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408)
절대회귀-408화(408/424)
제408회 다음에 만날 때는 꼭 한잔하세.
한설과 이안은 빙궁 내원을 함께 걷고 있었다.
한설은 원주가 향설빙주를 누구에게 만들어 주었는지를 알아내는 일을 맡았지만 사실 막막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지?’
이건 명석함과 우둔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험의 문제였다. 사건을 조사하는 일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역시 선택지에 두지 않았다.
“우선 백주설원부터 다시 가보죠.”
이안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조금은 정중해졌다. 지금까진 소교주의 수하로 대했지만, 이제는 권마의 딸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양딸이라고는 하지만 마존의 딸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좋은 생각이세요.”
“어째서죠?”
“돌아가신 원주님의 방을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분은 정말 술 만드시는 일을 좋아하셨던 분이셨구나. 아마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백주설원에 있던 시간이 더 많았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찾아야 할 답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이안의 말에 한설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명석하구나.’
이번에 검무극과 취마, 이안은 마인에 대한 그녀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쉈다.
마인들은 잔혹하고 폭력적이며 욕망을 감추지 않는 이들이라 여겼는데.
하지만 이들 셋은 기존에 생각했던 소교주도, 마존도, 수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인들에게 질 수는 없지.’
취마가 서찰을 조사해서 단서를 찾아냈으니, 자신도 뭔가 보여줘야 한다. 소교주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을 압도하는 딸의 모습을. 살면서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녀인데, 어머니에게만큼은 아직 그런 감정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아니, 어쩌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다시 오셨군요, 소궁주님.”
백주설원의 임시 원주가 두 사람을 반겼지만, 한설은 그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한설은 그곳에서 술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를 담당하는 인물인 조명(曺銘)을 만났다.
조명은 한설의 방문에 잔뜩 긴장했다.
“그대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바쁘실 테니 돌려 말하지 않겠어요. 죽은 원주께서 향설빙주를 만들 재료를 요구하신 적이 있나요?”
“아뇨, 없으십니다.”
긴장해서인지 조명의 목소리가 떨렸다.
“중요한 일이니 나를 속여선 안 됩니다.”
한설이 차갑게 그를 쳐다보자, 조명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 이안이 나섰다.
“아마 원주님과 약속했을 거로 생각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고개 숙인 조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린 그 술 때문에 원주님이 돌아가신 거로 추측하고 있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조명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원주님을 죽게 한 자들을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조명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아니라고 딱 잡아떼기에는 죽은 원주와의 관계가 깊었던 것이리라. 그는 눈도 깜짝 안 하고 사람을 속이는 그런 유형이 아니었다.
조명이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그 술 때문에 돌아가신 겁니까?”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안의 말을 소궁주가 받았다.
“기회는 항상 오는 게 아니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원주의 죽음을 다시 살필 일은 없을 거네.”
다소 차가운 어조의 말이었지만,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조명은 더는 숨기지 않고 사실을 밝혔다.
“조용히 저만 불러서 향설빙주를 만들 재료를 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귀한 사람이 은밀히 청한 술이라고요. 비밀로 해달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누구에게 보낸다고 했나?”
“그건 저도 모릅니다.”
“평소 원주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있었나?”
“특별히 말씀드릴 사람은 없습니다. 평소 혼자 계시는 것을 좋아하셔서.”
더는 물어볼 것이 없었기에 한설은 질문을 멈췄다.
“술 재료에 손을 대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징계를 받을 거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평소 원주를 존경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그랬으니 은밀히 재료를 내어준 것이겠지.
이안은 솔직히 말해준 그를 따스하게 위로했다.
“원주께서도 틀림없이 고마워하실 거예요.”
그렇게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이안은 그를 벌주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말하지 않았다. 용서할 마음이 있다가도 괜히 말을 꺼내는 바람에 벌을 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마인답지 않게 사람들에게 다정하군요.”
그러자 이안이 물었다.
“이 무림에선 비정한 사람과 다정한 사람, 누가 더 오래 살아남을까요?”
“그야 당연히.”
한설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답은 명확했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생각은 그녀와 달랐다.
“전 다정한 사람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믿는 쪽이라서요.”
다정함이라? 한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다. 다정함을 받아 본 적도, 남을 다정하게 대한 적도 없다.
어쨌든 한설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비정강호에서 다정함 타령이라니?
그때 조명이 그들에게 뛰어와 말했다.
“조금 전에는 너무 긴장해서 생각이 안 났었는데, 원주님께서 서 장로님과 함께 술을 마시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분과 어울리지 않는 분이셔서, 기억에 남습니다.”
조명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돌아갔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한설에게 말했다.
“이것도 다정함이 만들어 낸 결과죠.”
그녀의 농담에도 한설은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서 장로란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음을. 이안이 차분히 그녀에게 말했다.
“절대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것이 소궁주님의 조건 아니었나요?”
너는 숨기지 마라, 나는 숨길 테니까. 이런 생각은 아니시겠죠?
이안의 눈빛까지 이렇게 묻자 결국 한설은 망설였던 말을 꺼냈다.
“서 장로는 어머니가 가장 믿는 분이에요.”
서 장로는 빙궁 내부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로 빙궁주의 가장 큰 조력자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원주가 안심하고 그의 부탁을 들어줬을 수도 있겠네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만들어줬을 거란 조건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서 장로는 인품도 훌륭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향설빙주가 그녀의 죽음과 관련이 있으리라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상이 서 장로라고?
어머니가 아는 일이라도 문제고, 모르는 일이라도 문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서 장로는 우리 어머니가 유일하게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 * *
휘이이이이잉.
바람은 점점 강해졌지만 계속 걸음을 옮겼다.
원래 이곳을 걷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바람의 세기도 세기였지만, 바람에 실린 무시무시한 한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버틸 수 없는 차가움이었기에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내공 소모가 엄청났다.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 쓰는 내공, 한기를 막는 데 쓰는 내공. 내공이 이중으로 들어야 했으니까.
반면 지금 나는 한기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바람의 세기만을 신경 쓰면 되었다.
이미 천기단으로 한서불침이 된 상태에서 만년설과까지 복용하자 그 효능은 정말 신비로울 정도로 놀라웠다. 피를 얼려 버릴 정도로 매서운 이 한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쉽게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바람은 무지막지해졌다. 걸을 때마다 바람 소리가 달라진다.
장담할 수 있다.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이곳을 지나갈 수 없음을.
나도 선택받은 사람이다.
회귀한 후 정말 많은 내공을 얻었고, 구화마공과 천마호신공을 익혔다. 게다가 만년설과까지 복용한 상태다. 그런 나도 저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데 대체 누가 이곳을 돌파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이 극한지체를 왜 찾은 걸까?’
어쩌면 이곳을 돌파하기 위해서였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었는데, 그래서 가보려고 한 이유도 있었는데.
막상 직접 해보니 그건 확실히 아니다. 분명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이제 딴생각을 아예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은 강하게 불었다.
내가 가진 내공과 끝까지의 거리. 점점 강해지는 바람 세기. 이 모든 것을 계산했다. 무작정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내공을 아끼려다간 그냥 날아가 버릴 상황이었다. 거기에 힘이 빠져서 날아가 버릴 때, 몸을 보호할 최소한의 내공까지 계산했다.
그렇게 계산된 내공만을 사용하면서 걸었더니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팠다. 정말 아팠다. 바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아플 줄이야.
하지만 내공을 더 끌어올려서 고통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는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 고통을 참아내야 저곳까지 갈 수 있었다.
생각지 못한 내공이 더 들었다. 내공을 일으켜 고막을 지켜야 했다. 바람 소리가 너무 커서 귀를 다칠 정도였다. 그렇게 소모된 내공은 고통이 되어 돌아왔다.
후우우우우우우우우웅!
‘굳이 저곳을 왜 가려고? 이러다 내상이라도 입으면?’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끝없이 나를 유혹했다.
아마 회귀 전의 인생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렇게 나아가지 못했을 거다.
그땐 너무나 많은 유혹에 시달렸었다. 포기하자. 인간이 어찌 회귀할 수 있겠나?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내 인생 살자.
그 끝없는 유혹을 이겨냈고, 그 외로운 길을 홀로 걸어보았기에.
‘이 길도 걸을 수 있다.’
걷고 또 걷고.
단전 속 그 많던 내공이 어느새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마지막 순간에는 바람 소리가 사라지며 주위가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환각 증상인가? 이러다 주화입마에 빠지면 큰일인데?
만약 그런 전조현상이라면 당장 포기하고 돌아서야 한다.
그것이 마지막 유혹이었다.
나는 꿋꿋이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유혹을 이겨낸 것은 묵묵히 내디딘 그 한 걸음이었으니까.
고오오오오오오오!
유혹을 이겨내는 순간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바람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렇게 난 드디어 바람의 근원에 도달했다. 바람의 세기가 극에 달했다. 아껴둔 내공을 모두 이용해서 호신강기와 천마호신공을 극한으로 발휘했다.
‘다 왔다! 여기만! 제발!’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이겨내며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다.
바람 계곡을 통과하고 옆으로 몸을 틀어서 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그 엄청난 바람 속에서 벗어난 것이다.
“해냈다!”
살았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금방 빠져나온 계곡으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불었으면 바람의 물결이 눈으로 보였다.
바람의 근원은 하늘이었다. 저 멀리 비스듬히 하늘에서 내려온 바람이 계곡을 향해 맹렬히 불어닥치고 있었다. 마치 악마가 세상의 모든 공기를 입으로 빨아들이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신비하고 낯설고 두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곳에 도달한 그 자체가 바로 그 어떤 기연보다 더 큰 기연이었음을.
이곳까지 뚫고 들어오면서 내가 가진 모든 내력을 발휘했다.
무인이 가진 모든 잠재력을 발휘했다. 잠재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긴 없이 쓰고 나자, 무인으로서의 나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무학의 경지가 올라간 느낌을 받았다. 나란 사람이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했다. 묘한 경험이자 느낌이었다.
평생 처음 느껴본 이 경험은 분명 구화마공에도 영향을 미칠 것임을 확신했다.
바람을 빨아들이는 악마의 입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뒤쪽으로는 거대한 절벽으로 막혀 있었다. 너무 높아서 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설산의 줄기가 반대 방향을 모두 막고 있었다. 마치 저 바람 계곡을 뚫지 못하면 들어올 수 없는 곳처럼.
그 앞으로는 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꽃이 피고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토끼와 사슴이 나를 봤지만 달아나지 않았다. 인간을 처음 본다는 눈빛이었다.
신비로운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애초에 인간을 들인 적 없는 태초의 신비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 모든 것의 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을.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그는 노인이었다. 이런 곳에 노인이라니?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그분은 아니겠지?
“어르신?”
조심스럽게 노인을 불렀다. 그러자 노인이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놀랍게도 그는 나를 회귀시켜준 바로 그 노인이었다.
“어르신!”
노인이 활짝 웃으며 들고 있던 술병을 흔들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술 한잔하자고 했잖나?”
노인이 나를 회귀시키기 직전에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노인이 다시 한번 내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받았었는데. 그게 오늘일 줄이야.
“저 금주 중입니다만. 일부러 이때 온 거죠? 나 놀리려고.”
노인이 껄껄 큰소리로 웃었다.
“그때보다 많이 밝아졌구먼.”
“덕분입니다.”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노인이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생 많지? 잘하고 있네.”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남들에게는 온갖 표현을 다 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지만.
나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 노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었나 보다.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그러니 잘하고 있다고 그 한마디만 해달라고. 그 한마디만 들으면 된다고.
“금주 중이니 술은 다음에 하세.”
“벌써 가시려는 거요?”
“알다시피 날 찾는 사람이 많아서 아주 바쁘다네.”
그래도 또다시 만나러 올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려서 기분이 좋았다.
휘이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노인은 바람과 함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주위에 있던 낙원 같았던 풍경도 모두 사라졌다. 나무와 풀과 동물들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이제 주위는 온통 눈과 얼음뿐이었다.
순식간에 왔다가 순식간에 갔기에 꿈만 같았다. 헛것을 봤나? 탈진해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심력과 내공을 모두 써버린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어깨를 두드려 주던 손길은 너무나도 생생했으니까. 그를 다시 봐서 너무 반갑고 좋았다.
요 며칠 하늘 올려다보는 것을 잊고 지냈더니 이렇게 직접 보러 오셨소? 나도 자주 올려다볼 테니, 부디 끝까지 지켜봐 주시오. 만날 바쁜 척은 그만하시고. 그리고…… 정말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