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414)
절대회귀-414화(414/424)
제414회 소교주님 주무십니다.
“우리가 세 번이나 만났다고요?”
한설은 북혈문의 장남인 양석을 세 번이나 본 기억이 없다. 예전에 한 번 봤던 기억만 있었는데.
“오늘로 네 번째지요.”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부족해서.”
“아니오. 워낙 바쁘신 분이니 그럴 수 있소.”
양석은 내심 자존심이 상했지만, 마음이 넓은 척 호탕하게 굴었다.
그는 한설을 좋아하고 있었다. 어디 자신뿐이겠는가? 북해에 사는 젊은 남자치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미인을 얻는 것과 동시에 북해빙궁이라는 최고의 가문까지 얻게 되는데.
하지만 그녀는 얼음 미녀였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줬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한데 오늘은 어쩐 일로 오신 거요?”
우선 한설은 조의부터 표했다.
“동생 분 소식은 들었어요. 상심이 크시겠군요.”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만,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양석은 내심 의아했다.
‘이 쌀쌀맞은 소궁주가 동생 때문에 왔을 리는 없는데.’
그랬기에 양석이 짐작하는 이유가 있었다.
“요즘 마인들과 백주설원 원주님의 죽음을 조사한다는 소식은 들었소. 잘 되고 있으시오?”
“이것저것 알아보고는 있지만 쉽지 않네요.”
이곳에 오면서 그녀는 여러 생각을 해봤다. 어떻게 해야 이 양석이 의심하지 않게 접근할까. 그래서 그 사건 조사차 방문한 것으로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고맙게도 상대가 먼저 물어봐 주었다.
“혹 그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신 바가 있으신지요?”
“도와드리고 싶지만, 아는 게 없소.”
한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본궁에 마인들이 와 있는 걸 아시나요?”
“내가 어찌 모르겠소? 그들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는데.”
물론, 진심을 말하면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 마인들 덕분에 눈엣가시였던 동생을 죽일 수 있었지.
“마교의 소교주가 온갖 횡포를 다 부리고 있어요. 이번 사건도 빨리 증거를 내놓으라고 우릴 압박하고 있지요.”
양석은 한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기회다.’
그렇게 친해지고 싶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그녀였는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돕겠소.”
그렇게 양석이 한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두 사람이 있는 객청의 바깥에는 찬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곳으로 하결이 걸어왔다.
찬은 무심하게 그를 쳐다봤지만, 사실 유심히 하결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지금껏 수많은 호위를 만나 보았다.
처음 하결을 보았을 때, 그는 호위들 특유의 어떤 느낌을 다 가지고 있었다.
사방을 경계하는 발걸음과 빠르게 주위를 살피는 시선 처리, 상대를 살필 때는 숨겨둔 암기까지 파악하려는 집요함에, 만성적인 피로를 드러내는 붉게 충혈된 눈까지. 그는 그야말로 호위 무인 그 자체였다.
‘한데 자리를 비운다고?’
이곳까지 함께 왔다가 양석이 객청으로 들어가자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아무리 이곳이 북혈문 내부라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후계자를 호위하는 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은 정말 의외였다.
그사이에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소궁주와 갑작스러운 싸움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물론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남들은 하지 않는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바로 호위 무인이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호위기에 더 이질감이 드는 행동이었다.
대체 후계자를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였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찬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왔던 길을 돌아가 시비의 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왔음을.
그때, 하결이 건물 위를 슥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시오?”
“아니오.”
뭔가를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찬도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기를 끌어올려 더욱 적극적으로 살펴도 주위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분명 뭔가를 느낀 것 같았는데?’
자신이 못 느낀 걸 느꼈다면? 자신보다 고수라는 의미인데?
그래서 조금 전에 뭔가를 느꼈다면 자신에게 알려 줘야 한다. 이쪽이 그냥 손님인가? 빙궁의 소궁주 아닌가?
이래저래 신경이 거슬렸지만, 찬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객청에서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물론 주로 말을 하는 쪽은 양석이었고, 듣는 쪽은 한설이었다.
한설은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한데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남을 속이는데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뭐죠?”
“동생분은 왜 마교와 얽힌 거죠?”
순간 양석의 표정이 흠칫했지만, 이내 태연히 말했다.
“소궁주께서도 아시잖소? 마교 놈들은 어떻게든 엮어서 한몫 뜯어가려는 이리떼 같은 자들이라는 것.”
그러니까. 자신도 마인들은 다 그런 줄 알았다.
“맞아요. 거기다 이번에 온 자들은 정말 이상한 자들이에요.”
그에게는 욕처럼 들리겠지만, 칭찬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양석이 솔직히 말해주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한설은 그와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에 함께 소교주를 만나주시겠어요?”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이안 때문이다.
전에 일을 처리할 때 선택의 순간에 이안이 말했다. 할 만큼 했으니, 다음은 검무극에게 맡기자고. 그리고 그 결과는 놀랄 만큼 좋았다. 이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계속 혼자서 만나고 싶은 상대도 아니었고.
양석은 그녀의 제안을 이렇게 해석했다. 소교주를 상대하는 일에 자신의 힘을 좀 보태 달라고.
“좋습니다. 북해 문파끼리 힘을 뭉쳐야지요.”
“감사해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양석은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북해빙궁 소궁주와 이렇게 좋은 분위기가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마교 놈들 덕분에 동생을 처리했는데, 어쩌면 부인까지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한설은 찬을 거느리고 그곳을 떠났다. 찬은 가면서 하결을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도 완벽한 호위인데, 자꾸 이질감이 든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자 양석이 하결에게 말했다.
“차가우면서도 매력 있는 여자야.”
“얼음에 혀를 대면 잘 떨어지지 않는 법이지요.”
양석은 차갑게 하결을 쳐다보았다.
그를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결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아버지가 붙여둔 호위였으니까.
한 번씩 그를 보면 기분이 나빠질 때가 있다. 언제나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그였는데, 이상하게 자신을 자극하는 순간이 있다. 지금도 그랬다. 건방진 놈이 어디서 조심하라 마라야. 네놈 혀나 조심해라. 확 잘라버리기 전에.
그때, 무인 하나가 달려와서 양석에게 말했다.
“문주님께서 찾으십니다.”
* * *
“잘하면 소궁주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석이 북혈문주에게 한설과의 일을 보고했다.
“소궁주는 널 통해서 뭔가 알아내려고 온 것이다.”
“저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그녀를 이용해서 저쪽 정보를 알아내겠습니다.”
북혈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신중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보고 후에 물러나려는데, 북혈문주가 하결을 남겼다.
“자넨 좀 남게.”
양석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이런 순간이 기분 나쁘다. 자신의 보고를 다 들었으면서, 저놈에게 한 번 더 확인하려 들 때.
한설과 관련해서 뭔가 아버지에게 보고를 받겠지. 하여튼 의심 많은 아버지였다.
‘아들을 좀 믿으십시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아들이 나가자 북혈문주는 대청 뒤쪽 비밀 문을 열고 하결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오직 둘만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엔 작은 대청이 있었다. 사방이 온통 붉은색으로 꾸며진 괴이하고 섬뜩한 곳이었다. 또한, 그곳에서는 짙은 피 냄새가 났다.
대청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 관계는 역전되었다.
하결의 기도는 바깥에 있을 때와는 달랐다. 그의 두 눈과 몸에서는 핏빛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렵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아직도 못 구했나?”
하결의 물음에 북혈문주가 공손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좀 전에 기별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극한지체를 지닌 자를 찾아내서 이쪽으로 호송 중이랍니다.”
정말 기다렸던 소식이기에 하결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얼마나 걸리지?”
“사흘 후면 도착할 겁니다.”
“사흘 후!”
하결이 이렇게 기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극한지체를 찾는 일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제 극한지체를 찾아냈으니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순간 하결의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으으윽! 그만!”
북혈문주가 두려움 가득한 비명을 내뱉었다. 그의 이마 양옆에서 붉은 원이 생기더니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것이다.
“살려주십시오!”
북혈문주가 간절하게 애원했다. 조금만 더 부풀면 머리의 혈맥이 터져 죽게 될 것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위태로운 순간이 계속되다가, 이윽고 하결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북혈문주의 부풀어 오른 피부도 가라앉았다.
“약속은 극한지체를 내 앞에 데려올 때, 지켜질 거다.”
“알겠습니다.”
북혈문주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과연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그가 순순히 약속을 지켜줄 것인가?
하결에게 당한 건 욕심 때문이었다. 욕심이 허점을 만들었고, 그 허점이 자신의 피에 몹쓸 것을 허용했다.
그래, 망하는 건 언제나 욕심 때문이지. 하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도 욕심 때문이었다.
북혈문주는 이조차도 과정이라 여겼다. 지금까지처럼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하결이 차분히 말했다.
“그때까지 마교 놈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교 놈들은 이번 취마 일로 빙궁의 감시하에 발이 묶이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하결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마교 소교주가 오늘 이곳에 왔다 갔다. 아주 미세한 느낌이었지만, 내 눈을 피할 정도라면 그자가 틀림없겠지.”
북혈문주가 재빨리 말했다.
“지금 당장 서 장로에게 기별하겠습니다. 어쩌면 놈이 무단으로 나온 이번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단 사흘이니까요.”
북혈문주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재빨리 그곳을 나왔다.
돌아선 그의 눈빛에는 운명을 상대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기세가 담겨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는 사흘 후에 결정될 것이다.
아니, 이 말이 그의 마음을 좀 더 정확히 표현한 것이리라. 누가 죽고, 누가 사느냐?
한편 홀로 남은 하결은 뒤쪽 벽을 조작했다. 특정한 곳들을 누르고 당기고 또 누르고. 신중하게 장치를 조작하자.
스르르릉.
그러자 문이 열리며 또 다른 공간이 드러났다.
밀실 속의 밀실.
그곳에 거대한 수조가 있었다. 오직 북해에서만 만들 수 있는 얼음으로 만들어져 안이 들여다보이는 특별한 수조였다.
수조 안은 핏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핏물에는 온갖 종류의 약물이 함께 섞여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괴이한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그 냄새는 오직 취마만이 알 수 있으리라. 이 냄새에 향설빙주의 주향까지 섞여 있다는 것을.
그 수조 안에 한 남자가 잠겨 있었다.
핏물 속이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또렷이 다 보였다. 그야말로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긴 팔다리, 환상적인 근육, 그야말로 장인이 깎아 놓은 듯한 완벽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더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남자의 머리카락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피처럼 붉었다.
피와 만난 그의 육체는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하결이 수조 속 남자에게 말했다.
“사부님, 드디어 극한지체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핏물 속에 있던 적발의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뜬 남자는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결을 압도하는 존재감이었다.
젊어 보였지만 결코 젊지 않은, 이 수조 속 남자가 바로 혈왕이었다.
하결은 혈왕의 무공을 이어받은 유일한 수제자였다.
혈왕이 웃었다. 그가 기뻐하자 핏물도 함께 기뻐하는 것처럼 부글부글 핏방울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갑지 않은 소식도 있었다.
“돌아오라는 명령이 또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혈왕이 말했다. 핏속에서 하는 말이었음에도 나직하면서도 깊은 울림으로 똑똑히 들려왔다.
“우린 돌아가지 않는다. 북해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 * *
서낙이 빙궁 무인들을 거느리고 검무극의 거처로 들이닥쳤다.
이안이 문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시죠?”
“소교주 어디에 있나?”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만.”
서낙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소교주가 거처를 벗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단으로 거처를 떠난 일이 밝혀지면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잘못 전해진 소식인 것 같네요. 지금 주무시고 계시니까요.”
문을 닫으려고 하자 서낙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이안은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 했지만, 서낙은 애초에 작정하고 왔다.
“비켜서게. 궁주님이 내린 명령을 확인하는 일을 방해하면, 그 또한 궁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될 테니까.”
서낙이 고수들과 함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서낙과 싸울 수는 없기에, 이안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서낙이 침상에 불룩하게 올라온 이불을 쳐다보았다.
“보세요, 소교주님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다들 물러가세요.”
이안이 목소리까지 낮춰가며 열심히 연기했지만, 서낙에겐 통하지 않았다.
“목침이 보이지 않는군.”
베개를 넣어서 불룩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미 이곳에 검무극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자네가 직접 이불을 걷어내게.”
서낙이 이안에게 명령했다.
이안이 취마를 돌아보았다. 취마는 태평한 얼굴로 창밖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요!’
하긴 이 상황에서 그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겠지.
“어서! 감히 무엄하게 궁주님의 명령을 거역할 작정인가?”
이안은 어쩔 수 없이 침상으로 걸어갔다.
휘리릭.
자포자기한 이안이 이불을 걷었다.
“!”
다음 순간 그곳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검무극이 목침을 안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이 추운 북해에서 이불까지 뺏어가시려고 그러시오? 목침까지 끌어안고 자는 걸 보면서 말이오?”
너무 놀란 서낙은 얼굴이 붉어진 채 말까지 더듬었다.
“대, 대체 이게? 자네가 왜?”
다들 놀랐지만, 이 순간 제일 놀란 사람은 이안이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도련님이 왜 여기서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