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41)
절대회귀-41화(41/424)
제41회 세련되면서도 무서운.
그날 이후 한동안은 이안을 가르치는 것과 황천각 일, 그리고 내 수련에만 집중했다.
이안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순식간에 비천검술을 익혀나갔다. 그녀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무공에 재능이 있었다. 거기다 피나는 노력까지 더해지니 그녀의 성취는 놀랄 정도로 빨랐다.
이안을 가르치면서 새삼 깨닫는 한 가지.
가르치는 일은 동시에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설명하면서 나를 객관화했다.
‘아, 내가 이 초식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가르침이란 단지 고여 있는 물을 퍼내는 일이 아니다. 진심으로 가르치지 않고 어설프게 가르치면 물이 마르고 소진되겠지만, 깊은 사고와 함께 정성껏 가르치면 우물의 크기를 키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랬기에 나는 이안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고 있었다. 지난 삶에서 단 한 번도 누구를 가르쳐본 적이 없었기에, 이 과정은 내게 굉장한 경험이 되었다.
수련 중간에 잠시 쉬는데 그녀가 진지하게 물었다.
“도련님. 정말 귀영대를 만드실 거죠?”
“응.”
“그럼 무복은 제가 만들어도 될까요? 칙칙한 흑의 무복 말고 세련된 무복으로 만들고 싶어요. 색과 모양을 다르게 해서 교내에서 입는 옷과 작전용을 따로 만들고요.”
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귀영대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단 한 번도 무복의 색이나 모양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입었던 모든 무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가리는 복면도 작전 난이도에 따라 나누고 싶어요. 복면에 새길 귀신은 세련되면서도 무시무시하게 그려서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게끔…… 왜 웃으세요?”
“세련되면서도 무서운 귀신은 어떻게 생긴 귀신인가 해서.”
“제가 그림도 좀 그리거든요.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앞으로 귀영대에 들어올 녀석들은 멋진 옷을 입겠구나.”
“놀리지 마세요.”
이안은 참으로 섬세한 사람이다. 나에게 집중되었던 마음이 다른 이들에게로 향한다면,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훌륭한 대주가 될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네 실력이다. 귀영대는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할 거야. 작전에 성공하고, 수하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도 모두 네 실력에 달렸어.”
“네, 명심할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게 뭐죠?”
“수하를 잃을 각오. 수하를 잃어도 상처받지 않을 꿋꿋한 마음.”
이안이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도련님은 제가 애처럼 보이시죠. 만날 도련님 옆에만 이렇게 있으니.”
“아니냐?”
“아니에요. 애도 아니고, 도련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순진하고 착하지도 않아요. 수하를 잃는다고 죽을 만큼 마음 아파하고 그러지 않아요. 나중에 저한테 실망하실까 봐 오히려 걱정돼요. 얘가 이렇게 냉정한 녀석이었나, 하고요.”
“그런 일로 실망 안 한다. 그럼 됐어.”
기왕 말이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이안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도련님이 비천검술을 전수해주시겠다고 했을 때, 저는 비로소 땅바닥에 발을 디딘 기분이 들었어요.”
“무슨 뜻이야?”
“솔직히 그전까지는 허공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거든요. 귀영대? 정말 그런 조직이 만들어지기나 할까? 내가 대주라고? 정말? 도련님은 지금 어떤 열기에 휩쓸려서 이러시는구나. 이런 생각들이 들었거든요. 한데 비천검술의 구결을 외우면서 이게 현실임을 느꼈어요. 제가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아, 죄송해요. 아, 이런 자신감 없는 질문은 이제 안 하려고 했는데.”
“해도 돼. 아니, 해야지.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꿀 길을 걸어가면서 어찌 이런 질문을 하지 않고 갈 수 있겠어?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고. 십 년 후에도 해야지. 계속 물으면서 가야 하는 길이다. 나도 계속 잔소리할 거다. 우린 계속 서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팔마존과 같은 사람들이다.
남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에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걱정이나 공감이 없다. 그들은 묻지 않는다.
“네, 도련님. 이게 맞나 헷갈릴 때마다 물을게요. 도련님에게도 묻고, 또 저 스스로에게도 물을게요.”
나는 이안의 머리를 쓱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장하다.”
이안은 살짝 얼굴이 붉어지며 배시시 웃었다.
“자, 다시 수련 시작!”
“네!”
수련을 마칠 때쯤 그녀에게 조직관리와 용병술, 그리고 수장의 수신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쉴 때 틈틈이 읽어라.”
“네.”
요즘 수련의 연속이라, 황천각 일을 배우는 것에 소홀한 그녀다. 이렇게 책을 통해서라도, 조직을 운영하는 법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 * *
며칠 후, 나는 혈천도마를 만나러 남도종으로 갔다.
내가 남도종에 들어서자 도귀들이 몰려나와 나를 구경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지라, 어떤 놈은 쓰레기고 또 어떤 놈은 괜찮고. 이런저런 자들이 모여 살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들에게 나쁜 감정은 없다. 이들 덕분에 천맥강화술을 훌륭하게 완성할 수 있었으니까.
도귀들 역시 혈천도마와 좋은 관계로 지내는 내게 호감을 보였다. 또한 천맥강화술을 펼칠 때, 내 용기와 기세에 감탄한 자들이 많았기에, 어떤 자들은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몇몇 도귀들은 내게 와서 정중히 인사를 건넸고 멀리서 박수치며 환호하는 자도 있었다. 주인을 닮아서인가? 도귀들은 귀엽게 미친놈들 같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난 도귀의 안내를 받아서 혈천도마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내 방문에 놀란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날 붙잡아갈 일이라도 생겼나?”
“그사이 죄를 지으셨습니까?”
“나야 죄 많은 인생이니.”
“다행히 오늘은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에 왔나?”
“이걸 드리려고 왔습니다.”
내가 들고 온 것을 혈천도마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열면 맹독이 뿜어져 나오는 상자인가?”
“그런 상자는 대체 어디서 살 수 있습니까? 몇 개 사고 싶은데.”
“뭐냐니까.”
“열어보십시오.”
그가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든 것은 피독주였다. 공교롭게도 그의 농담과 정반대되는 물건이었다.
“최상품 피독주입니다.”
“봐서 안다. 한데 이걸 왜?”
“선물입니다.”
“선물? 이 비싼 걸 갑자기 왜?”
“생신 선물입니다.”
순간 혈천도마가 깜짝 놀라며 얼어붙었다.
“뭐?”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늘 생신이시죠?”
“오늘이 내 생일인가?”
정말 생각도 못 했다는 듯 혈천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르셨습니까?”
“생일 따윈 잊고 산 지 오래지. 한데 자넨 어떻게 알았나?”
“제가 누굽니까? 황천각에 없는 자료 없습니다. 어르신 속옷이 몇 벌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몇 벌인데?”
“그건 과장이었고요. 암튼 축하드립니다.”
명백히 의도된 호의였고 그를 진짜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정말 선물만 주려고 온 건가?”
“네. 그냥 순수하게 생신 선물로 드리는 것이니 전혀 부담 갖지 마십시오.”
“이대로 그냥 간다고?”
“저 바쁜 몸입니다. 이따 밤에 풍류주점에서 한잔하시죠. 기다리겠습니다. 아, 오늘은 때려 부술 생각 마시고요.”
나는 아직도 멍하게 서 있는 그를 두고 집무실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에 안을 쳐다보았다. 피독주를 내려다보는 혈천도마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표정 중에 감격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 * *
“그나저나 정말이십니까?”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서대룡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뭐가?”
“도마에게 생일선물을 줬다는 것요.”
“어떻게 알았어?”
“맙소사. 정말이었군요.”
“어떻게 알았냐고.”
“어떻게 알긴요, 소문이 도니까 알죠. 전 당연히 헛소문인 줄 알았습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준 것이 퍼져나갔다면, 도마가 선물 받은 것을 도귀들에게 자랑했다는 거다. 정말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말 많다.
“왜 주신 겁니까?”
“생일이니까 줬다.”
“저는 참 두 분 관계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럴 것이다. 원수가 되어도 몇 번은 될만한 사건들이 벌어졌는데, 도마와 나는 점점 더 친해지고 있으니.
“서로 좋은 말만 주고받는다고 친해지는 건 아니니까.”
나는 서대룡과 함께 복도 끝에 있는 대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황천각 조사관들과 집행무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렇게 한자리에 다 모인 것 오랜만이지?”
“네.”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훈련 이후 집행무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조사관들 역시 백도귀 사건을 잘 처리하면서 다들 용기백배였고.
“오늘 여러분들의 불타는 사기에 기름을 좀 부어주려고 왔다.”
다들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준비해온 봉투들을 서대룡에게 건넸다. 봉투는 황천각 무인들 숫자에 맞췄다.
봉투 안을 확인한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무슨 돈입니까?”
안에 든 것은 천 냥짜리 전표였다.
“모두에게 한 장씩 돌려라.”
“네.”
서대룡이 안에 든 것을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이 돈은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특별선물이다.”
선물이란 말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감사합니다, 각주님!”
내가 모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황천각은 그 어떤 외압도 허용하지 않는 조직이 되어야 해서 주는 돈이다. 한마디로 뇌물 받지 말란 말이다. 갑자기 돈 필요한 일 있으면 날 찾아와라. 월봉 당겨준다. 월봉으로 안 되면 내 사비로라도 빌려줄 거다.”
“네!”
생각지도 못한 돈이 생기자 다들 표정이 밝았다.
기분 좋을 때 하는 잔소리는 힘들게 딴 점수만 깎아 먹는 짓이니.
“해산.”
그렇게 대청을 나오는데 서대룡이 따라붙었다.
“각주님.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가?”
“익호가 돈 필요한 것요. 동생이 혼인한다고 요즘 돈 구하러 다녔거든요. 부모님 생전에는 병수발 한다고 돈 다 쓰고. 이젠 동생들 뒷바라지한다고 주머니가 찰 날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몰랐어.”
“거짓말 마십시오.”
사실 알았다. 우연히 알게 되어 익호만 주려다가, 이렇게 된 김에 다 주자가 된 것이다.
“그리 감격할 것 없다. 다 나를 위한 투자니까.”
“공자님을 위한 투자라고요?”
“돈 팍팍 쓰는 게 소문나면, 은근히 기대할 것 아냐? 천마가 되면 더 많이 쓰겠지 하고. 그럼 다들 내가 천마가 되길 바라겠지. 내가 이렇게나 얄팍한 사람이다.”
“정말 거기까지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 네가 물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남들은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겠구나 싶네.”
“역시 익호에 대해서 아신 거죠.”
“겸사겸사 주는 거다. 다들 고생 많이 했으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죠, 충성심이 그냥 생기겠습니까?”
“이런 것에 속지 말라고!”
서대룡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속임수조차 부리지 않으면서 사람만 부려 먹는 세상이니까요.”
그리곤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제 갈 길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