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412)
절대회귀-412화(412/424)
제412회 드디어 그자가 봤나 봅니다.
“취마님!”
검무극의 부름에 취마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광기와 분노에 휩싸인 상태가 아님을 확인하자 검무극은 안도했다. 그가 맨정신이라면 이런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으니까.
“어차피 두 번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좀 기다리죠.”
취마는 검무극의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그를 둘러싸고 있던 빙궁 무인들은 검무극의 등장에 더욱 긴장했다. 몇몇 이들은 검무극을 향해 돌아서서 경계했다.
그들은 이 사건을 벌인 사람이 취마라고 확신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그곳으로 이안이 도착했고 뒤이어 한설도 도착했다.
두 여인은 깜짝 놀랐다. 죽은 사람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이 만났던 백주설원에서 술 재료를 담당하던 조명이었다. 원주가 서 장로와 몇 차례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려줬던 바로 그 사람.
서로를 쳐다본 두 여인의 시선이 각기 다른 사람을 향했다. 한설은 취마부터 쳐다보았다.
‘설마, 당신이 이들을 죽인 건가요?’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봐도 취마의 소행처럼 보였다.
반면 이안은 검무극부터 쳐다보았다.
‘어쩌죠? 취마님이 함정에 빠지신 것 같아요.’
정말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이 검무극이 아니라면 심장이 터질 듯 뛰었을 거다.
하지만 검무극의 차분한 눈빛을 보자 그녀의 흥분한 마음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세상의 어떤 위험이 와도 해결할 것 같은 눈빛이다. 아니, 해결하지 못해도 좋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사방에서 방패와 창을 든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주위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오직 빙궁주의 명령을 따르는 북해빙궁 최정예 무인들인 북풍대(北風隊)였다. 갑주와 방패로 무장한 그들은 빙궁 내 어떤 정예조직보다 무공이 뛰어난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범한 눈빛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고수인지 알 수 있었다.
북풍대가 사방을 철통처럼 틀어막았고, 일부 북풍대원이 좌우로 늘어서 방패로 길을 만들었다. 일사불란한 그들 사이로 빙궁주가 걸어들어왔다. 그녀 뒤로 새하얀 무복을 입은 호위 무인들이 뒤따랐다.
지금까지 궁주전에서만 보던 그녀는 얼음성에 홀로 있는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외부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빙궁주는 말없이 시체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죽은 이들 중 무공을 모르는 이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제야 검무극이 취마에게 물었다.
“취마님, 어떻게 된 겁니까?”
비로소 취마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보자고 연락을 해왔다.”
취마가 바라본 시체는 바로 이안과 한설이 만났던 조명이었다.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갑자기 목의 혈맥이 터져 버렸다. 뒤이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들 역시 터졌고.”
그러자 누군가 소리치듯 말했다.
“그대 말을 어찌 믿으란 거요?”
뒤이어 도착한 사람은 바로 서낙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궁주전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물러간 그였는데, 지금의 기세는 그때와 달랐다.
“몸에 피를 그렇게 묻히고서 우리보고 그 말을 믿으란 거요?”
보이는 정황은 취마에게 불리했다. 피를 뒤집어써서 더 흉수처럼 보였으니까.
바로 그때 검무극이 나섰다.
“그래서 믿을 수 있겠지요.”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검무극은 차분히 그들에게 물었다.
“정말 취마께서 저들을 죽였다면 몸에 피를 묻혔겠습니까?”
검무극이 취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바로 앞에서 터졌어도, 마음만 먹으면 그 피를 다 피할 수 있었겠지요. 한데도 옷과 손에 저렇게 피가 묻었다는 건…….”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그들을 살리려 했던 거겠지요.”
취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자신이 변명하지 않아도 검무극은 정확히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검무극이 빙궁주에게 말했다.
“마존께서 저 사람들을 진정 죽이려 마음먹었다면 아무도 모르게 죽였을 겁니다. 여기서 피를 뒤집어쓴 채 포위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본교의 마존들이 어떤 분들이신지.”
물론, 빙궁주는 잘 안다. 만약 취마가 마음먹었다면 맨 처음에 포위했던 무인들은 이미 다 시체가 되었을 거다.
그러자 서낙이 흥분해서 물었다.
“하면, 왜 저리 서 있는 거요?”
검무극의 시선은 여전히 빙궁주를 향했다.
“궁주님에 대한 예의로 기다려 주신 겁니다. 현명하게 잘 판단 내려주시리라 믿고서. 이곳에서 자리를 이탈한다면 문제는 더 커졌을 테니까요.”
취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래서 차분할 수 있다. 검무극이 있는 한, 쉽게 누명을 쓰진 않을 테니까.
“마인들의 말을 쉽게 믿어선 안 됩니다. 당연히 조사가 끝날 때까진 구금해 두어야 합니다.”
단호한 서낙의 주장에 검무극이 반박했다.
“그건 공평하지 못한 처사요.”
“공평? 그게 무슨 말이오?”
검무극이 주위에 있던 무인들에게 말했다.
“다들 우리가 백화설원 원주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계실 거요.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 의심스러운 정황을 알아냈소. 이곳 빙궁의 고수 중 누군가가 죽은 원주에게 은밀히 향설빙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소.”
순간 서낙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이 자리에서 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 고수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속였소. 하지만 우린 그 사실을 밝혔음에도 그를 구금하지 않았소. 왜냐? 북해빙궁과 빙궁주를 존중했기 때문이오.”
주위에 있던 무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서낙은 뭐라 항변하지 못했다. 말이 길어지면 그 의심스러웠던 사람이 자신임을 이 자리에서 밝힐 것이다.
검무극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빙궁에 와서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서릿발 같은 기상을 드러냈다.
“우린 그대들을 존중하는데 그대들은 우릴 존중하지 않겠다는 건가?”
만약 이 자리에 빙궁주가 없었다면 자신의 기도를 발출해서 더 강하게 서낙을 압박했을 거다. 하지만 빙궁주 앞이었기에 예를 갖췄다.
한설은 검무극의 돌변한 모습에 놀랐다. 지금 보이는 모습은 실없는 소리를 하던 검무극이 아니었다. 저 차가운 모습은 오히려 빙궁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이윽고 지켜보던 빙궁주가 나섰다.
“소교주의 말씀은 잘 알겠어요.”
잠시 취마와 검무극을 번갈아 쳐다보던 빙궁주가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검을 내려라.”
포위하고 있던 무인들이 검을 내렸다.
서낙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궁주님, 저들 말을 믿어선 안 됩니다.”
“네, 죽은 이들의 사인을 철저히 조사해야지요.”
빙궁주가 취마에게 말했다.
“본궁의 허가 없이 궁을 떠나지 마세요.”
감금하지는 않겠지만 함부로 떠나지도 마라. 거기까지가 빙궁주의 절충안이었다.
거기에 서낙이 말했다.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본궁의 고수들이 저들을 감시하게 해야 합니다.”
빙궁주가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대신 검무극을 위해 한 가지 단서를 붙여주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만이에요.”
취마는 검무극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번 일은 검무극의 결정대로 움직여야 했으니까.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충안을 받아들이라는 의미.
취마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겠소.”
취마가 그곳을 떠나자 그 뒤로 이안이 뒤따랐다.
떠나기 전, 검무극이 빙궁주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자극하는 거냐고 물으셨지요.”
아까 그녀는 검무극에게 물었다. 서낙을 이렇게까지 자극하는 이유가 뭔지. 왜 그의 본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주려는 거냐고.
그러자 검무극은 그를 자극하는 건 맞지만 빙궁주 자신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고 대답했었다. 이제 검무극이 그 질문에 답을 했다.
“드디어 그자가 봤나 봅니다.”
배후에 누군가 있다는 의미였다. 서낙을 자극한 건 배후의 그를 자극해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는.
“그럼 나중에 뵙지요.”
빙궁주에게 인사하고 가려던 검무극이 한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하시오, 같이 안 가고. 같은 일원이 되기로 한 것 아니었소? 상황이 좋을 때만 일원인 거요?”
빙궁주와 서낙이 한설을 쳐다보았다.
빙궁주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딸을 쳐다보았고, 서낙은 그 반대였다.
서낙은 절대 따라가지 말라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거역한 적이 없던 그녀였는데.
“같이 가요.”
한설이 검무극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이 떠나자 서낙은 빙궁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소궁주가 마교 소교주와 어울리게 해선 안 됩니다.”
빙궁주는 이 순간 그의 모습이 뻔뻔함인지, 진정 빙궁을 위한 마음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와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으니까.
그 오랜 세월을 배신한다고? 이 생각이 냉정한 판단을 흐렸다.
“제가 잘 살펴보지요.”
빙궁주가 돌아서 그곳을 떠나갔다.
그녀가 떠나가자 북풍대와 호위들이 순식간에 그곳에서 물러났다.
시체를 조사하려는 무인들에게 서낙이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잠시 혼자 있게 해주게.”
그곳에 있던 이들은 서낙이 얼마나 빙궁 사람들을 아끼는지 다들 잘 알기에, 모두 조용히 물러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서낙은 홀로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서글픔이나 안타까움 대신 다른 생각에 잠겼다.
‘그가 나를 돕고 있다.’
향설빙주 때문에 궁지에 몰린 순간,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주르륵.
흥건하던 피 웅덩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피는 서낙의 발이 있는 곳으로 흘렀다.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싶어 서낙이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피가 방향을 틀어 서낙을 향했다.
흠칫 놀란 서낙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움직여서 피했다.
그러자 피가 다시 방향을 바꿔서 서낙 쪽으로 흘렀다.
뒷걸음질을 치면서 서낙이 물었다.
“당신이오?”
서낙의 물음에 흘러오던 피가 멈췄다.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서낙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고맙소. 이제 실수하지 않고 놈들을 처리하겠소.”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잠시 멈춰 있던 피가 천천히 원래 있던 피 웅덩이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피가 흐르던 바닥에는 핏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렇게 피가 원래 있던 웅덩이로 흡수되듯 돌아갔다.
서낙이 천천히 걸어가서 피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피는 평범한 피로 돌아와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은 자신을 도운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경고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핏물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이젠 되돌아갈 수 없는 결정을 내린 남자의 비장한 얼굴이었다.
* * *
“화 그만 삭이고 차라리 술을 마셔.”
검무극의 말에도 취마는 차를 마셨다.
“이러니까 더 무섭잖아.”
상대는 취마를 함정에 빠뜨렸다. 다시 말해 마존을 함정에 빠뜨린 거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텐데, 취마는 여전히 차만 마시고 있었다.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이안도 취마가 정말 화가 많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건 절제하는 모습이다. 팔마존 중에서 제일 잘 흥분할 것 같았는데. 그는 어떤 마존보다 훌륭히 자신을 잘 제어하고 있었다.
“이래서 취마님이 될 수 있었나 봅니다.”
이안이 진심으로 감탄하자 취마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니, 스스로를 잘 조절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자신은 감정적인 사람이다. 이곳에 와서의 냉철함은 한 가지 욕심이 작용했기에 가능했다.
바로 검무극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술 취해서 호수에 몸을 던지는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검무극이 세 사람에게 말했다.
“덕분에 우린 확실히 알게 됐어. 서낙이 배후세력과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드디어 혈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낙이 곤경에 처하자 즉시 움직였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말에 놀란 사람은 한설이었다.
“배후세력이라니요?”
“누군가 그와 손잡고 큰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취마와 이안과는 달리 한설은 그런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죠?”
그녀의 물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이건 궁주님께 해야 할 질문 같군요.”
“어머니도 알고 계시다고요?”
“그럴 거라 생각하오.”
왠지 소외된 기분에 한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자 검무극이 말했다.
“비단 궁주님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무슨 뜻이죠?”
“소궁주께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오.”
빙궁주에게 했던 말을 이제 한설에게도 했다.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대화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나는 내가 먼저 다가갔소. 우리 아버지 생각하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한데 우리 나이쯤 키워주셨으면, 녀석이 이렇게 컸구나, 그런 말씀 한 번쯤 나오게 하는 것도 자식 된 도리 아니겠소?”
물론, 한설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두 분의 관계는 멀고 가깝고. 차갑고 따듯하고의 문제는 아닐 거요. 굳어버린 것이 문제지.”
“!”
굳었다는 말이 한설의 가슴에 와닿았다.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젠 섭섭함을 느끼기도 전에 ‘어머니는 원래 그런 분이시니까’라는 생각을 해버리니까.
먼 것을 당길 생각도, 차가운 것을 따뜻하게 바꿀 생각이 없었으니까.
“왜 내게 이런 말들을 해주는 거죠?”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그렇소.”
뭔가 의도가 있을 텐데. 한설은 검무극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상대였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놈들이 왜 취마님에게 누명을 씌운 거죠?”
“그만큼 급했던 거지. 다시 말해 서 장로가 꼭 필요한 사람이란 의미기도 하고.”
검무극은 이번 일로 상대에 대해 여러 정보를 알아냈다. 게다가 다음 단계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놈들은 이번 일로 우리 발을 묶었어.”
거처 밖에는 빙궁의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딜 가더라도 감시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잘 됐어.”
“잘됐다고요?”
이안은 물론이고 취마와 한설조차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역으로 우리가 무슨 일을 꾸며도 우리 짓이 아닌 것이 되니까.”
“아! 우린 여기에 감시받고 있으니까! 한데 은밀히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우린 안 나갈 거야. 우리 대신 그 일을 멋지게 해낼 사람이 있거든.”
검무극이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취마와 이안의 시선도 검무극을 따라 한 사람을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향해 한설은 말을 듣기도 전에 소리쳤다.
“거절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