, 내 무공이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녀 도움이 컸지. 그렇게 고마운 사람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난 이제야 찾아왔어. 내가 이렇게 이기적인 놈이다.”
취마가 분노한 이유다. 지기를 잃은 슬픔과 이젠 돌이킬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분노.
사는 게 다 그렇지.
검무극은 이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지금 취마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말이 아닐 테니까.
“나쁜 놈이네!”
취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쁜 놈이지.”
마치, 그 자백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중원에서는 꽃비가 날리는데, 여긴 눈이 내린다.
취마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나쁜 놈이다!”
취마의 외침이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검무극이 함께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좋은 마존이 어디에 있나? 다 나쁜 놈들이지. 그분도 형 이해할 거다. 형에게 술 보내면서 행복했을 거고. 어쩌면 서로 만나지 않고 교류한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 만났으면 형이 술주정이나 부렸겠지. 잘했어. 그게 그분에게 더 좋았을 거야.”
취마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 위로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녀석은 모를 거다.
그 떨리는 눈빛을 보며 검무극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그래도 어떤 놈인지는 잡아야겠지?”
취마가 자결이 아니라고 확신했으니, 누군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자가 있겠지.
“그 사건을 조사하려면 빙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취마의 걱정에 이미 검무극은 계획을 세운 후였다.
“북혈문의 일에 북해빙궁이 나섰다는 건 그들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만한 사정이 있다는 뜻이지.”
“그렇겠지.”
“그럼 그 일을 해결해 주면 저쪽에서도 이번 일을 조사할 수 있게 해줄 거야.”
취마는 검무극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북혈문주의 둘째 아들을 돌려보내 주고 이번 일을 조사하게 해달라고 거래를 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그놈을 죽였으면 어쩌려고?”
“죽이고 싶었다면 애초에 납치하지 않고 죽였겠지. 그런데 납치했다는 건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일 거야.”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고?”
역시 대답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벌였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월을 통해 고월에게는 자신의 행방을 알려뒀을 거야. 북혈문과 빙궁의 수색에도 발각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아마도 지금 은월의 북해 안가에 있을 거 같아.”
고월의 일 처리가 얼마나 치밀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검무극이었다. 고월의 안가는 진짜 안가일 테니까.
“수하를 너무 잘 아는 것 아니야?”
“심장이 달리 심장이겠어? 가자.”
검무극과 취마가 점점 심해지는 눈발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북혈문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안은 설마 북혈문주가 자식을 포기할 줄은 몰랐다.
‘비정강호라더니. 정말 해도 너무하는군.’
자신이라면 자식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버렸을 텐데. 정말 이렇게 나오시겠다?
예상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어 닥쳐오자 양중은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아버지는 북혈문의 명예를 아들의 목숨과 바꾼 것이다.
‘죽여라!’
당당하게 외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날 죽이면 본문은 반드시 복수한다.”
살려달라는 애원을 그는 여전히 그릇된 방식으로 하고 있었다.
반면 주규와 황추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들 두 사람은 여전히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살고 싶은 열망이 강렬했다.
“자, 두 사람도 눈 떠. 이제 다 함께 고민해 봐야 할 시간이야.”
결국 주규와 황추도 눈을 떴다. 이안이 어두운 실내에 등불을 밝혀두었기에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설마 자신들을 잡아 온 여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미친년아! 너 뭐야?’
이런 말이 튀어나올 뻔했을 정도로, 주규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라면 북혈문 혈육을 납치하는 일 말고도 정말 신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텐데.
“협박이 안 먹혔어. 이제 어떻게 할까?”
이안이 그들 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아름다웠다.
“손을 잘라서 보낼까?”
멍하게 그녀를 쳐다보던 주규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흠칫 놀랐다.
“누구 손 말입니까?”
그러자 양중이 그를 노려보았다. 누구 손이겠는가? 자기 손이겠지. 뻔히 알면서 묻다니!
“안 통할 거다! 어차피 내 목숨을 포기했는데, 손을 잘라 보낸다고 통하겠나?”
어느새 양중은 양손을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이안이 그를 겁주었다.
“허풍일 수도 있잖아?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하고.”
이안이 양중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검 안 쓰는 왼손으로 잘라줄게.”
당장에 베려는 듯 그녀가 검 손잡이를 잡자 양중은 기겁해서 소리쳤다.
“안 통할 거라니까!”
이안이 검에서 손을 뗐다.
“그렇지? 그럼 어떻게 해? 정말 목을 잘라서 보낼까?”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섬뜩한 말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뭔데?”
“적어도 기분은 좀 나아지겠지.”
양중이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주규가 대신 나섰다.
“그럼 당신이 구하려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거요.”
이안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뭐야? 설마 내가 그런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거로 생각해? 나 아니더라도 어차피 그 사람들 비참하게 죽일 거잖아? 아냐? 정말 돈 벌게 해주려고 데려왔어?”
당연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 내 답은 내놨으니 너희가 답을 내놔봐. 아니면 그냥 너희 다 죽여서 북혈문에 보내고, 나는 연기처럼 사라질 거다.”
이안이 이들을 겁주는 이유가 있었다.
뭔가 답들을 내놓다 보면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겠지 싶어서. 그 실마리라도 좋다.
‘도련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고민해 봤지만, 자신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틀림없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 존재할 텐데. 그래서 세월이 흘러 이 순간을 돌아봤을 때, 그렇게 했었어야지 하며 이불을 걷어찰 명확한 정답이 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불이 얼굴을 덮은 것처럼 답답할 뿐이다.
“저를 풀어주십시오! 제가 가서 문주님을 설득하겠습니다.”
주규는 어떻게든 자신만이라도 살아남으려 애썼다.
함께 설득해도 안 통할 일인데, 양중이 그의 길을 막았다.
“그게 통하겠냐?”
그는 주규의 의견을 무시하며 새로운 계획을 내놓았다.
“형을 납치해 오시오. 그럼 아버지는 항복할 거요.”
이안은 어이가 없었다. 아비나 자식이나, 이것들이 정말! 저게 반쯤은 진심일 거다. 남은 반은 이런 이유일 테고.
“지금 네 형 주위에 고수들이 득실할 텐데. 나보고 잡히라는 거지?”
정곡을 찔린 양중은 움찔했다.
“나는 내 생각을 밝혔을 뿐이다.”
“오답이야. 자, 다음 정답?”
붙잡혀 온 세 사람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사실 이안이 시도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다른 제안을 해서 놈들을 회유해야겠지.’
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제안을 하는 순간 주도권을 놈들에게 빼앗기게 될 거다. 자식을 죽이겠다는데도 눈도 깜짝 안 하는 자들인데.
‘그냥 도련님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호위할 때가 좋았지.’
그렇게 답을 찾고 있던 그때였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이안은 물론이고 세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
양중이 다른 두 사람을 돌아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규와 황추의 표정도 환해졌다.
‘됐다! 우릴 구하러 왔다!’
‘넌 이제 죽었다!’
그들은 차갑게 웃었다. 주규가 눈짓으로 말했다. 괜히 경거망동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고. 자신들을 다 죽여버리고 바깥의 구조대를 상대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필요한 경고였다. 주규만큼이나 양중도 살고 싶었으니까. 양중은 숨도 쉬지 않았다.
이안은 검을 뽑아 든 채 나직이 물었다.
“누구냐?”
그러자 문 너머에서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답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