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45)
절대회귀-45화(45/424)
제45회 습관이 무섭다.
일화검존은 다음 날 밤에도 나를 찾아왔다.
“원래 삼세번이란 말도 있잖아요. 오늘 마지막으로 싸워요.”
그녀의 방문이 아버지와의 약속을 중요시해서인지, 아니면 어제 비무의 즐거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좋습니다.”
나는 흔쾌히 세 번째 비무를 받아들였다.
“어제 비무에서 비기고 돌아가서 온종일 잠만 잤어요. 첫날 졌을 때는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비기고 돌아온 날은 정신없이 잠을 잤죠. 내가 이렇게 잘 잔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요.”
“평소 잠을 잘 못 주무셨군요.”
“맞아요, 한 번도 깊이 잠든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무슨 생각까지 했는지 아세요?”
“무슨 생각이죠?”
“잠을 푹 자려면 매일 가서 비무라도 해야 하나?”
내가 웃었고 일화검존도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한 차례의 싸움이 끝나고 우린 잠시 떨어져 쉬었다.
그리고 우린 의문이 드는 점이 있으면 그때그때 물었다.
“아까 스물세 번째 공격 때, 왼쪽으로 피하셨는데, 왜 왼쪽이었죠? 오른쪽이 더 빠르지 않았습니까?”
“오른쪽으로 빠진 것은 이공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였어요. 만약 내가 오른쪽으로 피했다면, 이공자에게는 선택권이 세 가지가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왼쪽으로 피하면 두 가지였죠.”
“제 무게 중심 때문이군요.”
“그렇죠.”
나와 검존 정도의 고수가 되면, 수백 수를 나누더라도 바둑에서처럼 그 싸움을 복기할 수 있다.
내가 질문하면 검존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알려주었다.
들어보면 안다. 이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내게 말해주는지, 아닌지. 아버지가 들으면 사람 속을 어찌 아느냐고 야단치시겠지만, 적어도 검존은 진심으로 답해주었다.
그녀 또한 의문이 생기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내 생각을 그대로 대답해주었다. 내가 그녀에게서 진정성을 느끼듯, 그녀 역시 내 대답에 헛됨이 없음을 느낄 것이다. 가르쳐 준다고 손해가 아니다. 이안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지만, 가르쳐주면서 배우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니까.
“언제였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순수하게 무공에 빠져들었던 적이. 어쩌면 처음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녀의 나이나 위치로 볼 때, 처음이라는 말은 쉽게 나올 말이 아니었다.
“저는 오죽하겠습니까?”
“자, 다시 시작할까요?”
“좋습니다!”
이번에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싸웠다. 이번 싸움은 말 그대로 공중전이었다.
땅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발을 디뎌 도약할 수 있는 공격을 해줌으로써 상대를 띄워주었다. 그 과정에서는 절대 기습은 하지 않았다. 서로 도와서 계속 날아다니며 검을 나눴다.
화려한 검광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우린 그렇게 모든 공력을 다 쓸 때까지 날아다니다가 연무장으로 내려섰다.
연무장에는 나와 그녀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비무 첫날이었다면 누가 먼저 숨을 가다듬느냐로 승부의 결과를 따졌을 텐데, 우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술 있나요?”
술을 마시지 않는 그녀가 술을 찾았다.
“네, 있습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서 술을 가져 나왔다.
“좋은 술이네요.”
“술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안 마신다고 모르는 것은 아니죠. 그러고 예전에는 마시기도 했고.”
그녀와 둘이 술을 마셨다. 검존과 비무를 나누고 마시는 술은 특별한 정취가 있었다. 오래전에 술을 끊었다는 그녀는 곧잘 술을 마셨다. 혼자서 몰래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공자,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선배님.”
“갑자기 이렇게 변한 이유가 뭐죠?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내가 이공자를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충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고, 오랫동안 준비해왔습니다.”
“본모습을 감추고 살았다?”
“비슷하죠. 너무 어려서 본색을 드러내면, 형에게 죽었을 테니까요. 제 한 몸을 지킬 때까지 몸을 웅크렸습니다.”
“이공자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주거니 받거니 나눠마신 술병이 비었을 때, 그녀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세.”
나는 깜짝 놀랐다. 일화검존의 말투가 바뀐 것이다.
항상 존칭을 쓰던 그녀가 자연스럽게 하대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말이겠지만, 이공자와 함께 있으면 친구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드네.”
어쩌면 그녀는 내 지난 삶의 단면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나 이안 앞에서는 지난날의 어둠과 고생과 세월을 끌고 오지 않으려고 부단히 더 까불고 장난치고 했지만, 그녀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특히 비무를 하는 동안에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우린 고수에게 배우고, 하수에게도 배운다. 그 낙차가 주는 깨달음이 워낙 강해서, 동수에게서의 배움을 소홀히 여길 때가 많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로 가치를 폄하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 나물에 그 밥이 최고의 만찬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싸웠고, 배우면서 싸웠으며 깨달으면서 싸웠다. 이제 술잔을 내려놓고 싸웠다. 난 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싸움은 우아했다고. 우리에겐 상대를 해치려는 살의가 아니라 비무를 즐기겠다는 고상함만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도 나는 혈천도마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를 내 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잊었다.
그렇게 우린 강력하게 충돌해서 화려하게 터져나간 마지막 초식을 교환했다.
“불경한 말씀이지만, 선배님과 검으로 우정을 나눈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소감에 그녀가 동감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지만, 이공자와 나눈 오늘의 비무는 영원히 기억에 남을 거네.”
일화검존 역시 이 비무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다.
“네, 평생 못 잊을 겁니다. 큰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연 내가 가르침을 내렸을까?”
어쩌면 본인이 받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내가 배운 것이 더 많다. 그녀는 몇 가지 가르침을 배운 정도지만, 나는 아예 다 빨아들였으니까.
지난 사흘의 비무를 통해 비천검술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고, 굳건히 이룬 대성의 체계가 흔들렸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십성 대성의 벽이 무너졌고 이제 내 경지는 십이성 대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오랜만에 찾아온 새로운 변화에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작별인사는 우리가 하지 않았다.
일화검존이 일화검을 뽑아서 앞으로 내밀었고 나는 흑마검으로 답했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맑은 작별을 끝으로, 우리의 비무는 끝났다.
* * *
거처로 돌아온 일화검존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검무극과의 비무가 끝나자 여러 감정이 들었다.
뭔가에 홀린 듯한 삼 일이 지나갔다.
비무에서 진 첫날이 생각났다.
그날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복면을 쓰고 돌아가서 검무극을 죽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날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검무극과의 관계만큼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때 모옥 밖에서 사우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종입니다.”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에는 안주가 될 요리가 들려 있었다. 안주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사우종이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자신이 그녀를 가까이서 모신 이래, 그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한데 오늘 갑자기 술을 마시는 것이다.
‘나쁜 징조다.’
사우종은 이 상황을 이렇게 판단했다.
일화검존이 워낙 은밀히 움직였기에, 사우종은 지난 사흘간의 비무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일화검존은 그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면 심한 자괴감이 드는 사우종이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에게 단 한 번도 허심탄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 그렇겠거니 했었는데, 왜 갑자기 술을 마시는 걸까?
“혹시 이공자와 관련된 일입니까?”
일화검존이 힐끗 사우종을 쳐다보았다. 괜한 소리 말라는 그 눈빛은 차가웠다.
“아무 일도 없다.”
사우종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괜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기분 나쁠 때, 맞춤 처방전을 사우종은 가지고 있었다.
“참, 새로운 녀석을 데려왔습니다. 밀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 그만!”
“네?”
“이제 남자는…… 그만 데려오세요.”
“!”
순간 사우종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를 그만 데려오라고 해서 놀란 것이 아니다. 검존이 자신에게 존대한 것이다. 그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뭐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오직 자신에게만 하대하는 그 특별함에서 자부심을 가졌던 그였다.
잘못 들었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일화검존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작 그만뒀어야 했을 일이었어요. 아니, 애초에 시작해선 안 될 일이었지요.”
처음 사우종이 젊은 남자를 데려왔을 때, 그 순간의 욕정에 진 것이 화근이었다.
딱 한 번만! 그래, 딱 한 번만. 남자와 잔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딱 한 번만 즐기자!
하지만 상자를 열어버린 욕정에 딱 한 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되었다.
남자들이 원해서 하는 일이고, 큰돈까지 주니 오히려 그들을 돕는 일이라는 사우종의 말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솔직히 나중에는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욕정은 습관이 되었다.
욕정보다 습관이 더 무서웠다. 그리 즐겁지도 않은데 끊지를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검무극과의 비무를 끝내자 새롭게 뭔가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검무극과 함께든 아니든.
“그럼 오늘은 돌려보내겠습니다.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알겠어요?”
차가운 눈빛에 사우종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물러가세요. 그리고 비밀을 지킨답시고 청년들을 손대면 내 손에 죽습니다.”
지금까지 청년들은 확실히 챙겼다. 돈을 제대로 주는지, 그들을 살려 보내는지. 사우종이 비밀을 지키려고 죽여버리지 못하게 말이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사우종이 돌아섰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남자들을 이용해서 환심을 샀고, 이 은밀한 비밀이 완벽한 이인자의 자리를 굳혀주었다고 믿었다.
한데 저 낯선 차가움은 뭐지? 저 당당함은 대체 뭐지?
차기 검존은 당연히 자신이 될 거라 확신했었는데.
검존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자신에게서 돌아서고 있었다.
이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근 그녀를 뒤흔들었던 한 사람.
‘검무극!’
* * *
그날 밤 사우종의 거처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청선(靑仙).
섭혼마존의 다섯 제자 중 하나로 그녀는 귀술사였다.
청선은 방에 들어선 사우종의 품에 달려가서 안겼다. 두 사람이 사귄 지 이제 일 년, 한창 뜨거울 때였다.
사우종 품에 안긴 채 청선이 살짝 불평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림을 떼버리면 안 돼?”
그녀의 시선은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향해 있었다. 그림 속 여인은 일화검존이었다.
“그림에게도 질투하나?”
“질투는 아니고. 당신 충성심은 잘 알지만, 방에 저 여자 그림까지 붙여둘 필요가 있느냐는 거지.”
“북천검가의 이인자가 그냥 된 것이 아니야.”
“알아. 알지만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
청선이 사우종을 침상으로 이끌었다.
“그거 알아? 당신이 먼저 날 보자고 부른 것 오늘이 처음이야. 항상 내가 찾았지.”
“그랬나?”
“무뚝뚝하기로는 본교 제일이지.”
“그동안 바빴어.”
“검존 그 할망구 때문이지.”
“말조심해.”
“미안.”
청선은 그에게 파고들었고, 사우종은 언제나처럼 격렬하게 그녀를 안았다.
하지만 사우종의 시선은 벽에 걸린 그림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뜨거운 열기는 충성심이 아니었다.
청선은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자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여자를.
열락(悅樂)의 신음이 잦아들었을 때, 사우종의 입에서 그들의 운명을 바꿀 말이 흘러나왔다. 모든 관계에서 종말의 시작점인 바로 그 말이.
“……부탁이 있어.”